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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빼로데이'에 영국인들이 종이꽃 다는 이유

[해외리포트] 1차 대전 종전일인 11월 11일을 경건하게 기념하는 상징물, 포피

등록|2010.11.29 10:10 수정|2010.11.29 10:11

▲ 가슴에 포피를 단 영국 어린이들. ⓒ 김용수


한국의 11월 11일은 상업성이 넘치는 '빼빼로데이'다. 그러나 이런 들뜬 분위기와 달리 영국의 11월 11일은 다가오는 겨울을 준비하는 듯 차분하고 조용하다.

차가 다니지 않는 영국 노팅엄의 비스톤 광장. 이곳을 오가는 많은 사람이 가슴에 종이꽃을 달고 있다. 어린아이, 초등학생, 중학생, 대학생, 젊은이, 노인 등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람들이 가슴에 단 종이꽃은 다름 아닌 포피(Poppy)다.

포피는 해마다 영국의 11월 11일을 기념하는 상징물이다. 영국에서 이날은 제1차 세계대전부터 최근의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국가를 위해 의무를 다하다 전사한 사람을 추모하는 날이다. 주지하듯이 1918년 11월 11일은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이다. 미국에서는 이날을 1954년 '재향군인의 날(Veterans Day)'로 전환하여 기념하고 있지만 영국에서는 1946년 영령기념일(Remembrance Sunday)로 이름을 바꿔 기념하고 있다.

매년 11월 11일 오전 11시, 학교를 비롯한 영국 전역에서 2분간 묵념 사이렌이 울리고 엘리자베스 여왕과 총리를 비롯한 지도층이 참여한 공식 추모기념식이 런던 로열 알버트 홀에서 열린다. 이 기념식은 <비비시(BBC)>를 통해 생중계된다. 교회에서도 11월 두 번째 주 일요일을 공식 기념일로 정해 추모 예배를 한다.

2분간의 묵념 사이렌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매년 울리고 있다. 사람들은 고개 숙여 묵념을 할 때 "제1·2차 세계대전 중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기억하며 최근 전투에서 생명을 잃은 사람들을 추모한다. 영령기념일 묵념은 영국인들에게 여전히 중요하다.

기념일을 맞아 웨스트민스터, 카디프, 그리고 우튼 바셋의 주요 공원묘지가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고, 영령기념일을 전후해 수많은 사람들이 묘지를 방문한다. 웨스트민스터 공원묘지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에서 임무 수행에 헌신한 사람들이 묻힌 곳으로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의회광장에 자리 잡고 있으며, 11월 11일 정오부터 11월 21일 오후 4시까지 일반에 개방된다.

전사자를 추모하는 포피는 1915년 젊은 의사 존 매크레(John McCrae)가 쓴 '플랑드르 벌판에서'라는 시에서 유래한다. 매크레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플랑드르의 참호와 진흙탕에서 개양귀비(포피)를 발견하고 이 시를 썼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사람들은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미국 정치가인 모리아 미셀이 매크레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전쟁 부상자들을 위한 돈을 모으고자 포피를 팔기 시작한 데서 오늘날과 같은 포피 전통이 시작되었다.

포피는 빨간색과 하얀색의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빨간색 포피는 전사자들을 기념하는 것이고, 하얀색 포피는 전쟁보다는 평화를 사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얀 포피는 '전쟁으로 낯선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갈등을 해결할 더 나은 방법이 있다'는 믿음을 나타낸다. 1928년 영국에서 포피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빨간 포피만 있었지만, 1933년 여성연합이 하얀 포피를 처음 사용하면서 포피의 색은 두 가지가 됐다. 평화선언연합에 따르면, 로열 브리티시 리전(The Royal British Legion)이 빨간 포피의 중간에 '전쟁 반대(No More War)'를 새기지 않은 것에 반발해 하얀 포피가 등장했다고 한다. 현재 영국에서는 하얀 포피보다는 빨간 포피를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빨간 포피와 하얀 포피. ⓒ 김용수


"우리의 자유를 위해 희생한 이들을 기억한다"

영국군 전사자 현황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 전사자는 다음과 같다(제1·2차 세계대전 제외).

1922~1948년 팔레스타인에서 233명, 1948~1960년 말레이시아에서 340명, 1949년 양쯔강 사고로 46명, 1950~1953년 한국전쟁에서 765명, 1951~1953년 이집트 운하 지역 비상사태로 54명, 1952~1960년 케냐에서 12명, 1955~1959년 사이프러스에서 105명, 1956년 수에즈 위기로 22명, 1962~1975년 오만과 드호파에서 24명, 1962~1966년 보르네오에서 126명, 1963~1967년 아덴에서 68명, 1969~1998년 북아일랜드에서 763명, 1982년 포클랜드 제도에서 255명, 1990~1991년 걸프전에서 47명, 1992~2001년 발칸에서 48명, 2000년 시에라리온에서 1명, 2001년 이후 현재까지 아프가니스탄에서 343명, 그리고 최근까지 이라크 전쟁에서 400여 명.
로열 브리티시 리전은 영국군으로 복무했거나 지금도 복무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재정적·사회적·정서적 지원을 하는 자선단체다. 1921년 창립돼 현재 38000명 이상이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퇴역 군인 및 그 가족들에게 보호소나 영국 전역의 복지센터(Welfare Break Centre)를 통해 장·단기 보호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또한 집수리를 위한 대출 등 일시적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긴급 지원이 필요한 경우, 재정적으로 어려운 퇴역 군인과 그 가족을 돕는 역할을 한다.

포피는 1928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11월 11일을 기념할 목적으로 로열 브리티시 리전의 공장에서 만들어졌으며, 기념일 3주 전부터 사람들이 붐비는 곳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다. 화환, 작은 가지, 목걸이 화환, 십자가 형태의 포피는 대략 9파운드(약 16000원)에서 20파운드(약 36000원) 사이로 로열 브리티시 리전에 주문해 구할 수 있다. 이와 달리 일반인이 가슴에 부착하는 작은 포피의 가격은 별도로 정해져 있지 않다. 사람들은 1파운드부터 자신이 기부하고 싶은 만큼 기부한 후 영령기념일을 생각하며 포피를 가슴에 부착한다. 또한 차량 앞에 달고 다니는 모습도 볼 수 있으며, 11월 11일이 지난 후에도 가슴에서 포피를 떼지 않는 사람들도 종종 만날 수 있다.

▲ 포피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로열 브리티시 리전 홈페이지. ⓒ 로열 브리티시 리전


포피는 영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네 사람에게 물었다.

"포피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 싸우다 희생한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것이며, 기부하는 돈은 전쟁에서 다치거나 희생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돕는 데 쓰이기에 매년 기쁜 마음으로 기부하고 포피를 착용한다. 빨간 포피는 전쟁에서 생명을 바친 사람들을 기억하는 상징이다. 또한 나는 평화를 나타내는 하얀 포피도 착용하는데 그것은 언젠가 평화가 오기를 희망하기 때문이다." (마가렛 픽슬리, 83)

"내게 포피는 우리를 위해 흘린 군인들의 피를 의미한다. 포피는 과거에 무엇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우리가 희생한 것이 무엇인지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난 매년 11월 전사한 군인들을 기억하게 하는 포피를 착용한다. 또한 내겐 특별한 이유가 더 있다. 포피는 내가 뵌 적은 없지만 아내인 증조할머니와 당시 여섯 살이던 내 할아버지를 남기고 떠난 증조할아버지를 기억하게 한다." (스미스 셔를, 48)

"내게 포피는 아주 중요한 상징이다. 그것은 군인이었던 가족이나 친구를 기억하게 한다.  나는 11월 11일에 빨간 포피와 하얀 포피를 모두 단다. 빨간 포피는 제1·2차 세계대전에서 억압에 대항해 싸우다 전사한 모든 사람과 세계 분쟁 지역에서 최근까지 평화를 지키다 전사한 사람들을 기억하게 한다. 하얀 포피는 평화가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 모두 알아야 한다는 것을 나타내며 세계에서 겪고 있는 다양한 고통들을 줄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게 한다." (브라우 헤더, 50)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등 영연방 나라와 영국의 수많은 남성과 여성들의 희생으로 이루어진 상징인 포피는 내게 매우 중요하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다. 기부 형태로 포피를 사는 것은 도움이 필요한 군인과 그 가족들을 지원하기 위한 기금을 만드는 것으로 아주 중요한 일이다. 나는 그들을 존경하는 마음과 그들을 기억하는 상징으로 포피를 단다. 더불어 나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한 내 삼촌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포로가 된 내 친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포피를 단다. 그는 랭카스터 폭격 조종사였으며 공군수훈십자훈장을 받았다. 당시 수많은 영국 조종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비록 작은 민간 비행기를 몰긴 했으나 같은 조종사였던 내게 포피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티일 클라이브, 76)

포피는 로열 브리티시 리전의 주 수입원이다. 일반인들의 기부를 통한 포피의 2009년 모금액은 3500만 파운드(약 630억 원)에 해당한다. 10월 28일 콜체스터에서 '가족과 함께하는 토요 콘서트'로 시작된 포피의 2010년 기부 목표는 2009년보다 조금 많은 3600만 파운드다.

▲ 가슴에 포피를 단 영국인들. ⓒ 김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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