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고모령, 곽재우와 두사충
박지극 시집의 '고모령에 내리는 비'를 읽고
구석기, 신석기 지나 청동기, 철기 시대
불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질그릇은
울아비의 아비의 아비가 만든 것.
석(石)이는 질그릇을 만든 아비의 아비의 아비,
금호강 가에서 돌을 쪼개고 있었다.
석이로부터 만년
고분군에 뿌리던 비가
등성이를 넘어 후두둑 금호강을 건너더니
고모령에 내린다
고모령에는 비가 내려야 한다.
무슨 일이건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없지요
질그릇 하나에도 임자가 있듯이
먼지가 일어도 바람 탓이요
비가 내려도 구름 탓이지요.
고모령에 내리는 비는 노래 탓이고요.
박지극 시인이 12월 1일 펴낸 신작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이다>에 실려 있는 '고모령에 내리는 비'의 전문이다.
박지극 시인은 "고모령에 내리는 비는 노래 탓"이라고 말했다. 고모령에 내리는 비가 노래 탓이라면, 그 노래는 어떤 노래이며, 또 그 노래는 무엇 탓인가. '어머니가 (넘다가 누군가를) 돌아보는 고개'라는 고모령(顧母嶺)의 유래부터 들어보자.
일제 식민지 시대에 고모령 인근의 한 마을에 두 형제가 살았다. 형제에게는 홀어머니가 있었다. 그런데 독립운동을 하던 두 형제기 왜놈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어머니는 날마다 경산에서 대구 감옥으로 가는 길목인 고모령 고개를 넘어다녔다(물론 그 당시까지는 아직 고개이름이 고모령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감옥에 가서 두 아들을 만나고 돌아오던 어느 날, 그날은 비가 내렸다.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노라니 어머니는 더욱 설움이 북받쳤고, 일찍 죽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이려니와 투옥되어 갖은 곤욕을 치르고 있는 아들들도 더욱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미 죽은 남편을 볼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자꾸만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금방 보고 헤어진 두 아들이 있는 대구감옥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또 돌리곤 하였다.
이제 이 고개를 넘으면 대구감옥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마냥 비를 맞고 여기 서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니 종당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가면 더 이상 대구가, 비록 감옥이지만 그나마 보이지 않는다. 눈물과 빗물에 젖으며 어머니는 자꾸만 고개를 돌려 아들들이 갇혀 있는 대구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연이 안타까워 사람들은 이 고개를 고모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마침 고개 옆으로는 높낮이가 엇비슷한 봉우리가 둘 있어 큰아들과 작은아들을 나타내는 듯하였으므로 그것들도 '형제봉(兄弟峰)'이라 불렀다.
이 이야기는 자식 때문에 눈물 흘리고 마음 아파한 어머니의 모정을 가슴 아프게 전해주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오랜 세월의 마모를 견뎌내고 면면히 민중의 뇌리와 가슴 속에 전해져 온 것은 그만큼 그 주제와 사연에 절절한 감동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고모령의 아픈 이야기를 들은 작사가 호동아(유호의 필명)와 작곡가 박시춘이 1948년 노랫말을 짓고 곡을 붙여 '비 내리는 고모령'이라는 노래를 탄생시킨 일 또한 인지상정이라는 것이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에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대구에서 경산 방향으로 고모령을 넘어가는 들머리에는 '망우당 공원'이 있다. 의병장 곽재우를 숭모하여 그렇게 이름 지어진 이 공원은 장군의 동상도 세워져 있고, 임란의병관(壬亂義兵館)도 마련되어 있어 명실상부하다는 인상을 준다. 망우당 공원에는 또 고모령 노래비도 서 있다.
고모령은 엇비슷한 높이의 두 봉우리를 끼고 있다. 형제봉이다. 형제봉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무덤과 그를 제향하는 모명재(慕明齋)가 있고, 북쪽으로 내려오면 곽재우 장군의 망우당공원이 있다. 이름 유래도 그렇고, 두사충과 곽재우 두 분이 사후 이 곳에 머무르는 것 또한 이래저래 고모령이 왜(일본)와 역사적으로 인연이 닿는 듯하다는 느낌을 준다.
불로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질그릇은
울아비의 아비의 아비가 만든 것.
석(石)이는 질그릇을 만든 아비의 아비의 아비,
금호강 가에서 돌을 쪼개고 있었다.
석이로부터 만년
고분군에 뿌리던 비가
등성이를 넘어 후두둑 금호강을 건너더니
고모령에 내린다
고모령에는 비가 내려야 한다.
무슨 일이건 저절로 일어나는 일은 없지요
질그릇 하나에도 임자가 있듯이
먼지가 일어도 바람 탓이요
비가 내려도 구름 탓이지요.
고모령에 내리는 비는 노래 탓이고요.
박지극 시인이 12월 1일 펴낸 신작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이다>에 실려 있는 '고모령에 내리는 비'의 전문이다.
▲ 박지극 시인의 새 시집<나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이다>에 실려 있는 시 '고모령에 내리는 비'를 읽는다. ⓒ 정만진
박지극 시인은 "고모령에 내리는 비는 노래 탓"이라고 말했다. 고모령에 내리는 비가 노래 탓이라면, 그 노래는 어떤 노래이며, 또 그 노래는 무엇 탓인가. '어머니가 (넘다가 누군가를) 돌아보는 고개'라는 고모령(顧母嶺)의 유래부터 들어보자.
일제 식민지 시대에 고모령 인근의 한 마을에 두 형제가 살았다. 형제에게는 홀어머니가 있었다. 그런데 독립운동을 하던 두 형제기 왜놈 경찰에 잡혀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어머니는 날마다 경산에서 대구 감옥으로 가는 길목인 고모령 고개를 넘어다녔다(물론 그 당시까지는 아직 고개이름이 고모령은 아니었다.)
어머니가 감옥에 가서 두 아들을 만나고 돌아오던 어느 날, 그날은 비가 내렸다. 하염없이 비를 맞으며 걸어가노라니 어머니는 더욱 설움이 북받쳤고, 일찍 죽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은 물론이려니와 투옥되어 갖은 곤욕을 치르고 있는 아들들도 더욱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미 죽은 남편을 볼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 자꾸만 어머니는 고개를 돌려 금방 보고 헤어진 두 아들이 있는 대구감옥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또 돌리곤 하였다.
이제 이 고개를 넘으면 대구감옥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마냥 비를 맞고 여기 서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니 종당에는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가면 더 이상 대구가, 비록 감옥이지만 그나마 보이지 않는다. 눈물과 빗물에 젖으며 어머니는 자꾸만 고개를 돌려 아들들이 갇혀 있는 대구 쪽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연이 안타까워 사람들은 이 고개를 고모령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마침 고개 옆으로는 높낮이가 엇비슷한 봉우리가 둘 있어 큰아들과 작은아들을 나타내는 듯하였으므로 그것들도 '형제봉(兄弟峰)'이라 불렀다.
▲ 고모령 노래비대구 동구에서 (대구 수성구) 시지 지구와 경산시로 넘어가는 고개 고모령의 들머리인 망우당공원에 세워져 있다. ⓒ 정만진
이 이야기는 자식 때문에 눈물 흘리고 마음 아파한 어머니의 모정을 가슴 아프게 전해주고 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오랜 세월의 마모를 견뎌내고 면면히 민중의 뇌리와 가슴 속에 전해져 온 것은 그만큼 그 주제와 사연에 절절한 감동이 스며 있기 때문이다. 고모령의 아픈 이야기를 들은 작사가 호동아(유호의 필명)와 작곡가 박시춘이 1948년 노랫말을 짓고 곡을 붙여 '비 내리는 고모령'이라는 노래를 탄생시킨 일 또한 인지상정이라는 것이다.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에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에
넘어오던 그날 밤이 그리웁고나
대구에서 경산 방향으로 고모령을 넘어가는 들머리에는 '망우당 공원'이 있다. 의병장 곽재우를 숭모하여 그렇게 이름 지어진 이 공원은 장군의 동상도 세워져 있고, 임란의병관(壬亂義兵館)도 마련되어 있어 명실상부하다는 인상을 준다. 망우당 공원에는 또 고모령 노래비도 서 있다.
고모령은 엇비슷한 높이의 두 봉우리를 끼고 있다. 형제봉이다. 형제봉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임진왜란 때 귀화한 명나라 장수 두사충의 무덤과 그를 제향하는 모명재(慕明齋)가 있고, 북쪽으로 내려오면 곽재우 장군의 망우당공원이 있다. 이름 유래도 그렇고, 두사충과 곽재우 두 분이 사후 이 곳에 머무르는 것 또한 이래저래 고모령이 왜(일본)와 역사적으로 인연이 닿는 듯하다는 느낌을 준다.
▲ 고모령을 북서쪽으로 내려오면곽재우 장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망우당공원으로 들어온다. ⓒ 정만진
▲ 고모령을 (형제봉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왜란 때 귀화한 중국의 장군 두사충을 모시는 모명재가 나온다. ⓒ 정만진
▲ 고모역주위로 넓은 도로가 사통오달 개통되면서 이제는 더 이상 기차가 서지 않게 된 고모역. 철문이 닫혀 있다. 예전에는 이 고모역 앞을 지나는 좁은 산비탈길로 난 고모령을 넘어 대구와 경산 사이를 오갔다. ⓒ 정만진
박지극 시집의 시 몇 수 |
꽃 허리 잘린 채 매달려 있다 상가(喪家)에 나비는 오지 않는다. 잉여(剩餘) 기와 진종일 햇살을 받는다 진종일 빗줄기를 맞는다 진종일 바람에 스친다 밤이면 별을 만난다 이젠 수십 년 온몸에 푸른 이끼가 돋았다 오늘도 잉여기와는 하늘바라기를 하며 기와공의 미소를 떠올린다. 산신 어제는 종일 뒷산 다람쥐하고 놀았지 오늘은 햇빛하고 놀아야지 내일은 바람하고 놀고 모레는 낮엔 푹 자고 저녁에 노을하고 놀아야지. 술값 술값이 없으면 주머니에 시(詩)라도 한 수 넣어 다녀야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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