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분홍색 '의사봉 보따리' 싸들고 다닌 의장님

[取중眞담] 서울시의회 무상급식 조례 통과하던 날

등록|2010.12.01 22:37 수정|2010.12.02 08:30
[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 1일 오전 한나라당 서울시의원들이 친환경무상급식 조례안 처리를 막기 위해 서울시의회 의장석을 점거하고 있다. ⓒ 권우성


1일 오후 8시를 넘긴 시간, 불빛이 환하게 켜진 서울시의회 본회의장에는 때 아닌 활극이 벌어졌다. '친환경 무상급식 조례안' 상정에 반대하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점거한 단상으로 민주당 의원 70여명이 몰려들었다.

돌격대처럼 쏟아져 나간 민주당 의원들은 한나라당 의원들의 사지를 번쩍 들어 단상 아래로 몰았다. 27명의 한나라당 의원들은 불과 10여분 만에 본회의장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민주당 의원들이 터 준 길로 올라간 허광태 서울시의회 의장이 무상급식 조례안을 상정하고 처리하는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무상급식 조례안은 그렇게 한나라당의 허망한 패배로 막을 내렸다.

당시 허 의장을 수행하던 의회 직원은 의장석이 확보되자마자 '분홍색 보따리'를 단상에 전해줬다. 보따리 속에는 '의사봉 셋트'가 들어 있었다. 한나라당에 뺏기지 않으려 의사봉을 싸들고 다니며 하루 종일 기회를 노렸던 셈이다. 민주당의 준비는 그만큼 치밀했다.

흥분해 전화기까지 날린 시의원... "소수당을 배려하라"

민주당의 숫자에 밀려 분퇴한 한나라당은 고성과 협박을 내지르며 끝까지 저항했다. 한 의원은 "허 의장, 당신 실수하는 거야, 역사의 심판을 받을 거야"라고 삿대질을 해댔다. 휠체어를 탄 또 다른 의원은 "사람이 밀려 죽어가는데, 무슨 무상급식이냐"고 흥분하며 전화기를 뽑아 집어던졌다.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라며 자신을 막아 선 민주당 의원을 몰아세우는 의원도 있었다. 분이 풀리지 않은 한나라당 의원들은 곳곳에서 악을 쓰며 항의했지만, 결과를 돌이킬 수 없었다.

전자표결 시스템이 고장나 기립 방식으로 무상급식 조례안 표결 처리가 시작되자, 한나라당 의원들은 "잘 해 보라"며 분기탱천한 모습으로 퇴장했다. 기립 표결이 끝나고, 허 의장이 무상급식 조례안이 통과를 선언하는 방망이를 세 번 내리친 순간 본회의장에는 일제히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전 9시 40분부터 시작된 한바탕 싸움은 그렇게 끝났다. 

서울시의회에서 의장석이 점거되고, 의원들이 몸싸움을 벌인 것은 사상 초유의 일이다. 국회에서는 익숙한 일이지만, 서울시의회에서는 낯선 풍경이다. 옛날 서울시의회가 국회였을 때, '김두한 똥물 투척사건'이나 '김영삼 제명사건'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말고는 처음이 아닌가 싶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이번 일로 '소수당의 비애'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지난 6월 재보선 전까지 서울시의회를 독점하다시피 해 온 한나라당으로서는 충격이 클 만도 하다.

이날 싸움이 벌어지기 전까지 한나라당 의원들은 하루 종일 '민주적인 절차'와 '소수당에 대한 다수당의 배려'를 요구했다. 다수당이 숫자로 횡포를 부리지 않는 의회. 민주주의 공화정을 헌법에 명시한 사회라면 당연한 얘기다. 한나라당의 주장에 틀린 게 없다.

하지만 그런 주장에 앞서 한나라당 의원들이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점이 있다. 국회든 지방의회든, 다수당의 횡포 '전통'을 확립한 정치세력이 과연 어디였던가. 호남을 제외한 전국 지방의회에서 한나라당은 오랫동안 '1당 독재'를 해 온 게 사실이다.

민주당이나 민주노동당과 같은 소수의 목소리는 거의 반영되지 못했다. 조례안을 일방 통과시키거나, 노른자위 상임위를 독차지한 것도 당시의 각 지방의회의 다수당이었다. '화려한 과거'를 기억하는 한나라당은 그래서 무상급식 조례안 '패배'가 더 아프고 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 1일 밤 한나라당 서울시의원들이 '친환경무상급식 조례안' 처리에 반대하며 본회의장을 점거농성중인 가운데, 최종협상이 결렬된 뒤 민주당 의원들이 의장석을 에워싸고 있던 한나라당 의원들을 끌어내고 있다. ⓒ 권우성



다수당의 횡포 앞에 무너진 한나라당, 교훈은 얻었나

비록 한나라당은 졌지만, '민주주의 절차를 지키고 소수당을 배려하라'는 그들의 요구는 여전히 유효하다. 훗날 한나라당이 다수당의 지위를 점했을 때, 이날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굳이 훗날까지 갈 것도 없기는 하다. 서울시의회 뿐 아니라 전국 지방의회에서 한나라당은 정강·정책이 다른 정당들과 시시때때로 대립하고 있다. 국회만 해도 한나라당은 절대 다수 의석을 확보한 상태다.

"소수당을 배려하라"는 서울시의원들의 주장이 정당성을 얻으려면, 한나라당이 다수당인 국회에서도 통할 수 있어야 한다. 당장 국회는 내년도 예산안을 놓고 격돌을 예고하고 있다. "이번 달 6일까지 예산안을 반드시 처리하겠다"는 김무성 한나라당 원내대표의 '불도저식' 행보에 한나라당 서울시의회 의원들의 울부짖음은 어떻게 들릴까.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