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삶이 그의 글, 그의 글이 그의 삶"
9년만에 제3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이다> 펴낸 박지극 시인
▲ 박지극 제3 시집제1, 제2 시집 출간 이후 9년만에 세상에 나왔다. ⓒ 조정훈
시집을 읽다가
잠들면
꿈이 달콤하다.
- '꿈이 달콤하다' 전문
술값이 없으면
주머니에
시(詩)라도 한 수
넣어 다녀야지.
"시를 쓰고, 시를 읽는 일이 행복하다"는 박지극 시인이 9년 만에 새 시집을 냈다.
12월 1일 세상에 태어난 <나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이다>가 바로 그의 세 번째 시집. 90편의 시에 짧은 산문 17편을 곁들였다. 새 시집 출판기념회는 오는 4일 오후 7시 대구 시내 해봉식당에서 열린다.
생물분류학 박사인 박 시인은 9년 전인 2001년 4월, 꽃을 소재로 인간의 삶을 노래한 <꽃과 사람- 동백나무 붉은 꽃은 시들지 않는다>와, 나무를 통해 사람의 갈 길을 살펴본 <나무와 사람- 오리나무처럼 튼튼한 목소리로>를 제1 시집과 제2 시집으로 각각 상재한 바 있다. 물론 새 시집 <나는 아무것도 아니면서 아무것이다>에도 그의 식물학자적 인식은 숨겨지지 않고 고스란히 드러난다.
허리 잘린 채
매달려 있다
상가(喪家)에
나비는
오지 않는다.
- '꽃' 전문
새 소리, 바람 소리가 그립다
햇살 한 줌 받고 싶다
(이 화분은 빛을 많이 받으면 안 되니 이 자리가 좋겠습니다.)
뿌리를 뻗고 싶고, 물을 흠씬 마시고 싶다
(물은 일 주일에 한 번만, 아주 조금씩 주세요.)
기지개 켜듯 가지들을 쭉 뻗고 싶다
(이쪽 가지는 왼쪽으로 뒤틀리게 하는 것이 좋겠군요.)
철사에 감겨 뒤틀린 채로
얼마나 견뎌야 할까
…… ……
(야! 자알 키웠구먼. 수백만원은 가겠는데!)
나
겨우
목숨이
붙어 있다.
- '분재' 전문
그런가 하면, 시집의 상당 부분은 사람 사는 현실의 정치경제적 문제에 대한 관심으로 채워져 있다. 이는 박지극 시인의 이력이 잘 말해준다. 시인은 노태우 정권 시절 교육민주화 운동을 이유로 고등학교에서 해직되었다가 1994년 복직하여 지금은 수성고등학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는 현직 교사로, 전교조 대구지부장,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상임대표,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공동대표를 역임하였고, 교육평론집으로 <학부모를 위한 교육학>과 <교육개혁과 교육자치>도 저술한 바 있다.
왕이 갇혔다
스스로 걸어가 갇혔다
동궁 시절
말 달리던
왕궁의 사슴 사냥터
왕은 갇혔다
왕이 되기 위해 갇혔다
아니
갇히고 나서야
왕이 되었다
- '왕이 되다' 전문
진종일
햇살을 받는다
진종일
빗줄기를 맞는다
진종일
바람에 스친다
밤이면
별을 만난다
이젠
수십 년
온몸에 푸른 이끼가 돋았다
오늘도
잉여기와는
하늘바라기를 하며
기와공의 미소를 떠올린다
- '잉여(剩餘) 기와' 전문
시인은 머리말에서 "지나온 삶을 무게로 잴 수 있다면 나의 삶은 얼마나 무거울까? 이제 되돌아볼 나이가 되었는지 자꾸만 지난 삶의 무게가 궁금해진다."면서 "생각해 보면 나의 삶의 무게는 이 책 속에 있는 글의 무게만큼이리라. 내 지난 삶이 한 장의 그림이 된다면 이 책 속의 글 한 편, 한 편을 조각그림으로 하여 맞춘 한 장의 그림이리라."하고 말했다. 시인의 독백이 시사해주는 바와 같이, 올해 화갑을 맞이하여 그 기념으로 이번에 새 시집을 펴낸 탓인지, 시인은 책의 상당 부분을 세상을 관조하고 남은 생애의 여유를 즐기려는 온유한 목소리로 채우고 있다. 이런 시들은 읽는이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를 가득 떠오르게 해준다.
어제는
종일 뒷산 다람쥐하고 놀았지
오늘은
햇빛하고 놀아야지
내일은
바람하고 놀고
모레는
낮엔 푹 자고
저녁에 노을하고 놀아야지
- '산신' 전문
느티나무에는 그네를 매달아
손자 손녀 외손자 외손녀 놀러오면
그네 타고 놀게 해야지
할아버지가 밀어주면 좋아하겠지
가을에는 뒷산으로 가서
노랗게 핀 감국을 따야지
그늘에 잘 말려 두었다가
조용한 친구가 찾아오면
국화차를 끓여 대접해야지
나도 마시고
국화차를 마시며
시집을 읽어야지
— '그런데 나는' 일부
박지극 시인이 은퇴 후 시골에 들어가서 살아가는 모습이 저절로 연상되는 시들이다. 아무래도 그는 시인인 모양이다. '조용한 친구'가 찾아오면 손수 말린 국홧잎으로 차를 끓여서 대접하겠다면서 시인은 자신도 국화차를 마시면서 "시집을 읽어야지"하고 다짐하지 않는가. 마지막으로, 시집의 발문 '스스로 달이 되다'를 쓴 최병진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올해 회갑을 맞는다. 그런데 그처럼 맹렬한 삶을 살아본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질곡의 시대를 살면서 사회를 향해 정권을 향해 그만큼 분노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렇지만 그의 글 속에는 분노가 드러나 있지 않다. 뜨거웠던 시절에 가졌던 모든 분노는 그의 글 속에서 승화되어 있다. 이웃에 대한 배려와 세상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맺어지고 있다. 비록 그의 60년 삶은 숱한 시련과 좌절로 점철되었지만 그는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그의 글은 따뜻한 희망을 말하고 있다. 나는 이 발문을 통해 그의 글에 대해 따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의 삶이 그의 글이고, 그의 글이 바로 그의 삶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이 날것 그대로이듯 그의 시 또한 가공하거나 기교가 묻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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