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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 비정규직노조 희망호에 현대차노조는 돛이 될까

현대차노조 마녀사냥 막아주던 사람들은 누구였나

등록|2010.12.03 16:54 수정|2010.12.03 16:54

▲ 현대차정규직노조가 207년 울산공장에서파업을 벌이고 있다 ⓒ 박석철


지난 2006년 10월 24일. 울산시의회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국회 행정자치위원회의 울산시 국정감사.

한나라당은 물론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 의원들도 너나 없이 국감에 출석한 현대차 윤여철 사장과 박유기 현대차노조위원장을 다그쳤다. "임금이 높은데도 파업을 이어가니 귀족노조가 아니냐"고.

이날 국감에서 유일하게 현대차노조의 파업 정당성을 설파한 의원은 민주노동당 소속 단병호 의원. 그는 현대차노조가 귀족노조라는 타 당 의원들의 논리에 맞서, 노동의 정당한 대가와 노동조합의 중요성, 노조의 사회 참여성을 역설했다.

이날 국정감사에서 쏟아진 현대차노조에 대한 비난은 노조의 정치 참여성 여부에도 초점이 맞춰졌다. 그해 민주노총을 필두로 현대차노조가 앞장서서 벌인 '비정규직법안 통과 저지' 총파업을 두고서다. 특히 현대차 노조는 이 파업에 이어 '한미FTA 반대'를 위한 파업찬반투표를 앞두고 있었다.

현대차 노조는 모든 사람들이 귀족노조라고 몰아부침에도 2007년 '한미FTA 반대' 파업에 동참했다. 보수언론을 중심으로 마녀사냥이 더 격해졌다. 이들에 대한 마녀사냥은 다음해인 2008년 미국산쇠고기 수입 반대 파업 동참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현대차노조의 파업과 이에 따른 귀족노조 논란은 비단 2006년만이 아니었다. 그 전해, 그 전전해에도, 그 후년, 그 후후년에도 변함이 없었다.

현대차노조가 "주야 맞교대와 빠짐없이 특근을 해서 번 돈이며 과장된 것도 있다"고 하소연해도 그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곳은 거의 없었다. "이 나라의 노동자로서 한미FTA 반대 총파업에 동참하는 것이 그렇게도 죽을 죄를 지은 것이냐"고 한 목소리도 귀족노조의 정치파업으로 치부됐다 .

하지만 이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이고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시민사회단체, 진보진영 정당. 이들은 현대차노조를 겨냥한 보수단체의 집회 등에 맞서 노조를 지지하는 집회로 맞불을 놓기도 했다. "국민과 노동자의 한 사람으로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것이 왜 불법이냐"는 변호를 했다.

이즈음 계속되는 귀족노조 몰이에 현대차노조는 지쳐갔다. 특히 온 매체에서 비난이 이어지자 가족들이 불안감을 느꼈다. 이듬해인 2009년에도 언론의 시선은 현대차노조에 집중됐다. 부담감을 견디지 못한 집행부는 중도사퇴했다.

이어 현대차노조는 보수언론을 필두로 "실용노선"이라고 칭찬한 새 집행부를 탄생시켰다. 다시 2010년. "현대차 2년 연속 무파업"이라는 칭찬기사가 쏟아졌다. 그 때다. 대법원이 항상 그늘에 있어야 했던 비정규직노조를 정규직으로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비정규직노조는 현대차에 정규직화를 요구했다. 회사는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급기야 하청업체 한 곳을 폐업하는 과정에 비정규직노조 조합원이 연행되고 폭행 당했다. 비정규직노조는 11월 15일 파업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파업 며칠 후, 언론에서는 일제히 "파업으로 1000억 손실" "사상 최대 2000억 손실" "연봉 4000만원"이라는 기사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수 년 전 현대차노조에 쏟아졌던 시선과 사냥몰이가 비정규직노조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정규직노조가 비정규직노조의 파업 농성장에 밥을 갖다주고 힘을 보태주고 있다는 기사에 반해 일부언론은 현대차 정규직노조와 비정규직노조의 불협설을 보도하고 있다.

▲ 노동자대투쟁 때인 1987년 8월 18일. 울산 동구 현대중공업 운동장에 모인 4만 여명의 현대그룹 노동자들이 남목고개를 넘어 시내로 진출하는 광경을 담은 사진. 이 8.18 대행진은 87년 울산 노동운동의 분수령이 되는 사건이었다. ⓒ 울산혁신네트워크

민주노조 지탱해온 현대차노조

1987년, 밀물처럼 터져나온 민주화의 요구에 노태우는 6·29선언을 한다. 노동의 '노'자를 꺼내도 위협받던 암흑기를 벗어나 곳곳에서 노동조합이 생겨났다.

울산의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가 노동자대투쟁의 선두에 섰다. 진압과 폭력, 이어진 투옥에도 그들은 굴하지 않고 빼았겼던 노동권리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 이면에는 노동자 권리찾기를 돕다 고초를 겪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바로 시민사회단체와 진보진영 사람들이었다.

역사는 이를 증언해 준다. 고교 교사이던 노옥희씨가 노동자대투쟁 때 폭행 당하고 투옥된 것은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이 산업 현장에서 받는 업악을 보고서라고 했다. 함께 투옥된 시민운동가 장태원씨는 노동의 참 가치와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를 돕다 투옥됐다.

몇 년간에 걸친 노동자 대투쟁이 끝난 후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급격히 상승하고 노조는 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를만큼 올랐기 때문일까? 이후 노동자대투쟁의 양대축이던 현대중공업 노조는 실리를 택했다. 지난 2004년 '하청노동자도 인간이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분신한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박일수씨의 외침을 노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현대중공업노조는 자신들이 건설한 민주노총에서 제명됐다.

이후 언론은 "현대중공업, 모범적인 노사문화"라고 심심찮게 보도했다. 하지만 이 칭송 속에 그동안 해고되고 투옥된 하청노동자의 외침은 부각되지 않았다.

다시 스포트라이트가 현대차로 왔다. 시민사회단체와 진보진영. 이들은 모든 사람이 현대차노조를 "귀족노조"라고 욕할 때 그들을 옹호하고 지지하고 지원했다.

이제 그들은 현대차노조에 묻고 손을 내민다. 현대차노조가 답을 할 차례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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