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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경전에서 사회경제사상을 찾아나섰다

등록|2010.12.04 12:30 수정|2010.12.06 09:38

▲ ⓒ 동국대 출판부

1.

"해탈이라고요?
해탈이 어디에 있다는 말입니까?
우리의 주는 창조의 속박을 스스로 기꺼이 떠맡고 계십니다.
그분은 영원히 우리들 전체와 맺어져 있습니다.

명상에서 빠져나와 꽃도 향도 내버려 두시지요!
당신의 옷이 더렵혀지고 갈가리 찢긴들
무슨 해로움이 있겠습니까?
당신의 이마의 땀과 노역 속에
그분을 만나서 그분 곁에 서십시오.(타고르의 <기탄잘리> 중)"

2. 막스 베버의 불교인식에 대한 오류

막스 베버는 자신의 명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종교적 세계관에 대해 탐구했다. 종교적 이념과 이를 통해 형성된 세계관은 일상의 삶 속에서 인간의 행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통찰이 자리하고 있었던 것.(베버의 책을 번역한(도서출판 길) 김덕영 교수의 해제, '종교‧경제‧인간‧근대' 515면 이하 참조)

종교에 대한 베버의 비교연구는 '종교적 이념에 의해서 조건 지어지고 영향을 받은 다양한 문화권의 경제윤리에 대한 유형학과 사회학을 추구'한다. 물론 그가 "이러한 비교연구를 통해서 추구한 인식 관심은 세계종교에 공통적인 것, 즉 보편적인 것을 밝혀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티즘의 금욕적 윤리에서 그 중요한 인과관계를 찾을 수 있는 서구의 경제적 합리주의의 특징을 보다 명확하게 드러내는 데 있었다.(김덕영)"

그런 한계였을까. 아니면 본질적 이해였을까. 어쨌든 막스 베버는 '종교의 분류'에서 불교를 '세계도피의 합리주의'로 유형화했다. 그 중에서도 "우주 중심주의‧명상주의‧탈세속주의가 결합된 형태"의 종교군이 있는데, 불교를 여기에 귀속시켰다. 한편 베버는 다른 저서 <인도의 종교>에서, 인도의 모든 종교는 세계 일반을 부정할 뿐 아니라 개인적인 구원만을 갈망한다고 논했다. 이 설명에 따르면, 불교는 평정을 찾는 교양 있는 지식 계급들의 '출가주의적 구원론'에 불과했다. 따라서 "불교는 어떤 종류의 '사회적' 운동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그러한 것(사회운동)과 유사하지도 않다. 불교는 어떠한 '사회적-정치적' 목표도 내세우지 않는다(베버)"는 결론에 자연스럽게 도달한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2000년을 살아온 서구 세계에서 불교에 대한 가장 기본적 인식이나 비판은 '생명 부정'같이 생기에 차 있는 것을 부정하는 종교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하지만 '부정'은 인식이나 욕망처럼 인간의 중요한 부분과 관계가 있다. 불교가 '부정'이라는 문제를 종교의 가장 중요한 포인트로 간주하는 것은 종교로서 대단히 가치 있는 점이다. 역설적이지만 현세에서 가치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전부 '부정'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새로운 출발이고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이다. 그래서 일본의 불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지는 "불교는 '부정'을 원동력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운동"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나카자와 신이지, <불교가 좋다>)

왜 하필 막스 베버의 저서에 대한 서평이 아님에도, 막스 베버의 불교에 대한 이해로 시작했는지?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박경준 교수가 <불교사회경제사상>(동국대학교출판부)을 펴냈다. 저서의 핵심 주제가 '불교의 사회경제사상'과 '불교의 깨달음'이다. 그런데 두 주제 모두 막스 베버의 종교인식, 그 중에서도 불교에 대한 인식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연관이라기보다는 막스 베버의 불교이해에 대한 오류를 반박하는 데서 출발한다. 서양 최고의 사회사상가가 인식하고 있는 불교의 사회경제사상과 깨달음에 대한 문제다.

사실 이 논쟁은 대단한 논쟁이다. 좁게는 베버의 비교종교학에 대한 문제제기다. 넓게는 기독교와 불교의 사회경제사상과 깨달음에 대한 비교종교학이다. 물론 한계는 있다. 다만 막스 베버의 인식이 논문이나 저술의 출발점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아직까지 막스 베버와의 직접적인 비교저술로까지는 원치 않았던 것 같다. 우선은 막스 베버의 인식에서 출발하되 그에 대한 반박을 단서삼아 불교의 사회경제사상과 깨달음에 대해 우리 학계와 불교계의 속설과 오류를 깨트리고 불교를 현대적으로 재발견하려 했던 것. 필자는 그렇게 읽고 싶었다.

3. 고대불교는 종교윤리와 경제윤리의 조화를 꿈꾸었다

불교에도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논했던 것과 같은 사회경제사상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저자의 답변은 명쾌하다. "오늘의 시점에서 보았을 때 비록 완성된 형태의 경제이론을 가지고 있지 않다하더라도 생산과 분배 등에 관한 다양한 실천적 경제윤리를 제공하고 있다."

방대한 논쟁을 요약할 능력은 못된다. 몇 가지만 들여다보자. 먼저 재(財)의 효용론이다. "불교경전은 세간에서의 재산소유‧관리‧분배 등의 경제행위를 모두 인정하고 있으며 그 관심은 출세간과 마찬가지로 경제윤리적 측면에 비중이 있었다." 즉 고대 경전은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을 취득하고 근면을 통해 사치와 향락에 빠지지 않는 검소한 소비생활을 권장했다. 부처는 근면과 검소, 기술의 습득을 재화 생산의 주요한 덕목으로 꼽았다. 이는 종교적 측면에서 경제활동의 윤리적 지표를 제시한 것이겠지만, 경제행위에 대한 철학적 기초를 마련함으로써 생산활동의 중요성과 아울러 생산에의 사회적 참여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적극적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평가다.

나아가 불교의 평등사상은 '직업에는 귀천이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뒷받침한다. 대신 부처는 올바른 직업과 그릇된 직업을 엄격히 구분했다. '올바른 직업'의 판단기준은 종교적 목표와 사회적 도덕성. 이것이야말로 경제윤리와 종교윤리의 만남이다. 불교적 입장에서 본 노동의 의미는 어떠했을까. 선농일치(禪農一致)다. 노동은 '종교적 수행을 위한 수단'이다. 노동 그 자체는 수행의 과정이다. 노동의 결과는 고통 받는 중생에게 돌아간다. 불교의 노동관이다.

물론 2500년 전의 불교가 오늘날 통용되는 현대적 의미의 경제이론을 제시했을 리는 없다. 이를 찾아 해석하고 불교윤리와 한국사회의 시장경제 제도를 연결시키는 일은 학자의 몫이다. 불교는 재창조되어야 하고, 현대화되어야 하고, 끊임없이 다른 종교와 사상에 비추어가며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베버의 방법론과 유사한 방법론, 더하여 독자적 불교관으로, 박사학위 청구 논문 이래 일관되게 불교의 사회사상을 점검하고 재의 효용론에서 생산론, 직업론, 소비론, 노동관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경제사상의 발굴작업에 나선 것은 한국 종교학계의 분명한 진전이다.

4. 불교의 깨달음은 결코 개인적 범주가 아니다, 사회적이다

불교적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의 운명은 신의 뜻도 아니요, 숙명이거나 우연의 산물도 아니다. 인간 스스로의 업(業)의 산물이다. 한마디로 자업자득이다. 이런 불교의 세계관은 개인적 차원에서 이해되고 수용돼 왔으며, 그러기에 불교인들은 대부분 개인적으로 복을 빌고, 개인적으로 착한 일을 행하고, 개인적으로 덕을 쌓는 일에 노력해왔다. 마치 세간에서 이해하는 수준의 산중불교의 전통처럼 그렇게 살아왔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의 우리나라 불교계나 재가불교인들에게 퍼져 있는 불교의 업설에 대한 일반적 통념이다.

저자는 이런 불교의 업설, 나아가 사회참여사상에 취모검을 들이댔다. 불교의 업설은 개인적 차원의 업인 불공업(不共業)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공동의 업, 즉 공업(共業)까지도 포함한다는 것. 다시말해 '개인의 운명은 개인적 업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의 업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공업이란 "일체중생의 공동의 (집단적) 업으로서 자연환경의 성립과 파괴, 그리고 상태를 규정하는 업"이다.

공업의 근거가 경전에 있다. "그때의 인민들은 비법을 멋대로 행하고 죄악을 습관적으로 저질러 복력(福力)이 쇠퇴했다. 선신(善神)들이 버리고 떠나자 갖가지 재난이 다투어 일어났으니, 그것은 모두 공업(共業)으로 말미암은 바이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하늘은 크게 가물고 여러 해 동안 단비가 내리지 않았다. 초목은 말라 타들어가고 샘은 말라버렸다.(<보살본생만론(菩薩本生鬘論)>)"

이렇듯 개인의 운명이 개인에만 맡겨져 있지 않고 사회적 운명과 함께하는 것이라면, 이 지점에서 불교의 사회사상이 탄생한다. 그런데도 불교인들은 사회적 실천 또는 공동의 노력을 소홀히 해왔다. 업설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일이다.

또 하나 광범위하게 유포된 오해가 있다. 전생의 업을 지나치게 강조한 숙명론이 그것이다. 업의 범위를 개인에 한정시키고 그 제한된 업을 강조하다 보니 언제부턴가 윤회론과 결합되어 불교의 업설은 일종의 숙명론에 빠져들었다. (적어도 석가모니는 윤회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다. 윤회를 거론하기 시작한 것은 후세의 대승불교다. 나카자와 신이지, <불교가 좋다>)

같은 차원에서 오해한 대표적인 사람이 역시 막스 베버다. 베버는 <인도의 종교>에서, "불교의 업설은 영원히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을 불러일으키지 못할 것이고 인권 사상의 발전에 방해되며, 인간의 공동의 권리라든가 공동의 의무를 전혀 문제 삼지 않으며 국가라든가 시민과 같은 개념을 발생시키지도 못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불교는 어떠한 사회적 운동과도 하등 관계가 없으며, 어떠한 사회적‧정치적 목표도 내세우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공업에 대한 몰이해가 불교의 사회참여사상에 대한 오해로 이어졌다. 막스 베버가 불교를 이해할 당시 공업사상은 없었다. 저자가 공업사상을 찾아냈다.

본래 불교 승가는 세속으로부터의 은신처라기보다는 일종의 대안사회였다. 중생교화와 사회적 실천이 둘이 아니었다. 더 이상 깨달음은 개인의 것이 아니다. 모두의 깨달음이다. 사회의 깨달음이다. 깨달음의 사회화다. 저자는 깨달음의 사회화를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개인의 깨달음을 개인에 한정시키지 말고 사회구성원 전체가 공유하도록 함'의 의미이다. 둘째, 깨달음을 개인적 차원에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 타인과 더불어 추구하는 것이다. 셋째, '깨달음을 사회에 적용함'의 의미이다. 다시 말해 수많은 사회적 고통과 그것을 발생시키는 사회적 무명(구조적 모순이나 불합리한 제도 따위)을 깨달아 밝히고 그것을 극복해 가는 실천이다. 이것은 정의 사회와 복지사회 구현을 지향하는 '불교의 사회참여 또는 사회적 실천'이다." 그렇다면 불교는 더 이상 개인의 깨달음이 아니다. 은둔불교가 못된다. 공업사상은 불교와 우리 사회에서 재발견되고 재구성되는데 분명 중요한 실천적 토대로 자리잡을 것이다.

5. 한국 사회에서 종교와 불교의 가치를 묻는다

지금까지 보았듯 저자의 불교에 대한 관점은 종합적이다. 단순한 종교사상이 아니다. '정치‧사회‧경제‧문화 사상'까지를 포함한, 유기적이고 역동적이며 총체적인 인생의 지혜 또는 삶의 예술이다. 이렇게 파악하는 것만이 부처의 말씀을 "한낱 화석화된 언어와 문자가 아니라 역사 현실 속에 살아 숨 쉬는 가르침으로 구현해 가는 노력이야말로 불교 그 자체에 신선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막스 베버와 한번 비교해보는 것은 어떨까. 베버는 종교의 현재 혹은 미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까. 지난 시절 종교의 세기처럼, 기독교 등은 여전히 인간의 삶과 행위에 중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베버는 탈주술화되고 합리화된 오늘날의 세계에서 더 이상 종교가 과거처럼 중요하고 본질적인 문화적 의의를 지니지 못한다고 본다. 점차 다양한 종교 외적 문화 이상과 가치체계가 분화됨과 동시에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삶의 영역을 구축하게 되면서, 종교는 점차 의미 부여, 가치 창출 및 사회 통합 같은 전통적인 기능과 역할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더불어 이제 다양한 삶의 영역에서 합리적이고 물상화된 사고 방식과 행위 방식이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종교는 이제 다른 여러 삶의 영역들과 영원히 경쟁하고 갈등을 겪어야만 하는 문화사적 운명에 처해 있다.(김덕영 해제)"

그렇다. 종교는 가치다원주의 시대를 살아간다. 과학의 시대를 살아간다. 때로는 물신의 시대와 경쟁한다. 여전히 미신은 존재한다. 저자의 불교에 대한 '과도한' 욕심과 종교의 미래는 과연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온 세상을 불교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재창조하고 싶겠지만 과연 그러한 해석과 학문적 재창조는 우리 사회의 영성적, 사회적, 경제적 토대로 자리할 수 있을까. 종교박물관이라는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 천주교 등과 상호 조화롭게 종교 간의 대화를 꾀하면서 한국 사회를 좀 더 신실하게 만들어나갈 수 있을까.

물론 이번 저술이 이 모든 문제에 해답을 줄 수는 없다. 먼저 '고리타분'해 보이는, 화석화되고 의례화되어가는 불교에서 오늘날 우리가 함께 숨 쉴 수 있는 사회경제사상을 재창조해나갈 수 있다는 점, 이것만으로도 고맙다. 다음으로 동양인의 눈으로 동양의 사상을 발견하지 못하고 오리엔탈리즘에 젖어 동양 종교와 사상을 논하는 최소한의 열등감을 잠시라도 벗겨주었다. 셋째로는 깨달음에 대한 재해석이다. 깨달음이 개인적이 아니고 사회적이라면, 또한 불교가 결코 개인윤리, 종교윤리가 아니라 사회윤리와 경제윤리, 그리고 정치윤리까지 담보해낼 수 있다면 이 시대의 불교, 우리 사회의 불교는 그 좌표를 새롭게 설정하는 셈이다.

좌표의 점을 설정하고 잘못된 좌표를 옮겨야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면 먼저는 종교 지도자의 몫이겠지만, 불교를 평생의 업이자 전공으로 삼는 박경준 교수와 같은 불교학자의 무거운 짐이 아니겠는가. 박경준의 불교학이 백척간두에서 허공을 향해 한걸음 내딛었다.
덧붙이는 글 <불교사회경제사상> / 박경준 / 동국대학교출판부 / 2010-11-06 / 2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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