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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지켜 보소서, 리영희 선생님!

국제나그네의 독일아리랑- 리영희 선생님 영전에 부처

등록|2010.12.05 14:45 수정|2010.12.05 14:45
오늘도 알프스산맥을 넘어온 팬바람을 선봉장 삼아 예년보다 조금 일찍 찾아온 동장군이 맹위를 떨친 하루였다. 지난 일주일 간 어지럽혀진 집안을 대충 정리하고 도래할 일주일 분의 '일용할 양식'을 구입해서 '홀아비(?)'의 궁색함이 묻어나는 나만의 보금자리에 돌아오자마자 몇 달 사이 나의 분신 똥가리의 '내나라 내 땅'이 거의 되어가고 있는 고향 땅의 '오늘의 소식'이 궁금해서 부리나케 오마이뉴스에 접속했다.

조금 긴박함이 약해졌기는 하지만 역시 오늘도 연평도 포격전의 후유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기사들이 '탑'을 차지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이 시대 참군인의 표상으로서 당당히 '5대 장성 중의 한 축'인 예비역 병장 출신인 나그네의 가슴 한 켠에 각인되어 있는 표명렬 장군의 값진 기사가 눈에 띄었다.

그런데 모든 악의 근원인 전쟁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기사 바로 아래 전혀 다른 기사 제목에서 나그네의 시선은 한 동안 고정되어 있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어지간한 사건에는 별로 요동치는 법이 없는 나그네가 상당한 충격을 받았다는 증거임에랴.
나그네에게 충격을 준 기사 제목은 김경년 기자가 호외적 성격으로 쓴 '리영희 선생 타계'였다.

'5일 새벽 0시 30분 경 그 동안 간 경화증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해 온 이시대 참 지식인의 표상, 리영희 선생이 영면 하셨다'는 거다.

리영희 선생! 김경년 기자의 표현대로 '현대사의 증인'이요 정말 불행하게도 존경할 만한 어른이 점점 드물어가는 시대, 세인들의 신망을 받아 오다가 인생의 끄트머리에 '고무신을 꺼꾸로 신어버린' 이른바 예전의 명망가들이 횡행하는 불신과 분열의 시대에 처음과 끝이 한결 같으셨던 리영희 선생의 타계 소식은 갈 길 잃고 헤매고 있는 나그네에겐 안타까움을 넘어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 줄 나침반을 잃어버린 동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불행이기도 하다.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원자폭탄 제조의 특명을 받고 국비장학생으로 독일에 유학 왔던 핵물리학자요 리영희 선생과 동년배였던 안석교 선생(필자가 얼마 전에 기고한 '리영희 선생도 이 방에서 주무셨지요'의 주인공)이 존경해 마지 않았던 리영희 선생의 타계는 남아 있는 우리들에겐 큰 슬픔이 아닐 수 없다. 십 수년 전에 안석교 선생의 아주 작은 보금자리에 함께 누워 분단 조국의 아픔을 토로했던 두 분이 오늘 구름 위에서 다시 만나 영생지기로서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은 불행 속에 핀 다행이기는 하지만.

우리 시대의 걸출한 어른이셨던 리영희 선생은 1929년 평안북도 운산군에서 태어나 삭주 대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50년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한 후 안동중학교에서 영어선생으로 재직 중 6.25 발발로 군에 입대, 미군 통역장교로 복무했고 1957년 육군 소령으로 제대했다.

1957년 부터 1964년까지 합동통신 외신부 기자,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조선일보, 합동통신 외신부장 역임, 1972년부터 한양대학교 문리대 교수 겸 중국문제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1976년 봄 긴급조치 9호 하에서 해직, 1980년 봄 복직 되었다가 그해 여름 다시 해직, 1984년 가을 복직되어 1995년 2월 정년 퇴임, 이후 한겨레신문 창간에 중추적 역할을 했고 타계하기 직전까지 불신의 시대에 우리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불꽃처럼 아름다운 삶을 사셨다.

리영희 선생에 관해 나그네가 알고 있는 여담 한 토막을 풀어놓아 보자.

리영희 선생은 부산에 있는 특수대학인 국립해양대학을 졸업했다. 부산에 소재한 특수대학 중의 하나인 국립부산수산대학과 당시 쌍벽을 이루던 대학이다. 지금은 세월 따라 많이 변했지만 옛날 해양대학과 수산대학은 가난한 수재들이 많이 몰렸던 대학이었다. 자원 없고 돈 없는 나라에서 오대양을 누빌 마도로스의 청운의 꿈을 안은 유능한 인재들의 등용문이기도 했던 두 대학이었다.

재미 있는 것은 리영희 선생이 해양대학을 졸업한 후 한참 뒤의 일이지만, 국립수산대학에는 이른바 수구보수의 걸출한(?) 인물인 조갑제닷컴의 조갑제씨가 있었다. 조갑제씨는 이른바 45년생 해방둥이다. 그는 수산대학 졸업 후 부산 국제신보 수습기자를 거쳐 조선일보에 입사, 월간조선 대표를 거쳐 현재 조갑제닷컴의 얼굴로, 이른바 보수의 대변자로 대 활약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때 마도로스를 꿈꾸었고 국제항구도시 부산에서 학창시절을 보냈고 조선일보에 재직했던 두 사람의 인생역정은 오늘날 정 반대의 이미지로 자리매김 되고 있다. 리영희 선생은 평안도 박치기로 유명한 운산군에서 태어났고 조갑제씨는 일본 사이타만 현에서 태어났다. 두 양반, 학창시절 때 항구도시 바닷가에서 '부산갈매기'를 바라보며 항차 무엇이 되고자 꿈꾸었을까.

나그네는 지금, 머언 이녘 땅에서 리영희 선생의 타계 소식을 접하고 두 양반이 학창시절의 전공을 살려 마도로스의 길을 걸어갔다면 오늘의 리영희와 조갑제는 죽이 잘 맞는 마도로스의 선후배로서 "형님,동생"하면서 항구도시 부산 자갈치 포장마차에서 마지막까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였지 않았을까 하는 조금은 생뚱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 본다.

그러나 시대의 조류는 두 양반에게 전혀 다른 발자국을  강요했고 각자의 후진들 또한 그 길을 따라 또박도박 앞서 간 두 사람의 발자국을 좆아 걸어가고 있다.  어느 발자국이 진정 정도의 발자국인지는 후대가 평가하고 밝힐 일이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리영희 선생은 당신이 생전에 그토록 열망했던 통일 후 고향 땅을 밟고 싶다던 꿈과 열망을 보지 못하시고 떠나가셨다. 리영희 선생의 지나온 절절함을 기록한 자전적 에세이 '역정'에는 다음과 같이 선생의 못다한 꿈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통해 묘사되어 있다.

'아버지의 영혼은 지겨운 이남에서의 생을 버리고 이북의 고향, 평안북도 초산의 물 맑고 산 푸른 고향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새벽마다 북쪽을 향해 선조들에게 불효자의 죄를 사죄하신 선량한 영혼은 육신의 속박에서 벗어나 휴전선을 훨훨 넘어, 고향의 친척, 혈육의 품에 안겼을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그리고 그리던 어린 시절의 자연 속에서 거닐고 계실 것이다. 통일이 되는 날이 언제일는지...살아서 다시 찾아가 만나 뵈올 것인지, 역시 영혼으로만 가서 뵈올 것인지...조국분단이 낳은 실향민의 서러움은 그칠 날이 없다'

똥가리가 떠나갈 때 엄지엄마가 송별회를 열어준 지인에게 얻어와 우리집 아주 작은 베란다 공간에 심어 놓았던 토종 쑥갓이 가을바람 찬서리에 서서히 시들어 가더니 결국 오늘 동장군의 냉혹한 설한에 견디지 못하고 그 명을 다하고 말았다.

똥가리가 엄마와 함께 늙은 아빠를 떠나간 이후, 줄곧 나그네의 말동무가 되어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애절양으로 남아 있던 토종 쑥갓의 일대기가 오늘 영면하신 리영희 선생의 그것과 맞닿아 있다는 나만의 이심전심이 단순한 짝사랑일 것인가.

아주 작은 텃밭 배란다에서지난 여름 먹구름 속의 천둥과 함께 튼실하게 자란 토종 쑥갓. 늙은 기러기아빠의 눈요기를 위해 엄지엄마가 심었다. ⓒ 조영삼


아주 작은 텃밭 베란다에서지난 가을, 일생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는 토종 쑥갓. 황금색 꽃이 만개하고... ⓒ 조영삼


아주 작은 텃밭 베란다에서알프스 한설에 그 명을 다한 쑥갓. 그리고 오늘 새벽, 0시, 우리시대의 걸출한 어른, 리영희 선생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 조영삼


지금 이곳 게르만나라의 시각은 새벽 두시가 넘었다. 리영희 선생이 영면하고 계신 곳, 나의 분신 똥가리가 단잠을 자고 있는,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은 지금 아침의 여명이 밝아 오리라. 이제 나그네도 피곤한 눈에게 휴식을 좀 주어야겠다.

원하건대 선생이시여! 이젠 남은 짐들을 후대들에게 가벼이 넘겨 주시고 영혼이나마 그리운 고향 땅으로 훨훨 날아가 그리운 아버지를 뵙고 못다한 효도를 하소서. 그리운 님이여! 그리고 이 외로운 나그네가 더 이상 갈 길 잃고 방황치 말도록 영원한 나침반이 되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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