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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철한 이성 뒤에 숨겨진 따스함

[내가 아는 리영희] 선생의 안식을 위해 기도합니다

등록|2010.12.06 16:46 수정|2010.12.06 17:27
리영희 선생에게 '사상의 은사'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신문사의 기사에서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 신문은 우리 국내 신문이 아닙니다. 외국 신문입니다. 유럽하고도 프랑스에서 명성이 높은 <르 몽드>지가 그렇게 명명했다고 합니다. 그는 지금의 40대 후반부터 60대 중반에 이르는 사람들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뜨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이른바 '사상의 은사'인 셈입니다.

리영희 선생이 어제(12월 5일)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에 운명을 달리하셨습니다. 저는 주일 예배 설교를 마무리하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가 그분의 별세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뭐라 표현할까요? 기분이 참 묘했습니다. 허전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또 많은 영향을 받은 분이라 감사한 마음도 밀려들었습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그의 책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 등은 왜곡된 주입식 교육에 젖어 있던 젊은 청년 학도들의 의식에 코페르니쿠스적 변이를 일으키게 했습니다.

리영희,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 5일 오전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한 조문객이 리영희 선생 영전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선대식


리영희 선생이 가셨다고 합니다. 예, 그는 가셨습니다. 책을 통해 그를 알게 된 지가 30년이 지났습니다. 저는 리 선생을 생각할 때마다 엉뚱하게 알제리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의사인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을 떠올리게 됩니다. 파농은 그가 쓴 책 <대지의 저주받은 자들> 서문에서 "국가와 민족이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일신상의 안일만을 도모하는 자들과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식의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리영희 선생이 이런 분이었습니다. 그가 자신과 가정의 안일은 멀리한 채 국가와 민족의 평화와 통일에 노심초사(勞心焦思)했으니까요.

실제로 리 선생은 그렇게 사셨습니다.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는 진정 행동하는 양심으로 참 지식인의 삶을 사셨습니다. 아홉 번에 걸친 연행과 다섯 번의 구속, 그리고 언론사와 대학에서 네 번의 해직과 복직, 통틀어 1012일간의 옥고를 치른 그의 삶은 아무나 흉내낼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만큼 고귀한 삶이었다고 할 것입니다. 지식인의 약점은 말과 글에 비해 실천이 담지(擔持)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식인양 하는 사람들도 한두 번은 정의와 진리를 외칠 수 있지만 평생을 불의와 맞서 살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일제강점기의 지식인들을 떠올리면 쉽게 증명됩니다. 춘원(春園)과 육당(六堂) 그리고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의 장지연(張志淵)이 재기발랄한 청년이었을 때 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뒤에 친일로 돌아선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니 현실로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족과 국가, 그리고 이 땅의 민중들을 위해 젊음을 불살랐던 현실의 정치인들에게서도 그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리 선생과 저는 생전에 개인적 만남을 가지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 사회에 영향을 끼친 인사들과의 친분이 좁은 제가 아닌데, 이상한 일입니다. 공식적인 회의 자리에서 리 선생을 뵙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만나 정담을 나눈 적이 없습니다. 아마 리 선생이 늘 우리 곁에 든든한 버팀목으로 계신다는 시간의 흐름을 무시한 착각이 그렇게 만들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미친 그분의 영향은 적지 않았습니다. 1970년대 중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닌 저에게 큰 영향을 끼친 분 중에 리 선생이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배운 단어가 '판금 도서'라는 말입니다. 잘 알다시피 판매 금지된 도서라는 뜻입니다. 처음엔 왜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책이 판매 금지되어야 하는지 그 이유를 잘 몰랐습니다. 저는 그 당시 읽어서는 안 될 책으로 <자본론>을 비롯한 칼 마르크스의 책들과 주체상상으로 북한을 통치하고 있던 김일성의 <저작집> 등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것보다 국민의 윤리 도덕에 결정적 피해를 줄 수 있는 <포르노 사진첩> 등 외설 도서는 저 스스로도 판매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가치 척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선배가 복사에 복사를 거듭해서 면 전체가 짙은 회색빛으로 변해 글자도 잘 분간할 수 없는 책을 한 권 가방에 넣어주며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李泳禧(리영희)의 <轉換時代의 論理>(전환시대의 논리)'였습니다. 창작과비평사에서 출간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반신반의'(半信半疑)라는 말은 이 책을 읽고 난 느낌을 잘 나타내주는 단어입니다. 지금까지 배운 교과서적 지식을 헝클어 놓는, 자료에 기초한 그의 논지에 많은 당혹감이 일었습니다. 특히 미국이 우리나라를 비롯한 제3세계에 관계하는 역학 구도가 순전히 자국 이익에 기초한다는 그의 주장은 미국을 다시 보게 만들었습니다.

리 선생의 책을 소개 받고 나서 저는 변두리 책방을 순례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판금 도서를 찾아 나선 것입니다. 리 선생의 책뿐만 아니라 당시 저항 시인으로 이름 높았던 김지하의 책들, 그리고 안병무를 비롯한 민중신학자들의 책도 판금 도서 목록에 올라있었습니다. 변두리 책방은 미처 관(官)의 손이 미치지 않을 수 있는 곳이란 생각을 했고, 그것이 그런 책방을 순례하게 만든 것입니다. 한 책방에서 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발견하고 얼마나 기뻤던지요. 그런데 책방 주인도 판금 도서의 가치를 알고 있었던 듯, 정가표에 곱이 넘는 값을 매겨 놓고 있었습니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그 책을 구입하고도 며칠 밤잠을 설쳤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성과 논리를 무기 지닌 이에게서 따스한 정까지 느낄 수 있었다

▲ 간경화로 투병 중인 리영희 선생의 생전 모습(8월 27일 연희동 아들집에서). ⓒ 권우성


리 선생의 글만 읽으면 그가 냉철한 지식인이란 생각을 갖기 쉽습니다. 이성(理性)과 논리를 무기로 자기주장을 펼치는 사람에게서 따스한 정까지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던 적이 많이 있습니다. 글로 리 선생을 만난 제가 리 선생을 생각하는 관념도 이와 비슷했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 선입관이 깨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아마 1990년도 중반쯤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는 한 여인과 가까이 지내고 있었습니다. 다른 것 다 떠나 그 여성은 혼자 살아가는 분이었습니다. 환갑이 넘은 나이지만 창살 밖 세상 삶보다는 감옥에서 더 오랜 시간을 보낸 분이었습니다. 저는 그분이 정을 그리워하고 사람을 좋아하기 때문에 만나서 친분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떠나 정말 인간적으로 만난 사람입니다. 북한에서는 그를 '지리산 여장군'으로 부르며 칭송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저는 그분 자체가 좋아서 가깝게 지내게 된 것입니다.

다리 대퇴부에 총상을 입고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고 잡히고 만 한 여인, 이데올로기가 뭔지 사상이 뭔지도 모르고 남편을 만나러 갔다가 빨치산으로 몰린 한 여인의 파란만장한 삶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총상 당한 뒤 한 쪽 다리를 절단한 아픔을 갖고 오랜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 '지리산 여장군'은 출옥하고도 세상이 낯설기는 감옥 안보다 더했습니다. 그는 가방 공장 등에서 단순 노동에 종사하며 생활하려고 애썼습니다만 어렵기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분이 바로 정순덕 선생입니다.

나중에 서울의 한 집을 빌려 사상적으로 지조를 지킨 장기수 출신 몇 분이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가 조직되었습니다. 한 쪽 다리를 잃었지만 유일한 여성으로 공동체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을 정 선생은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주 그 집을 방문해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어느 날이었습니다. 무슨 행사가 있었던지 정 선생을 비롯한 식구 모두 출타 중이었습니다. 저보다 먼저 다녀간 듯 흰 봉투에 메모가 남겨져 있었고, 봉투 안에 일만 원 권 다섯 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정순덕 선생님, 저 李泳禧(리영희)입니다. 어렵게 살아가신다는 말을 듣고 일찍 찾아뵈려 했으나 차일피일 늦었습니다. 또 마침 계시지 않는군요. 이후 약속 때문에 머물지 못하고 갑니다. 건강 잘 챙기십시오. 조만간 또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한양대 리영희 교수."

우리는 지식인을 관념성이 강한 사람으로 쉬 분류합니다. 한완상은 일찍이 그런 지식인의 속성을 <지식인과 허위의식>이라는 책에서 잘 정리해 주었습니다. 저는 리 선생도 그런 범주에 묶어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에게서 이런 따뜻함을 발견하다니요. 그에게 뇌졸중이 오기 전이었다고 해도, 70 노인이 대중교통을 갈아타고 멀리까지 직접 오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어려운 입장에 처한 사람과 함께 하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이 없다면 결코 결행할 수 없는 방문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언(言)·행(行)·사(思)가 일치하는 삶, 존경합니다

그 후 다시 리 선생의 책들을 읽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그의 말과 글이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설파한 이면에 서려 있는 인간적 따스함을 새롭게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언(言)과 행(行)과 사(思)가 일치하는 삶은 많은 사람들이 희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하지만 제가 아는 리영희 선생은 이 세 가지를 모두 소유한 삶을 산 분입니다. 평생 지조를 잃지 않고 진리를 찾아 일관된 길을 걸어온 리 선생의 삶이었습니다. 이런 삶을 저는 존경합니다.

진보적 지성인으로 넓은 세계를 사유하며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친 리 선생은 훌쩍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파시즘적 민간 독재가 발호하려고 하는 이즈음, 리 선생의 별세는 진보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분은 가셨을지라도 그가 남긴 글을 통해 그의 사상과 철학을 이 땅에 접합시켜 나가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역사는 전진과 후퇴를 거듭한다고 하지만 점진적 발전의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결국 진보하게 되어 있습니다.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이때에 선생이 일찍이 갈파하신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정언(定言)이 힘을 얻는 사회를 소망합니다.

참된 시대의 스승 리영희 선생의 안식을 기원하면서 김천에서 이명재 목사가 삼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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