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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 다가왔다'...살인범이 남긴 것은 협박문서뿐

[서평] '문서감정' 다룬 제프리 디버의 <악마의 눈물>

등록|2010.12.08 10:11 수정|2010.12.08 11:33

<악마의 눈물>겉표지 ⓒ 랜덤하우스



정부나 공공기관을 상대로 협박을 해서 돈을 뜯어낸다는 것은 어찌보면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백화점에 폭발물을 설치해두었다"라는 식의 협박전화 때문에 경찰이 출동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협박이 통하지 않는 이유는 우선 이런 협박전화 자체가 '뻥'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진지하게 이런 범죄를 구상하더라도 마찬가지다. 민간인이 대형 백화점이나 기차역을 날려버릴 정도의 폭발물을 만든다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다.

설사 만든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눈에 띄지 않게 운반해서 적절한 장소에 설치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백보 양보해서 폭파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정부는 이런 협박범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다. '테러범과는 절대로 협상하지 않는다'라는 원칙을 가지고 있을 테니까.

아니면 협상에 응하는 척하면서 범인을 검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동유괴를 통해서 돈을 받아내는 것이 어려운 것처럼 이런 식의 협박도 성공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시민들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협박

제프리 디버의 <악마의 눈물>에서 범인은 워싱턴 시장에게 독특한 방식으로 협박을 가한다. 연말 분위기로 들뜬 섣달그믐날 오전 9시, 총잡이 '디거(Digger)'가 사람들로 붐비는 지하철역에 나타난다. 그리고 소음기가 달린 우지 기관총을 난사한다. 불과 몇 초만에 1백 발의 총알이 발사되고 결과는 끔찍하다.

23명이 그 자리에서 죽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당한다. 사망자 중에는 열 살 미만의 어린 아이도 있다. 총기 난사사건이 터지고 잠시 후에 워싱턴 시청으로 한 장의 협박 편지가 전해진다.

'종말이 다가왔다'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그 편지에서 협박범은 워싱턴 시장에게 현금으로 2천 만 달러를 준비하라고 요구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자신의 공범 디거가 오후 4시, 8시, 12시에 연달아서 불특정한 장소에서 사람들을 죽일 것이라고 한다. 디거를 멈출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뿐이라고 강조한다. 자기가 체포되거나 죽더라도 디거의 살인을 막을 수는 없다고 한다. 대량살인을 막으려면 돈을 준비하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연방수사국이 이 사건을 담당하지만, 수사팀이 가지고 있는 유일한 단서는 시청으로 보내진 협박장 뿐이다. 그래서 수사팀은 의문문서 감정가 파커 킨케이드를 찾아간다. 파커는 전직 FBI 문서과장이었던 인물로 미국 최고의 필적, 문서감정가다. 그는 문서와 필적을 통해서 문서작성자의 성별, 성격은 물론이고 문서가 쓰인 장소, 종이와 펜의 구입처, 나아가서는 작성자의 은신처까지 밝혀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이야 이메일과 휴대폰 문자메시지가 많이 사용되지만, 작품이 발표된 1999년만 하더라도 직접 손으로 쓴 편지가 비교적 많았을 것이다. 파커는 협박장을 확대경으로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범인이 사용하는 특정 단어와 문법, 철자법, 필체를 분석한다. 사용된 용지와 잉크의 일부를 가스 크로마토그래프·질량분석기에 집어넣고 그 결과를 기다린다. 그 안에서 어떤 미량증거물이 검출될지 모르는 것이다.

이런 분석을 통해서 파커는 범인이 어떤 인물인지 대략 파악해낸다. 수사팀은 범인이 지능지수 100 정도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외국인이라고 생각한다. 파커의 의견은 그것을 뒤집는 것이다.

범인은 최소 160의 지능지수를 가지고 있고 정규교육과정을 이수한 대단히 영리한 인물이라는 것. 이렇게 독특한 협박방법을 구상하고 실행에 옮길 정도면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협박문서만 가지고 어떻게 범인을 추적할까?

협박범과 문서감정가와의 대결

<악마의 눈물>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한다. 하긴 정신나간 총잡이가 공공장소에서 우지 기관총을 난사하니 당연할 것이다. 범인이 전화로 협박을 했다면 상대적으로 추적이 덜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범인은 협박장 한 장 만으로 자신의 모든 흔적을 없애고 더이상의 대화를 차단시킨 것이다.

수사관들은 시간에 쫓기기 때문에 더욱 어려움을 겪는다. 범인이 정해놓은 특정 시간까지 디거가 어디에 나타날지 알아내야 한다. 디거의 인상착의도 모르기 때문에 장소를 파악하더라도 그를 검거하기가 어려워진다. 디거가 총을 쏠 때까지 기다리며 수색을 하는 수밖에는 없다.

파커는 이 모든 것들을 알아내기 위해서 문서를 읽고 또 읽는다. '나에게 말해봐'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파커는 '문서의 내용 그 자체가 글쓴이에 대한 사실을 드러내준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마음과 손이 심리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믿는다. 개성은 글을 쓰는 방식으로도 드러날 수 있다.

파커는 문서를 통해서 범인에게 다가가려 한다. 법의관들이 시체를 해부해서 수많은 사실들을 알아내듯이, 문서감정가는 문서를 들여다보면서 범죄자의 세부사항을 읽어낸다. 독특한 방식의 협박도 협박이지만, 그에 맞서는 문서감정가의 추리방식이 더욱 흥미진진하다. 파커의 믿음처럼, 글쓴이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글은 그 사람에 대한 많은 것을 보여준다.
덧붙이는 글 <악마의 눈물> 제프리 디버 지음 / 안재권 옮김 / 랜덤하우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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