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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에 '에로스'를 그리다

[리뷰] 이은실 작가의 '애매한 젊음'전... 사르비아다방에서 12월 10일까지

등록|2010.12.09 12:25 수정|2010.12.09 13:41

▲ 사르비아다방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입구(오른쪽). '새로운 출현(Emerging)' 장지에 수묵채색 122×210cm 2010. 이 작품은 산수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산수화는 그림을 그리지 않는 그림인데 그렇다고 그림을 전혀 안 그리는 것은 아니다 ⓒ 김형순


이은실(1983~)작가의 '애매한 젊음(Peripheral Youth)'전이 서울 인사동 사르비아다방에서 12월 10일까지 열린다. 이 작가는 산수화에 수묵채색으로 애욕이 넘치는 무릉도원을 주로 그려왔다. 이번 전의 제목이 암시하듯 사회규범으로 은밀하고 애매모호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는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자 진술의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산수화는 음양의 조화를 그리는 것

산수화는 원래 도(道)를 그리는 것이다. 도는 또한 무(無)이기에 아무것도 안 그린 것이다. 다시 말해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 그리기를 포기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말 아무것도 안 그리는 것은 아니고 자연은 그리되 사람 등은 꼭 그리지 않는 것이다. 다만 사람을 자연이나 동물을 통해 보이지 않게 그린다.

▲ 작가가 작품 앞에서 인터뷰하는 영상자료(2008년 과천국립현대미술관). 배경작품 이은실의 '찔리다(Stuck)' 장지에 수묵채색 180×245cm 2008 ⓒ 김형순

[출생] 1983년 인천 출생

[학력] 2001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입학 2006년 동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졸업 2007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대학원 입학 2010년 동 대학원 졸업

[전시] 2010년 '애매한 젊음'전(사르비아다방)
2009년 '중성적 공간'(대안공간 풀) '이중판타지'(마루가메 현대미술박물관 일본) 오픈스튜디오전(쌈지스페이스 서울) '온고지신'(가나아트센터 서울) '애드레스(Address) 스페이스'(디 갤러리 청담동 서울)
2008년 젊은 모색 '난 예술가'(국립현대미술관 과천) 두렵지 않다, 그러나 말하자면 두렵다展 (175 갤러리 서울) 경기미술프로젝트 '언니가 돌아 왔다'(경기도 미술관 안산) '더 브릿지'(가나아트센터 서울) '삶의 지침서'展 (175 갤러리 서울). 2007년 중앙미술대전 (예술의 전당 서울)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175 갤러리 서울) 2006년: '열'展 (인사미술공간 서울) 신진작가의 수첩워크숍(인사미술공간 서울)

[수상] 2008년 한국 문예진흥기금 공모사업 뉴스타트 지원 선정(한국 문예진흥원) 2008년 쌈지스페이스 스튜디오프로그램 선정 (쌈지스페이스) 2007년 중앙미술대전 선정 작가(중앙일보) 2006년 의재 허백련 수묵대우수상(광주 MBC 의재미술관)


산수화는 또한 음양의 조화를 바탕으로 한다. 음양이란 인간과 자연과 우주 등 삼라만상을 뜻한다. 그 중에 인간의 음양은 바로 남녀이다. 이 작가는 산수화에 남녀를 그린다. 아니다 남녀를 그린다기보다는 아래 작품에서 보듯 남녀의 성기를 그린다. 좀 민망해지면 사람을 짐승으로 대체해 그리기도 한다.

이런 화풍은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는 그릴 수 없었다. 그래서 옛 선인들은 남근은 바위와 나무로, 여곡은 폭포와 골짜기로 은유적으로 빗대어 그린다. 그런데 이은실 작가는 이마저 거부한다. 어쨌든 이런 도전정신으로 산수화의 현대화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그의 산수화는 그 어떤 시선에도 지배를 받지 않고 시대와 시간을 초월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도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인 성행위와 배설행위가 일어나고 있다. 작가도 이를 보고 "정말! 다들 화끈하게 논다!"고 말한다.

현대사상의 주류는 왜 '몸 철학'인가?

▲ '새로운 출현(Emerging)' 장지에 수묵채색 122×210cm 2010. 여기서 산수화의 전혀을 보여준다. 회화적 기법은 탁월하고 채색은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부끄러움(Shy#2)' 장지에 수묵채색 131×24cm 2010(오른쪽). '부끄러움'은 앞에 보이는 구석방 오른편에 있다. 남성성기가 보인다 ⓒ 김형순


그럼 이런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이 뭐며 왜 요즘 '몸 철학'이 대두하는지 잠시 살펴보자.

선사시대에는 몸이 최고 가치였다. 그러나 역사시대로 들어서면 정신의 시대가 된다. 우리도 조선시대에 주자학이 주류가 되면서 정신주의가 최고조에 달한다. 그런 와중에도 언행일치를 중시하는 양명학에서는 '수신'보다 '애신(愛身)'을 강조하며 인간욕망을 인정한다.

유럽에서도 정신철학이 주류였으나 2차 세계대전 후에는 바뀐다. 왜냐하면 합리주의에 근거한다는 정신주의가 결국 파시즘과 나치즘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히틀러의 정신근본주의는 전 유럽을 초토화시켰고 유대인대학살이라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그 때문인가 전후실존주의시대에도 프랑스철학자 메를로-퐁티는 "나는 나의 몸이다. 나는 감각덩어리다"라며 몸 철학을 들고 나왔다. 서구의 다다나 초현실주의, 전위예술, 행위예술 그리고 플럭서스(우상파괴예술단체)도 결국은 다 정신주의를 해체시키는 운동이었다. 이은실도 이렇게 정신에게 주인자리를 빼앗긴 몸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다.

남녀합궁은 우주생성의 원리

▲ '깨지기 쉬운 신뢰(Delicate confidence)' 장지에 수묵채색 169×224cm 2010 ⓒ 김형순


남녀합궁은 음양조화의 극치이자 우주생성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작가가 이에 근거한 산수화를 그리는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럽다. 사실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기계도 이 원리가 적용된다. 요철을 맞춰야 작동하고 피스톤 운동을 해야 에너지가 생긴다. 세상에 이런 조화가 없다. 그런 아름다움을 그리지 않는다면 그것이 직무유기다. 동양화라고 예외일 수 있나

그는 서울대 동양화과에서 공부했는데 그곳 분위기가 다소 근엄하고 보수적이라고 들었다. 위 작품처럼 털 있는 남녀의 성기를 합친 것 같은 그림을 학과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궁금하다. 어쨌든 오래간만에 서울대 동양화과에 의외의 재사가 나온 셈이다.

에로스가 없으면 만물의 기운생동도 없다

▲ '무기력증(Inertia)' 장지에 수묵채색 141×189cm 2010 ⓒ 김형순


산수화는 또한 우주만물의 기운생동을 그린다. 그런데 이런 기운생동에 에로스가 없다면 온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프랑스 문필가 G. 바티이유도 에로티시즘을 "죽음 속에서도 삶을 찬양하는 것이다" 하지 않았나. 다 우주적 기를 살리는 것이다.

이렇게 에로스는 이렇게 삼라만상의 에너지원으로 고갈된 삶에서 에너지를 얻으려 할 때 상실된 자아를 찾으려면 이 에너지가 필요하다. 그림도 역시 마찬가지리라. 그런데 위 작품 <무기력증(inertia)>을 보니 피를 흘리는 거대한 남근이 축 쳐져 무기력해 보인다.

요즘 왕성한 국민의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를 풍자한 것인가. 건어물녀, 초식남이라는 신어가 생길 정도로 연애부재의 시대가 온 걸 보면 정말 그런 것 같다.

▲ '아래쪽(Underneath)' 장지에 수묵채색 149×249cm 2010.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그 방향성을 상실한 '애매한 젊음'의 표상하는 것 같다 ⓒ 김형순


여기 작품 아래쪽과 역시 비슷한 분위기다. 이 작품은 2005년 작인 <망(望)>에 등장하는 우람한 여성의 성기를 지닌 사슴과 거대한 남자의 성기를 지닌 사자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여기 호랑이는 뭔가. 정말 호랑이인가 아니면 남성의 성기와 여성의 성기가 짜깁기인가.

작가가 이런 애욕의 풍경을 통해 성적 쾌락을 반복해 그리는 것은 왜 일까. 성욕 너머의 남녀 간의 참된 성 역할에 대해 논하자는 것인가, 아니면 우리 시대에 절실하게 필요한 성 담론의 장을 펼치자는 것인가.

음양이 서로 물고 물리는 피학과 가학의 세계

▲ '구멍 속으로(Into the hole)' 장지에 수묵채색 194×130cm 2008(부분화) ⓒ 이은실


<구멍 속으로>를 보면 물기와 습한 공기가 뒤범벅이어서 몽롱하고 멜랑콜리한 분위기다. 알몸인 사람이 창호지 문살 뒤로, 호랑이가 굴뚝 담 사이로 서로 물고 물리는 모습을 보인다. 징그러운 내장, 털 페티시 등 일종의 피학과 가학의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데 이런 상황을 어떻게 봐야 하나.

어쨌든 그 분위기가 음습하고 성적 광기를 유발시킨다. 하긴 사람도 자연의 일부이고 성욕을 가진 동물이기에 이런 리비도와 오르가슴의 욕망을 탐내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또한 그것을 그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작가는 그런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

성의 차별이 없는 성적 환상의 이상향

▲ '분리(벗기기 Take off)' 장지에 수묵채색 160×190cm 2008. 습기, 바람, 전통가옥 등이 장막으로 은닉된 모호한 형태로 취하고 있다 ⓒ 이은실


<분리>는 제목에서 보듯 육체의 껍데기를 벗긴 그림인데 꼬집어 설명하긴 어렵다.

이 작품에 대해 미술평론가 임근준은 "[...] 공중으로 흩어지는 사랑채를 배경으로 남성육체를 이탈하는 어떤 음습한 존재를 제시한다. 바로 그 앞에 높인 서안(書案) 밑을 보면, 여성육체의 껍데기가 차곡차곡 개켜져 있다. 오늘 이은실의 무릉도원에서, 성적 욕망은 성별화의 범주를 탈피해 공간 그 자체로 진화하는 중이다"라고 해설을 붙였다.

위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지만 성적 환상이 넘치는 이런 성적 환상의 이상향에서는 남녀의 성별화가 없음을 지적한다. 작가는 혹시 그런 남녀성별의 차라는 차원을 넘어 남녀의 성차별도 없는 세상에 대한 염원이 또한 담긴 것이 아닌가 싶다.

에로스가 넘치는 산수화로 무릉도원 염원

▲ '형식적인 집(Formal House)' 장지에 수묵채색 179×244cm 2010 작품의 분위기가 초현실적 시간성이 더해진다 ⓒ 김형순


하여간 신작인 <형식적인 집>을 끝으로 보자. 이런 전통건축양식은 이전에도 선을 보였는데 여성을 차별하는 사회적 장치나 관습으로 추론된다. 그런 장막이나 칸막이를 걷어내야 태곳적 에로스의 위력을 살아난다고 해석해도 좋으리라. 하여간 여기 그림은 통해 관객들은 우리 사회를 다양하게 조망할 수 있다.

결론으로 작가는 에로스가 넘치는 산수화를 통해 자연과 인간과 우주와 하나 되는 몰아지경 속에서 무릉도원을 경험하고 동시에 물아일체라는 동양의 최고미를 맛보려 한 것이 아닌가싶다. 이런 새로운 문명시대를 열고 싶다는 포부를 산수화에 담았다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사르비아다방 www.sarubia.org 이번 전시가 끝나면 사르비아다방은 경복궁 왼쪽 창성동으로 이사한다. 홈페이지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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