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ι’(이오타) 하나로 갈린 기독교의 관대성?
[서평] 김소일의 <사막으로 간 대주교>
▲ 책겉그림〈사막으로 간 대주교〉 ⓒ 서해문집
사실 그런 일들은 최근에서야 대두된 게 아니다. 그것은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이 일어난 때에 촉발된 것도 아니고, 1970-80년대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외치던 전도현상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기독교 내부의 정통과 이단의 다툼, 그리고 기독교 외부와의 정치적 줄다리기는 이미 4세기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촉발되었다.
정통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또 성자로 믿고 있다. 예수는 인간이자 동시에 신이라는 뜻이다. 예수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아들이자, 동시에 죽음으로부터 부활한 신이었다는 이야기다. 일반 사람들은 논리적인 타당성을 입증하라고 하겠지만, 기독교 내부에서는 오직 믿음의 사건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지만 기독교 내부라고 해서 다 통일된 것은 아니다. 유대교에서 태동된 기독교는 헬라세계의 철학과 종교를 수용해야 했다. 당연히 열띤 논쟁을 거처야 했고, 그 중심에는 예수의 신성논쟁이 주를 이뤘다. 이른바 성부와 성자의 동일 본질파와 유사파가의 견해가 그것이었다. 예수가 본질면에서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호모우시오스'(homoousios), 유사하다는 '호모이우시오스'(homoiousios)의 차이다. 그건 알파벳 'ι'(이오타) 하나로 갈린 문제였다.
거기에는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도 한 몫 했다. 그는 어머니와 꿈속의 계시를 통해 기독교를 관대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걸 정치에 이용하려는 이유도 있었다. 기독교가 내세우는 오직 한 분 하나님과 하나의 제국, 그리고 한 명의 황제를 지지하는 이념으로 삼는 게 그것이다. 그것이 니케아 공의회 때 예수의 동일본질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몰아세운 이유였다.
그런 일들의 중심에는 아타나시우스가 서 있다. 그는 30살의 대주교가 되기 전까지 니케아 공의회의 모든 논리를 뒷받침하는 글을 썼다. 하지만 정통교리의 수호자 노릇만 한 채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는 엉망이었다. 그의 독선과 오만이 결국 아리우스를 복직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황제들의 물갈이 속에서 잦은 해임과 파면과 유배를 겪은 이유이기도 했다.
"아타나시우스도 6년에 걸친 도피와 은거를 끝내고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왔다. 362년 2월 21일이다. 그 동안 교회의 신앙고백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아리우스 신학은 콘스탄티우스의 지원 아래 여러 차례 교회회의를 통해 주류 신학의 위치를 굳혔다. 니케아 신경은 사실상 페기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196쪽)
이것은 적어도 366년에 아타나시우스가 주교직을 되찾기 전까지의 상황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모든 교회는 아리우스 신학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대주교로 복직된 그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하나의 본질이요, 서로 다른 세 위격을 지닌다는 결론을 도출해 낸다. 이어 신약성경 27권도 정경으로 굳힌다. 물론 그것들을 최종적으로 정리한 게 오늘날 기독교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이다. 바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채택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오늘날의 관점에서 4세기의 알렉산드리아를 보면 두 가지를 떠올릴 수 있다. 하나는 기독교 내부에서 오는 이단과 정통의 대립이요, 다른 하나는 교회 외부에서 밀려오는 정치 결탁이다.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아타나시우는 정통교리를 지켜낸 장본인이다. 하지만 그것이 기독교의 획일주의와 배타성을 불러 온 주요 요인이기도 하다. 물론 황제의 권력에 휘둘리지 않는 것은 추앙할 만한 일이다. 그가 만일 사막으로 유배되어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아리우스 신학이 대세를 이뤘다면 어땠을까? 오늘날의 기독교는 훨씬 관대하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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