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이 포 드림⑤] 한여름밤의 크리스마스
꿈을 좇는 서른셋 노처녀의 '좌충우돌' 여행기
▲ 12주간 머물 바클로드의 어학원 ⓒ 이명주
12월19일
어학원에서의 첫날, 내일 있을 레벨테스트와 인터뷰 준비를 했다. 어차피 십여 년 담쌓은 외국어요, 하루 벼락치기로 결과가 크게 달라질 리 없다. 시험은 그 순간의 자기점검이요, 중요한 건 시험이 끝난 후다. 이 자명하고 유쾌한 사실을 '강제교육' 과정이 끝난 후에야 알았다.
만학의 또다른 큰 장점은 공부의 목적이 명확하니 잡념이 적고 재미가 있다는 것. 십대 때는 "Let's study hard" 라고 했지만 'what'의 고민이 적었고, "Do your best"라고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why'를 설명해주는 스승이 없었다.
오랜만에 자그마한 나무 책상도 생기고 너른 도서관에 앉아 영단어를 익히고 있으니 회춘한 것도 같고 특별한 휴가를 즐기는 듯도 하다. 몇 번을 읽고 써도 안 외워지던 어휘가 현지인과 딱 한 번 '쌀라쌀라' 하면 뇌 속에 각인된다. 현장학습의 이점이다.
학원 안에서 방목하는 새끼 고양이 두 마리를 만났다. 기분이 맑아진다. 고추 수술을 한 내집 고양이는 사흘 후면 실밥을 뽑는다. 즐기되 책임질 줄 아는 성숙한 수컷냥이 됐다 생각하니 뿌듯하다. 결혼해서 애까지 낳은 성인이면서 이걸 제대로 못하는 인간들이 많다.
▲ 어학원 내에 사는 고양이댁 두 꼬마 ⓒ 이명주
12월21일
본격적인 연수과정에 돌입했다. 수업은 크게 현지 튜터(tutor)와의 1:1 그리고 1:4 그룹학습으로 나뉜다. 오전 9시에 시작해 하루 총 6교시로 진행된다. 생각처럼 말이 되지 않아 답답했지만 즐거웠다. 수업 외 시간엔 단어 암기와 영화, 뉴스 등 흥미로운 매체를 접할 생각이다. 조금 전 익힌 언어를 금세 써먹을 일이 생기면 신이 난다.
돌아오니 기숙사 방 안이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현지 직원들이 방 청소는 물론 빨래까지 해준다. 때 되면 밥을 주고 튜터들은 성실하고 호의적이며, 공부 외에 수고로울 일이 없다. 그런데도 불평을 입에 물고 다니는 애들이 있다. 스무살 갓 넘은 학생들이다. 대부분 부모의 지원을 받고 있을텐데 씀씀이도 상당하다.
이제 와 생각이지만 고등교육 이후 장래는 최소 1년쯤 사회생활을 거친 뒤 결정하는 것이 어떨까 싶다. 세상에 몸을 담근 바 없는데 책상에 앉아 참세상을 보기 어렵고, '공부'란 행위 자체가 얼마만큼 특권인 지 알 리 없다. 나 역시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홀로 매일매일 산을 옮긴다 생각했다.
▲ 기숙사 방 안에 내 것이라고 놔둔 아담한 나무 책상이 정겹다. ⓒ 이명주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누구 못지 않게 뻐적지근한 이십대를 보낸 사람으로서. 서른이 넘은 지금도 계절마다 달리 부는 바람 한 점에 가슴이 요동친다. 하지만 방탕한 삶은 언제고 그 주인에 책임을 묻는다. 대부분 까맣게 잊고 살 때쯤 '인생이 장난이냐?' 하는 식으로 발목을 잡는다.
사나운 한 시절을 보내고, 스스로 번 돈으로 새로이 꿈을 좇으니 이제야 무엇이 '진짜'인 지 보이는 듯도 하다. 어제오늘 여러번 '나이들어 좋은 것도 많다' 생각했다.
12월25일
최근 몇 년 새 이렇게 아파본 적이 있나 싶다. 두통과 오한을 잊으려 침대 위에서 글을 쓴다. 필리핀의 크리스마스는 한국의 새해맞이와 비슷했다. 자정을 앞둔 성탄절 전야, 여기저기서 "10, 9, 8, 7…1" 카운트다운 함성이 울렸다. 대부분 가게는 밤 10시 전 영업을 마쳤다. 특히 솔로, 커플 할 것 없이 성탄절은 당연히 가족과 함께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오줌빨이 얼 만큼 추운 가운데 화이트크리스마스를 맞은 한국과 반대로 현지엔 기습성 폭우가 더위를 식혔다. 덕분에 어학원 동기들과 치킨과 맥주를 찾아 나섰다 비를 흠뻑 맞았다. 어렵사리 시내에서 문을 연 가게를 찾았지만 그마나도 정해진 시각보다 빨리 마친다 해서 시킨 음식들을 빛의 속도로 섭취했다.
그리고 기숙사로 돌아오던 길, 규정상 음주 반입이 불가하지만 순전히 어린 배치메이트들에게 '추억'을 선사하기 위해 맥주 대병 하나를 숨겨 들어왔다. 경호원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결국 무사통과했다. 하지만 이성간 합숙금지 규정은 존중해 여자들끼리만 농밀한 시간을 가졌다.
이국에서 한여름밤의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조촐하게 끝났다. 하지만 혼자만의 사나운 밤이 기다렸다. 샤워할 때부터 살갗이 따끔따끔 아프고 열이 솟더니 급기야 참기 어려운 두통과 오한으로 발전했다. 술 먹은 속에 약을 먹을 순 없어 새벽까지 이를 악물었다.
▲ '한여름에 찾아온 산타클로스' 미국인 튜터 존. ⓒ 이명주
졸다 앓다를 수십 번 반복, 먼동이 트는 아침 약을 먹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별 차도가 없다. 땀에 젖어 눅진한 이불 속에서 여전히 땀을 흘리며 TV 속 크리스마스 트리를 장식 중인 파란 눈의 가족을 보고 있다. 꽤나 가련하다 여길 수 있는 상황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도 않다. 전날엔 '산타클로스'도 만났다. 미국인 튜터 존의 사랑스런 변신이었다.
눈물이 날 만큼 서러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머니가 주시던 따끈한 매실차가 그립긴 하다. 한 주째 각종 감기약을 섞어 먹었는데 괜찮은 건지도 궁금하다. 어학원은 내일 모레(27일)까지 나흘간 휴무다. 연휴가 긴 것도 한국 설 명절과 흡사하다.
문득, 고작 감기에도 이리 아프다 투정인데 옛날 독립운동하던 우리 조상들은 그 혹독한 고문을 어떻게 견뎠을까 싶다. 그리고 오늘 소설과 이외수씨와 개그우먼 김미화씨 트위터에서 현재 필리핀 마닐라 감옥소에 억울하게 갇혀 있다는 한국인 소식을 접했다.
마닐라와는 지척이지만 당장 나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다음 아고라 서명에 동참하고 나를 팔로우한 국회 대변인 트위터, 그리고 청와대 자유게시판에 관련 글을 올렸다. 조속한 진위 파악과 응당한 조치를 취해주길 간절히 바란다.
(* 관련글 http://agora.media.daum.net/petition/view.html?id=101780 )
덧붙이는 글
twitter ID : sindart77 홀로 꿈을 좇는 여정에 매력적인 벗과 멘토의 응원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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