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신라 결혼예물은 단 두가지, 더하면 수치
[사극으로 역사읽기] KBS1 드라마 <근초고왕>, 열한 번째 이야기
▲ 드라마 <근초고왕>의 부여화(김지수 분). ⓒ KBS
11월 28일 방영된 제8부에서, 마치 로미오와의 사랑에 실패한 줄리엣이 아버지의 명령으로 패리스 백작과 결혼한 것처럼, 사랑에 실패한 부여화는 아버지 부여준의 명령에 따라 고국원왕과 혼례를 올려 고구려 제2왕후가 되었다. 이 혼례는 한편으로는 부여준의 명령에 따른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고국원왕의 은근한 강요에 따른 것이었다.
두 사람의 혼인은 물론 픽션이다. 당시의 고구려는 중국과 백제 사이에 끼여 제대로 숨도 쉬지 못하는 '샌드위치' 신세였다. 심지어는 중국왕조인 전연(前燕)의 침공을 받아 왕궁이 불타버리고 수도가 황폐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왕의 어머니마저 전연에 끌려갔을 정도다. 그래서 실제의 고국원왕은 드라마에서처럼 백제측에게 왕족 여인을 요구하고 더 나아가 백제 왕족을 퍼스트레이디도 아닌 '세컨드레이디'(제2왕후)로 맞아들일 만한 입장이 아니었다.
드라마 내용과 역사적 사실의 일치 여부를 떠나서, 사극에 나오는 혼인 장면들을 보면서 항상 아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당시의 혼인 풍속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극소수 지배층의 혼인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사극 속의 혼인 장면은 팥소(앙꼬) 없는 찐빵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대한민국 일반인들의 혼인풍속을 모르고서는 대한민국의 혼인풍속을 이해할 수 없듯이, 고구려·백제·신라·가야 일반인들의 혼인풍속을 모르고서는 당시의 혼인풍속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남녀가 좋아하면 그냥 혼인시켰던 고구려
▲ <한국생활사박물관>. 북한 남포시 덕흥리 무덤의 벽화에 그려진 견우(왼쪽)와 직녀의 모습. ⓒ 사계절
그럼, 고대 한국인들의 혼인풍속은 오늘날과 어떻게 달랐을까? 혼례 때 사용하는 의복, 혼례를 거행하는 장소가 크게 달랐다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조차 없다. 그런 외형적인 차이 말고, 혼인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보여줄 만한 것이 있다. 결혼예물(예단)에 대한 관념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고대 한국인들의 결혼예물에 대한 기록이 중국측 역사서에 비교적 자세히 남아 있다. 한국측 역사서보다 중국측 역사서에 자세한 내용이 기록된 것은, 고대 한국인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결혼문화가 중국인들에게는 상당히 강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고구려 때문에 멸망한 왕조인 수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수서> '동이열전' 고구려 편에서는 고구려인들의 결혼예물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다.
"시집가고 장가들 때에, 남녀가 서로 좋아하면 그것으로써 혼인을 성사시킨다(有婚嫁者, 取男女相悅, 然卽爲之). 남자 집에서 돼지고기와 술을 보낼 뿐, (여타의) 재물을 들고 찾아가는 의례는 없다. 만약 (다른) 재물을 받을 경우에는, 사람들이 모두 수치스러운 일로 여긴다."
이 기록을 보면, 고구려인들의 예단이 '고작' 돼지고기와 술에 불과했음을 알 수 있다. 요즘 말로 하면,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진하게' 대접하는 것으로써 예단을 대신한 것이다. 물론 왕족이나 고위 귀족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겠지만, 일반적인 사회분위기가 그러했기에 중국 역사서에까지 소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남녀상열(男女相悅) 즉 '남녀가 서로 좋아하는 것'을 최고의 결혼예물로 여겼던 것이다.
돼지고기와 술 이외의 예물을 추가적으로 받는 것을 수치스러운 일로 여겼다는 점을 볼 때, 과도한 예물 수수로 인해 사회적 지탄을 받는 고구려인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검소한 결혼문화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현대 대한민국에서처럼 과도한 혼수가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화될 염려는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예물이 과도하여 그것이 도리어 '애물'로 변할 염려가 없었던 것이다.
한 차례 연회로 결혼예물을 대신한 신라
▲ <히스토리카 한국사>. 경상북도 경주시 황성동에서 출토된 신라 여인상. ⓒ 이끌리오
"혼인의 의식이라고는 단지 음주와 식사가 있을 뿐이다. (비용의) 경중은 빈부 수준에 맞춘다."
이에 따르면, 신라인들은 연회를 베푸는 것으로써 결혼예물을 대신했다. 물론 생활수준에 따라 연회의 규모가 다를 수는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한국인들처럼 이것저것 과도한 예물을 요구하거나 기대하지는 않았다. 신라인들도 고구려인들과 마찬가지로 '진하게' 한 잔 하는 수준에서 만족했던 것이다.
한편, 백제나 가야의 혼인예물에 대한 기록은 찾기가 쉽지 않다. <수서>에서는 고구려·신라의 풍속만 소개했을 뿐이다. 수나라가 있었을 당시에, 가야는 없었고 고구려·백제·신라만 있었다. 백제는 고구려와 달리 비옥한 농토를 갖고 있었고 또 신라와 달리 대중국·대일 무역의 기회가 훨씬 더 많았기 때문에, 고구려·신라보다 생활수준이 높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인들은 '삼겹살에 소주 한잔' 하는 수준 혹은 한 차례 연회를 여는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 역시 검소한 결혼예물에 만족했으리라고 추정해도 별다른 무리가 없다.
만약 백제인들이 고구려·신라와 크게 대조되는 과도한 예물문화를 갖고 있었다면, <수서> 편찬자들이 고구려·신라의 예물문화를 소개하면서 그와 대비되는 백제의 예물문화를 소개하지 않았을 리 없다. 한민족의 예물문화가 전반적으로 검소한 가운데에 고구려·신라의 경우가 특히 모범적이기 때문에 두 나라의 사정만 소개했을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위에서 소개한 <수서> '동이열전' 고구려 편에 남녀상열(男女相悅)이란 표현이 있었다. 이 말이 풍기는 뉘앙스는 그다지 건전하지 않다. 조선 전기의 유학자들이 고려시대의 대중가요를 가리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라고 폄하한 탓에, 남녀상열이란 말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리 고상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남녀상열이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간에, 고구려·신라인들은 남녀상열을 최고의 결혼예물로 생각했다. 둘이 좋아 죽으면 그뿐이지 무슨 예물을 주고받느냐며, 그렇지만 그냥 보내기는 좀 섭섭하므로 '삼겹살에 소주' 한 잔 혹은 밥과 술로 성의나 표시하자는 게 그들의 일반적인 분위기였다. 그것이 아주 인상적이고 모범적이었기에 중국 역사서에까지 소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