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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00회)

낙수(落穗) <3>

등록|2010.12.31 10:18 수정|2010.12.31 10:18
과거장이 기다릴 만큼 자리 잡기에 치열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응시자가 몰렸다는 점이다. 선대왕인 영조 15년 알성시에 응시한 거자가 1만 7000명 정도였는데 이후 숫자가 해마다 불어나 정조 24년엔 초시 응시자가 11만 명이 넘었으니 5배 이상 불어난 것이다.

그렇다 보니 몰려든 수험생들 사이를 오가며 어중이떠중이들이 떠드는 선접군(先接軍)들을 밀치고 자기 편을 위해 자리를 맡아주는 쟁접(爭接)이 필요하게 된다. <천일록>을 살펴보자.

<부문할 때는 짓밟는 폐단이 있고, 쟁접할 때는 치고 때리는 습관이 있다. 밟히면 죽고 맞으면 다친다. 그럴 수밖에 없다.>

부문(赴門)이란, 과거장에 나아간다는 뜻이니 많은 수험생들 사이를 꿰뚫어야 하므로 짓밟는 폐단이 있는 건 당연했다. 더구나 영화당 앞뜰엔 현제판(懸題板)이 있었다.

현제판은 문제를 적은 판이다. 과거를 치를 땐 문제를 인쇄한 답지를 나눠주지 않았으므로 문제판 가까이 자리를 잡는 게 최고였다. 네 곳의 출입문에 날밤을 까고 기다렸다가 문이 열리면 바람처럼 내달아 현제판 가까이 당도하여 자신들의 접(接)을 불러 장막을 치고 자릴 깐 후 우산을 씌운다.

왜 과장에 선접군이 말뚝과 우산을 지참했는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렇다면 접은 무엇인가? 서당에서 함께 공부하고 놀이판을 즐기던 무리를 접(接)이라 하는 데, 과장에선 여러 일을 돕기 위해 나선 한 팀이란 말이다. 그런 팀들이 상대 팀들에게 자릴 빼앗기지 않으려고 자리다툼을 치열하게 경쟁하니 '쟁접(爭接)'이란 말을 쓴 것이다.

출입문을 들어와 좋은 자릴 차지하기 위해선 당연히 주먹질과 발길질이 오가는 것이기에 힘께나 쓰는 자를 동원할 수밖에 없다 보니 과거철이 되면 세력이 있는 쪽에 자원하는 무리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들의 역할은 여기까지인가. 아니었다. 선접군들은 부문과 쟁접에서 힘을 쓴 대가로 사전에 흡수해 놓은 거벽(巨擘)에게 글을 짓게 하고, 글씨를 대신 쓰는 사수(寫手)에게 글씨를 받아 답안을 작성해 바친다.

시험관은 남의 글인줄 모르고 이들이 간혹 합격하는 수가 있어 어중이떠중이들이 세력가의 수종군으로 나섰다는 말이 돈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장은 나라의 인재를 선발하는 신성한 장소라기 보다 폭력이 난무한 난장판으로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정조 때의 일이니 너무 기막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정조 때의 학자 박제가(朴齊家)가 <북학의(北學議)>에 쓴 이런 대목이 입맛을 쓰게 만든다.

<과시가 열리면 백배가 넘는 유생이 물과 불, 짐바리와 같은 물건을 시험장 안으로 들여오고, 힘센 무인들이 들어오며 심부름 하는 노비들이 들어오고, 술파는 장사치까지 들어오니 과거 보는 뜰이 비좁지 않을 이치가 어디 있으며, 마당이 뒤죽박죽이 안 될 이치가 어디 있겠는가. 심한 경우엔 망치로 상대를 치고 막대기로 상대를 찌르며, 문에서 횡액을 당하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욕 먹기도 하며, 변소에서 구걸을 요구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하루 안에 치르는 과거를 보게 되면 머리털이 허옇게 세고, 심지어는 남을 살상하는 일이나 압사(壓死)하는 일까지 발생한다. 온화하게 예를 표하며 겸손해야할 장소에 강도질이나 전쟁터에서 할 짓거리를 행하고 있으니 옛사람이라면 반드시 오늘날의 과거장엔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부문'과 '쟁접'의 난투극으로 사상자(死傷者)가 있었지만 거자들은 자기 팀들을 모아 장막을 치고 자리를 확보한 후 시험문제를 기다리면 이윽고 전하가 들어와 자리에 앉은 후 내시가 현제판(懸題板)에 시험문제를 건다. 문제를 베낀 거자들이 자기 접을 찾아 되돌아가면 부정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제각기 자신의 접을 찾아가서 책행담 열어놓고
해제를 생각하여 풍우같이 지어내니
글하는 거벽들은 구절구절 읊어내고
글씨 쓰는 사수들은 시각을 못 머문다

위에서 말한 책행담(冊行擔)은 무엇인가? 행담은 싸리나 버들로 만든 물건을 넣는 상자다. 그 속엔 예상답안지를 비롯해 참고서적 등이 들어있었다.

시험장에 웬 가방인가? 이게 과시장의 고전으로 불리는 '협서(挾書)'로 뻔뻔한 범죄행위였다. 그만큼 과거장이 문란해졌음을 보여주는 일인데, 과거장이 마치 책가게 같았다고 <지봉유설>을 쓴 이수광은 말한 바 있다.

이익(李瀷)은 자신의 시대에도 과거장이 문란했음을 여러 서책에서 밝히고 있다. 그에 의하면, 자신의 시대엔 '협서'가 금지되자 거자들은 과시장에 들어갈 때 여러 사람을 데리고 갔는데 그 가운데 글 짓는 사람은 십분의 일도 안 된다고 털어놓았다.

행세하는 집안에서는 글을 잘 짓거나 글씨를 쓰는 이들이 함께 입장해 답안을 작성했는데 정약용이 과장에 온 것은 이번 알성시에 어느 누가 대제학 대감과 입을 맞춘 무리인가를 찾기 위함이었다. 칠복이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정약용은 가만히 곱씹었다.

'이창섭 대감에게 보낸 내용은, 예전의 방법은 남들의 눈에 띄기 쉬우니 이번엔 답안의 마지막 줄에 '묏 산(山)'을 넣어 문장을 만들되 '묏 산' 자를 유난히 크게 쓰라는 당부였다고 했겠다.'

그렇다면 문장을 잘 짓고 글을 잘 쓰는 쪽이 아니라 답안지를 받아 한데 묶어 채점하는 쪽에 무게를 두었다. 과장에 온 거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답안지를 빨리 내려 경쟁 하듯 서둘렀다. 정약용은 다시 한 번 생각을 가다듬었다.

'가만···, 좋은 자릴 차지하려 서두른 것은 문제를 빨리 볼 수 있는 현제판(懸題板) 가까이 있기 위함이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 전하가 친림하는 알성시의 경우 즉일방방(卽日放榜)이므로 시험지를 빨리 내려 했을 것이다.'

타당한 생각이었다. 과장에서 빨리 답안지를 내는 게 '조정(早呈)'이다. 그런데 이게 문제였다. 정조 15년의 이때 알성시에 참여한 거자 수는 7만에 이르렀는데 시험 친 그 다음날 급제자를 발표할 '즉일방방'은 1만 2천장이 넘는다.

산처럼 많은 답안지를 꼼꼼히 읽어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시관은 일찍 낸 답안지 약간만 보고 채점을 했으니 당연히 부실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실록>에 의하면, 이해 가을 두 곳의 시험 장소에서 합격한 답안지는 먼저 낸 3백장 안에서 거의 나왔다고 적고 있다. 다시 말해 채점을 한 시관은 일찍 낸 답안지를 조금만 보고 채점하고 나머지는 채점의 대상조차 삼지 않았다. 그러므로 거자들은 답안지의 서두만 써두는 방법만 익힌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게 문제가 돼 시관들은 나름대로 방법을 마련했다.

"이번 과시에는 폐단을 막기 위해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 답안지를 내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소."

그런가 하면 늦게 낸 답안지에서 합격자를 선발한다는 대책을 세우기도 하는 등 오만가지 방법이 제시됐으나 과시의 폐해를 막지는 못했다. 그렇게 보면 대제학 대감이 이창섭 대감에게 보낸 방법은 조정의 폐를 막는 방법일 수 있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렇게 많은 숫자 중에 '묏 산(山)' 자를 크게 쓴 답안지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정약용은 풍속처럼 굳어버린 과장의 어이없는 풍경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늙은 선비들이 걸과(乞科)하는 모습은 말할 것도 없고 새끼줄망 구멍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고 비굴하게 통사정 하는 모습도 어이없는 풍경이었다.

"시생의 성명은 아무개인데 머언 시골에 살면서 과거 때마다 참석해 올해 일흔입니다. 요 다음 과거엔 참석치 못하겠으니 이번에 합격하면 죽어서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목 놓아 우니 가엽기도 하고 비굴하기도 했다. 이런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다. '하동접(河童接)'이란 접 이름을 장대 끝에 매단 이들이 힘있는 자를 내세워 그 뒤를 따라 거드름 피우며 들어가는 모습도 있었다.

유건 쓴 거자들의 머리 위로 큰 종이 양산을 든 무리들이 휘적휘적 혼란 속을 파 들어갔다. 그곳엔 글을 짓는 접장과 글씨 쓰는 자가 있고 선생으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자가 젊은이의 청원에 귀를 기울였다.

"선생님, 조금 전 시생은 일흔 먹은 노유(老儒)가 걸과(乞科)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번엔 제가 아니라 아버님 명의로 답안지를 작성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시생은 나이가 젊으니 앞으로 기회가 있을 것 아닙니까."
"참으로 효자로고. 그렇게 하세."

대화를 들은 어떤 접장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턱밑수염을 쓸어내리며 목소릴 낮췄다.

"네 글씨가 나만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네 아버님의 답안은 내가 써줄 것이니 너는 공부를 더 해서 훗날의 과거에 직접 짓고 쓰도록 해라."
"아이구, 감사합니다."

그러고 나서 선생이 짓고 접장이 쓴 아버님 명의의 과거 답안지를 새끼줄망 사이로 시관 앞에 들여보냈다. 그러니 조선이란 나라가 부정부패의 나락 속에 멀쩡하겠는가.

관아에 돌아온 정약용은 과시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나오는 과천합일(科薦合一)처럼 인재선발 기능을 상실한 것으로 봐도 무방했다. 즉,

"과거시험은 장차 사람을 선발해 쓰려는 것이다. 그런데 시험을 치르고서 쓰지 않는다면 뭣 때문에 시험은 치는 것인가."

조정에는 비상설적인 과거가 많고 수시로 시행돼 엄청난 양의 합격자가 배출된다. 양산된 합격자들은 벼슬길에 나갈 길이 좁아지자 온갖 엽관 운동을 비롯해 관직매매의 줄타기를 시도했다.

'이젠 과시에 합격해도 벼슬길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렇다 보니 내부의 경쟁을 통해 파당짓는 걸 찾을 것이다.'

그러나 중인이나 서얼은 달랐다. 이들에겐 한품서용제(限品敍用制)가 있어 그들이 과거에 합격해 방목이 걸리면 이름 밑에 '중인(中人)'이나 '서(庶)'가 병기돼 드러내놓고 자신의 신분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북악의 모임 옥류천은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과시 합격자일 가능성이 높다. 여기엔 그 자들을 움직인 자가 있을 것이다. 그 자가 누군가?'

정약용은 의혹의 늪 속으로 점점 빨려 들어갔다.

[주]
∎협서(挾書) ; 시험장에 책을 가지고 들어가는 것
∎현제판(懸題板) ; 문제를 적은 판
∎조정(早呈) ; 답안지를 빨리 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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