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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간지를 뛰어넘는 지혜'

등록|2010.12.31 19:44 수정|2010.12.31 19:44
요즘 내가 들여다보고 있는 증권업계는 말을 곧이곧대로 하지 못하는 동네다. 주가가 내려갈 것 같을 때는 조심스럽게 "단기 조정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고, 주가가 오를 거 같을 때도 "증시의 하방 경직성을 높일 것으로 예상한다"고 꼬아서 말한다. 돈이 걸려 있는 문제라 까딱 잘못했다가는 책임을 져야 하는 일이 생길지도 모르기 때문에 직접적인 표현을 삼가다 보니 생긴 습성일 것이다. 영어나 한자어가 난무하는 것도 같은 이유일 텐데, 좀 있어 보이려고 일부러 현학적인 표현을 쓰는 경우도 종종 있다.

북한과의 군사적 충돌을 증권업계에서는 '지정학적 리스크'라고 부른다. 에둘러 표현하려고 한 건지, 현학적으로 보이려고 하는 건지 알 수 없으나, 천안함 사건이건 연평도 피격 사건이건 모두 지정학적 리스크라고 부른다.

여기서 리스크는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바로 그 리스크다. 7천만 겨레의 운명이 걸린 중차대한 문제를, '리스크를 테이킹'하면 한몫 건질 수 있는 수많은 리스크 중의 하나로 부르는 걸 보면, 금융시장이란 한편 냉정해 보이기도 하고, 한편 무모해 보이기도 한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 지하의 카지노에서 카드 게임에 열중하는 갬블러의 모습이랄까.

그런데 왜 '북한 리스크'가 아니라 지정학적 리스크인지를 따져보면, 이 용어를 창안한 애널리스트가 왠지 글로벌(역시 이 동네에서 잘 쓰는 용어다)한 안목에 역사의식까지 지닌 사람일 것 같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적어도 지금 청와대와 정부에 앉아있는 당국자들보다는 그럴 거 같다는 얘기다.

북한한테 얻어맞은 건 한국인데, 왜 미국이 항공모함을 서해안에 보내는지, 중국은 왜 미국의 항공모함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북한을 싸고도는지, 일본은 왜 북한 때리기를 계속하며, 러시아는 왜 안보리 의장 성명을 채택하려 애썼는지 등의 질문을 한방에 풀어줄 수 있는 열쇠가 바로 '지정학'이다. 기억의 저편에서 암기 교육 시절의 추억을 끌어오자면, 우리나라는 언제나 '지정학적 요충지'였고, '열강들의 각축장'이었다. 우리는 쉬이 잊어버리지만 한국은 여전히 그런 나라다.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에 지정학적 고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흥적이고 편의주의적이며, 대중 영합적이고, 근시안적이다. 전략도 없고, 역사의식도 없다. 허둥지둥하며, 이랬다저랬다하고, 다음날이면 드러날 거짓말까지 한다. 허구헌 날 자존심 타령을 하면서 자존심조차 지키지 못한다. 자존심이라는 감정의 영역으로 외교를 끌고 들어가니 외교가 뜻대로 풀릴 리가 없다. 불법 조업하는 중국 어선을 애써 잡아놓고 처벌도 못하고 돌려보내 굴욕외교라는 비난을 받는 건 지당한 자업자득이다.

▲ 연평도 포 사격훈련이 지난 20일 오후 2시30분부터 1시간30분 동안 실시됐다. ⓒ 사진공동취재단


이에 반해 북한은 전략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인다. 연평도에서 한국을 때려놓고, 빌 리처드슨 미국 뉴멕시코 주지사를 불러들여 핵에 관한 통 큰 제안을 하는 걸 보라. 북한이 큰 그림을 갖고 다섯수를 내다보는 박보장기의 고수라면, 남한은 한수 한수에 쩔쩔매는 아마추어 수준처럼 보인다. 귀는 얇아서 훈수 두는 사람이 야유를 보내면 쉽게 마음이 흔들린다.

북한을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북한정권이야말로 한반도 통일의 최대 걸림돌이 된 지 오래니까. 북한 정권은 철저하게 자기네들의 생존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생존이 걸린 문제를 놓고 무얼 못하겠는가. 대북 문제는, 이를 테면 시한폭탄을 품에 안고 링에 오른 선수를 어떻게 상대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상대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것 같다.

고 리영희 선생은 90년대 초반에 이미 "남북문제는 복안(複眼)적 시각으로 봐야 한다"고 갈파한 바 있다. "최소한의 균형 잡힌 관찰과 이해를 위해서도 두 눈의 원근법적 기능으로서의 각도와 거리의 파악이 필요"한데, "하물며 많은 나라의 이해관계가 얽힌, 다시 말해서 복합적 요소로 구성되고 변화하는 국제적 문제는 양안적 기능만으로도 부족하다"는 것이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 그런데 이 정부에는 복안은커녕 양안적 시각마저 보이지 않는다. 나는 그 이유를, 이 정권이 북한 문제를 국내 정치의 하위 요소로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확전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가, 표(=지지율) 떨어질까 봐 단호한 대응으로 얼른 말을 바꾸는 일이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천안함 같은 복잡다단한 사건을 지방선거에 이용하려고 서둘러 조사를 끝내느라 더 큰 의혹을 부르는 일이 생기는 것이다. 꼬리가 몸통을 흔드니 나라의 품격이 제대로 설 수 없고, 백년지대계가 설 수 없다.

최근 중국이 북한의 나진항을 50년간 사용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청진항이나 단천항도 중국이 독점 개발하기로 했으며, 북한의 지하자원을 중국이 싹쓸이해 가고 있다는 소식은 진작부터 들려왔다. 동북공정프로젝트에서 이미 드러난 바지만, 중국은 북한을 실질적인 '동북4성'으로 만드는 오래된 꿈을 실현하고 있는 중이다.

우리 정부의 대책은?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바에 따르면, 곧 망할 거니까, 망할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평소에 아무 일도 하지 않아놓고 망하면 저절로 우리 게 된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 무식하면 용감해진다더니 딱 그 꼴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전쟁을 두려워하면 전쟁을 막을 수 없다고 했다.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전쟁을 각오하는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정녕 전쟁할 각오가 되어 있는가. 전쟁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어렸을 때 나는 아버지 세대로부터 들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 세대가 지금은 전쟁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말한다. 뭐가 달라졌나. 우리가 그만큼 잘 살게 돼서, 경제력이 있으니까 쉽게 이길 것 같은가? 북한은 100만의 정규군을 가진 나라다. 화력의 대부분을 휴전선에 집결시키고 버튼만 누르면 남한 전역을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나라다. 북한의 핵무기와 미국의 핵무기가 치킨 게임을 벌이고 있는 곳이 한반도다. 이명박 대통령은 독일의 빌리 브란트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수나라 양제가 되지는 말기 바란다.(운하를 파는 건 이미 수나라 양제를 따라하고 있지만)  

역사에 관한한, 나는 헤겔의 '이성의 간지'가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다. 자잘한 파도쯤은 거대한 조류에 휩쓸려 내려간다. 문제는 지금 우리가 자잘한 파도에 휩쓸려 익사하기 직전이라는 점이다. 한반도 전역이 불바다가 된 뒤에, 이성의 간지가 무슨 소용인가.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의 전 과정은 우연을 통해서 역사법칙이 굴절되는 그런 과정이다. 생물학 용어를 빌리면, 역사법칙은 우연의 자연도태를 통해서 실현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과 평화가 역사의 법칙이라고 믿는다면, 전쟁이라는 우연을 자연 도태시키기 위한 의지가 필요하다. 지혜가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를 쓴 이재성 씨는 현재 한겨레 기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웹진 주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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