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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도망자>의 앞서간 생각

[재벌을 읽는 두 가지 방식①] - 도망자

등록|2011.01.06 16:50 수정|2015.09.14 15:31
첫 번째 이야기 - 도망자

[추노] 제작진이 그대로 뭉쳐 제작했다는 [도망자]는 국제적 스케일을 선보이며 수려한 액션과 화려한 캐스팅에 힘입어 시청률 20.7%로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시청률은 하향세를 타기 시작했는데 이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액션에 비해 이야기가 빈약하다', '매일 도망만 치는 얘기에 지쳤다' 정도인 것 같다. 이 글은 왜 도망자가 인기가 없어졌는지, '그 많던 시청자는 다 어디로 갔을까?'에 관한 글이다.

[도망자]는 6.25전쟁 발발 직후 사라진 금괴가 세상에 나타나면서 그에 관련된 인물들이 서로 금을 차지하려는 사투를 그린 드라마이다. 진이(이나영 분)는 실체를 알 수 없는 거대 세력으로부터 시시각각 살해위협을 받고 있다. 이미 자신을 제외한 가족들 모두 살해당했고 자신만 홀로 남은 상황이다. 진이는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세력이 누군지 알아내기 위해 국제탐정 지우(정지훈 분)에게 사건을 의뢰하였고 그 과정에서 진이는 '누가' 진이 일가를 죽이려 하는지가 아니라 '왜' 진이 일가를 죽이려 하는지가 중요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전쟁이 터지자 남한 정부는 금궤를 후방으로 이송하는 명령을 내린다. 이 작전에 투입되었던 양두희(송재호 분)는 40%의 금괴만 옮겼고 나머지 금은 편취한다. 이어 그는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그 작전에 투입된 동료들을 모두 죽였는데 이 때 유일하게 도망쳐서 살아남은 사람이 진이의 할아버지였다. 양두희는 편취한 금을 기반으로 한국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인(재벌)으로 군림할 수 있게 되었고 진이는 할아버지가 양두희의 비리를 폭로하려다가 살해당한 것으로 이해하였으나 양두희로부터 잔혹한 진실을 듣게 된다.

그래, 전쟁이 났어. 금을 실어 보내고 우리는 미아리 방어선으로 가야했지. 금을 반도 못 실었는데 말이야. 진중길이, 그러니까 자네 할아버지가 그랬어. '묻읍시다. 북괴수에게 내어줄 순 없잖습니까?' 그렇게. 금을 묻던 와중에 몇 명이 도망을 쳤어. 금을 가지고. 사살을 했지. 금을 지키려는 사람과 가지고 도망치려는 사람끼리 교전이 벌어졌어. 모두들 금괴를 보고 눈이 뒤집혔던 거야. 다 죽였다고 생각했는데 (금을 가지고 도망쳤던 사람 중)네 할아버지 혼자만 살아남았어. 나 혼자 남으니까 그 생각이 들더구만. 이 많은 금이 다 내꺼로구나. 신이 주신 선물이구나. 금? 참 좋더구만. 못 벌이는 사업이 없었고 못 살리는 사람이 없었어. 그건 진중길이도 마찬가지야. 그 때 훔친 돈으로 집을 사고 땅을 사고 네 아버지 유학도 보내고 너도 조기 유학 갔고.

이때 처음으로 진이는 죽지 않고 살아남은 것에 대해 절망한다. 부유한 가정에서 존경할 수 있는 조부모님과 부모님, 양부모님으로부터 따듯한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진이였다. 진이는 사랑하는 사람이 휘말려 죽을까봐 함께 살 수 없는 외로움과 한 순간도 편안히 잠들 수 없는 밤을 두려워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금괴에 대해 침묵하는 대가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편안히 살 수 있던 기회를 거절했던 것은 이 사건에 대해 밝히는 것이 비단 자신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라 억울하게 죽은 가족들을 위한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리라. 그런데 사실은 그 가족들의 억울한 죽음이, 바로 할아버지가 자초한 일이라니. 이제 진이는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양두희의 말이 거짓이라면, 할아버지가 금괴를 훔친 것이 아니라면, 왜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 현재까지 금괴를 정부에 돌려주지 않고 땅에 파묻어 놓은 걸까. 그 금이 떳떳한 금이라면 왜 양부모님은 죽을 때까지 (금의 위치를 표시해 둔) 조선은행화폐를 자신에게 건네주지 않은 걸까. 이 모든 질문들은 양두희의 말이 사실임을 반증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깨달은 진이는 '어째서 난 죽지 않고 살아남았을까' 라며 분노보다 슬픈 절망을 쏟아낸다.

한국에서는 재벌이 등장하는 드라마가 드라마 숫자만큼이나 많다. 모든 재현은 현실을 반영한다고 할 때, 계급 유동성이 철저히 닫혀 있는 한국에서 계급의 최상부에 위치한 재벌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가 많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그런 재벌의 어떤 점을 그려내는 가에 있다. 두 말할 필요없이 한국드라마에서 재벌을 다루는 방식은 '재벌 남성과 가난한 여성의 연애'가 거의 유일하다. 왜 그럴까. 정녕 계급에 대해 할 말이라고는 계급을 초월(...)해 서로 사랑하는 남녀에 관한 얘기밖에 없는 걸까.

'너의 가난은 너의 게으름 때문'이라는 신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이 법이고 윤리고 상식이 되어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체제에 대한 의구심을 갖는 것 자체가 위법한 일이기 때문에 이런 사회에서 사회 계급을 재현하는데 허용 하는 방식, 그에 따른 상상 가능한 방식은 '재벌 남성과 가난한 여성의 연애'밖에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계급에 관한 '본질적'인 얘기, 이를테면, '왜 한국 사회는 현재와 같은 계급 구조를 가지게 되었나. 광복 이후 한국 사회를 이끈 지도층은 과연 그럴 자격과 능력을 갖춘 자들이었나. 현재와 같은 사회경제 체제는 누구의 주도로, 어떤 자들의 이익을 챙겨주었나. 이익을 얻는 자들의 삶의 양식이 사회체제(법규범)가 되고 사회의 윤리(도덕규범)가 되고 상식(내면적 종속)이 되어갈 때 어떤 자들의 어떤 희생을 대가로 하는가'와 같은 얘기들은 계층에 따라 불쾌함, 불편함, 지루함, 낯설음 등으로 읽혀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망자]에서는 정확히 이 지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 부자인 남성과 가난한 여성의 연애를 다루는 드라마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문제의식. '어떻게 빈부격차는 생겼는가', '부자는 어떻게 부자가 될 수 있었고 어떤 방식으로 부유함을 지속시킬 수 있었나', '그는 그러한 부를 소유할 자격이 있나' 하는 부분을 '계급'이라는 대사 하나 없이 등장인물들이 겪는 사건을 통해 충실히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도덕적으로 정당한 계급이동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계급사회의 상층부에 진입하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러야 하는지, 얼마만큼 '추잡'해져야 하는지 [도망자]에서는 드러낸다. 알코올 중독인 남편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게 없는 여자는 아들을 키우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야 했고 죽을 수도 있을 만큼 위험한 밀수입에 종사하다가 정말로 죽게 되는 점 등이 지우의 목소리로 담담히 서술되는 점이 그렇다.

그러니까 [도망자]가 수작인 이유는 한국 사회에서 지금까지 계급을 다루어오던 방식을 벗어나 제대로 된 계급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도망자]의 인기가 식은 이유를 '액션이 약해져서', '도망만 다니는 것에 질려서'라고 한다면 할 말 없지만 적어도 '이야기가 빈약해서'라는 것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오히려 [도망자]는 한국의 드라마 역사를 통 털어 거의 다뤄진 적 없는 얘기를, 그래서 너무나 낯선 얘기를 했기 때문에 그러한 담론을 이 사회가, 대중이 소화시키지 못한 것은 아닐까.

일가족이 살해당하는 충격과 분노, 아픔을 겪은 진이는 '기억, 책임, 미래' 라는 말을 자주 반복한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지원하는 재단의 이름인데, 진이는 이 재단의 의미를 '기억하고 책임지지 않으면 미래란 없다'로 풀이하며 양두희를 향해 '당신의 죄과를 기억하고 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며 당신이 책임을 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신이 쌓아올린 모든 것을 내어놓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가족들의 죽음이 양두희의 탐욕 때문만은 아니었음을, 마찬가지로 자신의 할아버지도 역사 속의 죄인이며 그 죄의 결과로 현재 자신의 계급적 삶의 양식이 가능했음을 진이는 알게 된다. 이제 '기억, 책임, 미래'라는 명제는 양두희에게만 향해있지 않게 된 것이다. 할아버지의 죄를 기억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을 때 미래란 없다는 것을, 진이는 괴롭게나마 받아들이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고단한 길로 향한다.

[도망자]는 시작에 비해 잔잔하게(?) 막을 내렸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서 대단히 유의미한 문제의식을 던졌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현재 한국 사회의 계급 구조는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 그것은 정당한지, 현재 한국 사회의 권력층은 그 권력을 어떻게 가지게 된 것인지, 그것은 정당한지, 계급 권력은 누구의 희생으로 누구의 이익을 보장해주고 어떠한 방식을 택해 지속시키는지, 그들은 그러한 이익을 향유할 자격이 있는지 보여준다.

이런 사회에서 나의 위치는 어느 쯤에 있는지, 이런 말도 안되는 사회가 존재 가능하게 된 데에 동시대를 살아가는 한 구성원으로서 나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인지, 이런 사회가 계속해서 지속될 때 한국 사회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등을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20부작에 걸쳐 [도망자]가 말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거 아니었을까. 기억, 책임,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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