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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가 감히 경복궁을 침탈하였구나

일제 강점기 조선의 궁궐 유리건판 사진전 (2)

등록|2011.01.08 12:59 수정|2011.01.08 12:59

일제 강점기 조선의 궁궐 유리건판 사진전지금하고 풍경이 정말 다르다! ⓒ 정만진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아는 시조를 말해보라고 하면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 제',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 감을 자랑마라' 등등을 말할 것이다. 이 시조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학교 다닐 때 국어 교과서에서 배웠다는 것이다.   야은 길재 선생의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역시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모든 국민들이 학교에 다닐 때 암송도 하고, 밑줄 그어가면서 공부도 했던 시조 중의 하나이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 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왕조가 바뀌었지만 산천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다. 지난 왕조 때나 마찬가지의 같은 산, 같은 강, 같은 하늘이 오늘도 그대로 우뚝 서 있고, 도도히 흐르고, 청명하게 맑다. 그런데 '오백년'에 걸쳐 한결같이 충의를 말하고 절개를 논하며 학문을 구하던 '인걸'들은 어찌하여 온데'간데 없다'는 말인가. 아무도 없는 텅빈 '산천'을 혼자('필마') 배회하면서('돌아') 비루한 인심을 한탄하는 이 시조도 우리 국민들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아온 뛰어난 명작이었다.   그런데 오늘 대구박물관에서 식민지 시대의 조선 궁궐 유리건판 사진을 구경하다가 문득 길재의 시조보다도, 그에 비해 훨씬 덜 유명한 원천석의 노래가 더욱 가슴 저 깊숙한 곳에까지 통렬하게 감동을 주는 경험을 하였다. 이것이 사진의 힘인가. 흘러가고 사라져간 것을 현실[眞]처럼 되살려서[寫] 사람의 마음속에 무서운 파문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정녕 사진이란 말인가.   

일제 강점기 조선의 궁궐 유리건판 사진전경복궁 근정전 ⓒ 정만진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瞞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겨워 하노라   나라가 망하고 나니 왕과 고관대작들이 국가 정사를 논하던 궁궐 뜰에도 마른 가을풀이 어지럽게 무성하다는 뜻이다. 조국이 망하는 광경을 직접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시조를 읽으면서도 지은이의 심정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는 못했었는데, 경복궁 근정 앞뜰에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보여주는 이 사진은 원천석의 '눈물'이 내 얼굴에 그대로 흘러내리게 하는 것이었다. 위의 경복궁 사진을 보라. 조선 최초의 정궁(正宮), 그것도 왕이 직접 정사를 돌보던 근정전 뜰이 어떻게 저토록 처참하게 버려질 수 있단 말인가. 나라가 망했다는 것을 사진은 정궁 가득 마구 자란 잡초로 우리에게 증언하겠다는 것인가. 
궁궐은 단순히 왕의 거처만이 아니다. 궁궐은 국가적 권위의 상징이다. 조선이 수도 한양에 지은 궁궐 중에서도 경복궁은 특히 규모가 가장 큰 정궁(正宮)인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타 빈터로 내려오다가, 1867년(고종 4) 복원된다. 경복궁은 이미 온몸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증언해온 중요한 유적인 것이다. 그런 경복궁을 일제 총독부는 거침없이 침탈하고, 궁 안에다 제멋대로 챙긴 우리의 문화재들을 보관하기 위해 총독부박물관까지 짓는다. 잡초가 우거진 경복궁 근정전 사진이며 정궁 경내까지 침탈한 조선총독부박물관 사진을 보노라니, 하얀 눈을 밟으며 대구박물관을 찾아온 조금 전의 상큼한 기분은 송두리째 없어지고, 문득 답답한 마음으로 울분에 젖는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궁궐 유리건판 사진전세상에 이런 참사가! 조선총독부는 경복궁 안에다 자기들의 박물관을 열었다. ⓒ 정만진




경복궁의 이름은 정도전이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부르니 군자 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에서 큰복을 빈다는 뜻의 '慶福(경복)' 두 글자에서 따와서 지었다고 한다. 그 후 1412년 태종은 경복궁의 연못을 크게 넓히고 섬 위에 경회루를 만든 후, 이곳에서 왕과 신하들이 모여 잔치를 하거나 외국 사신을 접대하였다. 또 태종은 연못을 만들면서 파낸 흙으로 아미산이라는 동산도 만들었다.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주로 경복궁에서 지냈다. 경회루의 남쪽에 시각을 알려주는 보루각을 세웠고, 궁의 서북 모퉁이에 천문 관측 시설인 간의대도 만들어 두었다. 또 흠경각도 지었는데, 그 안에는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를 설치하였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궁궐 유리건판 사진전총독부가 경복궁을 침탈하였구나! ⓒ 정만진



경복궁은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오던 도성(都城) 건물 배치의 기본형식에 맞추어 지어졌다. 궁궐 왼쪽에는 역대 왕들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宗廟)를 배치했고,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社稷壇)을 두었다.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왕이 신하들의 조례를 받는 근정전과 왕이 일반 집무를 보는 사정전을 비롯한 정전과 편전들을 앞부분에 두었고, 뒷부분에는 왕과 왕비의 거처인 침전과 휴식공간인 후원을 두었다.  경복궁이 이런 전조후침(前朝後寢)의 형식을 지킨 것은 이 궁이 조선의 중심 궁궐이었으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궁궐 유리건판 사진전경복궁 내전과 외전 ⓒ 정만진


경복궁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1867년에 흥선대원군이 다시 세운다. 그러나 1895년에 궁궐 안에서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고 만다. 그러다가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이 건물을 헐고 근정전 앞에 총독부 청사를 짓는 등 행악을 일삼아 궁의 옛모습을 거의 잃고 만다. 그래도 정전, 누각 등의 주요 건물이 남아 있고, 처음 지어졌던 자리도 지키고 있어서 조선 정궁의 대체적인 모습은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궁궐 유리건판 사진전경복궁 신무문 내측 ⓒ 정만진

신무문은 경북궁의 북문이다. 동문인 건춘문과 마찬가지로 축대 위에 단층의 문루(門樓)를 세우고 축대 중앙에 홍예문을 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1929년에 촬영한 것으로 밝혀져 있는 위의 사진은 경복궁 바깥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찍은 것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궁궐 유리건판 사진전경복궁 신무문 외측 ⓒ 정만진

일제 강점기 조선의 궁궐 유리건판 사진전경복궁 동북쪽 담장 ⓒ 정만진


촬영 시점이 아주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고 그저 일제강점기로만 알려진 위의 사진은 경복궁 동쪽 담장의 북쪽 전경이다. 사진의 오른쪽에 궁성 밖으로 계단 형태의 길이 나 있는 것이 보인다. 주변이 많이 훼손된 모습이 망국의 한을 잘 보여주는 듯하다. 궁궐 안에 보이는 우거진 숲은 녹산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궁궐 유리건판 사진전지금도 서울이 이런 풍경을 유지하고 있다면 아마 세계적 관광지로 부각될 것이다. ⓒ 정만진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위의 사진은 경복궁의 동북쪽 담장을 궁 바깥에서 남쪽 방향으로 바라본 광경이다. 담장 안쪽으로 키가 큰 나무들이 즐비한데 이곳이 바로 경복궁의 녹산이다. 사진의 왼쪽 화면에는 경복궁 바깥의 민가들이 보인다. 저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산이 목멱산(남산)이다. 너무 멀어서 '남산 위의 저 소나무'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궁궐 유리건판 사진전경복궁 북쪽 담장과 계무문 ⓒ 정만진


1929년에 찍은 위의 사진은 경복궁의 북쪽 궁성과 계무문의 전경을 보여준다. 사진 앞쪽의 가까운 곳에 포장된 길이 보인다. 담장을 따라 사진 왼쪽으로 따라가보면 홍예문 형태를 한 계무문이 하얗게 보인다.

일제 강점기 조선의 궁궐 유리건판 사진전세종로 ⓒ 정만진


일제 강점기에 촬영된 위의 사진은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바라본 광화문통과 시가 전경의 모습을 보여준다. 광화문통은 조선총독부 청사 진입로의 중심축에서 서쪽으로 노폭이 확장되어 있고, 그 중앙에 분리대가 설치되어 있다. 광화문통 동편 처음 시작하는 위치에 있는 서양식 2층 건물은 경기도청이다. 광화문통의 끝 서편에 부민관 건물도 보인다. 부민관은 경성부(京城府)가 1935년 지금의 서울시 중구 태평로 1가에 건립한 공립 극장이다.
덧붙이는 글 사진이 많아 경희궁, 창덕궁, 덕수궁, 창경궁 모습은 다음 꼭지에 이어서 보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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