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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 찬란한 아침햇살의 진실을 아는가?

포항MBC 창사특집 <경술국치 100년, 석굴암, 100년의 진실>

등록|2011.01.10 16:19 수정|2011.01.10 16:19
'진실'이란 것처럼 실제 얼굴과 가면을 구별하기 힘든 것도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가짜가 많이 만들어지는 건 그만큼 진짜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는 때론 힘의 논리가 마치 진실로 둔갑할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보통 사람들은 그런 것까지 해부하여 '진실'의 진실 여부를 파헤치기가 쉽지 않다. 역으로 따져보면 거기에서 권력의 책임과 의무가, 지식인입네 하는 전문가 집단의 책임과 의무가, 다음 세대를 위한 앞 세대의 책임과 의무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리라.

블로그를 통해 석굴암 관련 방송이 있으니 보라는 소식을 접하고, 쓰고 있는 안경부터 닦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역사와 사찰 등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성낙주 선생님의 <석굴암, 그 이념과 미학>을 읽은 후부터 석굴암에 대한 관심이 유난히 많아졌다. 그건 아마 '내가 그 동안 진실이란 허울을 쓴 가면에 속고 있었구나'라는 자괴감에 대한 반작용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석굴암에 가본 사람은 그 방면에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본존불의 장엄하면서도 인자한 미소를 직감적으로 느낀다. 조금만 설명을 곁들여 보면, 그 단단한 화강암을 두드렸을 신라 석공의 땀과 예술혼을 느끼기에도 어렵지 않다. 그리고 부처님을 통해 꿈꾸었을 창건주 김대성의 염원을 조금은 상상해 볼 수 있다.

포항MBC 다시보기 화면지리적 인접성의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럼에도 지역방송국이 이런 특집 프로그램을 제작한 것에 저절로 박수가 나온다. ⓒ 한봉희

포항MBC에서 창사 39주년 특집으로 <경술국치 100년, 석굴암, 100년의 진실>(☞ 다시보기 바로가기)을 2010년10월 30일에 방송하였다. 방송일자를 보고, '어, 한참 지난 프로그램이네'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석굴암의 기나긴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에서 보면, 두 달 정도는 눈 한번 깜빡거리는 시간일 뿐이기 때문이다. 

프로그램 제목을 보고서야, '아, 작년이 경술국치 100년째 되는 해였구나' 라고 떠올린다. 무심코 살아가다 보면 잊고 사는 것들이 많다.

그리고 그 작고 사소한 무심함이 더 큰 무엇을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고작 100년 된 진실도 무심하게 잊고 사는데 1,200년도 훨씬 더 지난 기나긴 역사의 진실을 누가 기억하려 할까? 라고 생각하니 섬뜩하기까지 하다.

프로그램은 '석굴암의 진실을 찾아가 보자'는 해설로 시작한다. 이것만 봐도 제작의도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그동안 석굴암의 진실이 무심함 때문이든, 의도적이든, 일정 부분 잘못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쉽게 눈치챌 수 있다.

그럼 어디서부터 어떻게 진실이 왜곡되어졌다는 것일까? 751년 신라의 김대성에 의해 세워진 석굴암, 1200여 년 넘게 늘 토함산 그 자리에서 동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석굴암, 간혹 세월의 풍파를 겪으면서 생채기가 나기도 했지만 축조 당시의 진실이 바뀔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런데 왜 지금 다시 진실을 찾아 길을 나서야 할까?

방송을 따라가 보자. 일본학자 이마니시류의 저서 <신라사 연구>에 보면 '이교도에게 뺏긴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한다. 즉 고도를 회복한다. 그런 심정으로 경주를 바라보고 있다'는 대목이 나온다. 이것은 한 일본학자의 석굴암에 대한 마음가짐이자, 대륙진출을 꿈꾸는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통치 전략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당시 일본은 '전시청국 보물 수집방법'이란 문건을 통해 중국, 조선의 문화재를 공개적으로 약탈 독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배경 아래에서 1902년 동경제대 교수인 관야정(세키노 다다시)은 한국에 와서 63일 동안 조사를 벌여 1904년 '한국건축 조사 보고'를 발간한다. 그리고 1907~8년쯤 일본은 석굴암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데, 그들이 이미 불적 조사를 통해 정보를 입수한 중국, 인도, 중앙아시아의 석굴사원과는 그 계보가 다른 독창적인 구조와 양식을 보여주는 석굴암에 경탄과 경악을 하면서도, 본능적으로 석굴암이 엄청난 의미가 있음을 직감한다.

석굴암 본존불사진가 안장헌님의 사진을 전시회에서 허락하에 재촬영함 ⓒ 한봉희

그리고 1910년 8월 석굴암을 반출하려는 시도를 자행한다. 이러한 반출 시도가 여의치 않자 일본은 1913년부터 2년에 걸쳐 석굴암을 보수하기 시작한다.

석굴암 미학연구소 소장이신 성낙주 선생님에 의하면, 이것은 '조선을 영구적으로 지배하려는 전략에 의한 것으로 불교성전으로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전리품을 영구적으로 보전함으로써, 정복자의 쾌감을 만끽하는 장소로써 석굴암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당연히 복원되어졌어야 할 전각도 복원하지 않은 채 비바람에 그대로 노출되고 짐승이 들락거리는 기차굴처럼 복원되어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다시 찾아야 되는 석굴암의 진실은 어떤 것들이 있는 것일까?

우선 '아침햇살의 진실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동해의 찬란한 일출이 본존불 이마의 백호에 비추면 백호광명이 온누리에 다시 반사된다는 장엄하고 환상적인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침해가 실상은 일본의 태양신인 아마테라스 오오가미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논란의 시작은 석굴암과 관련된 본격적인 최초 평문인 <조선과 그 예술>(야나기 무네요시 저)의 '석불사 조각에 대하여'에 나오는 '일본해에서 떠오른 태양이 석굴암을 비춘다'는 감동적인 묘사에서 처음 언급된 이래, 이후 우리의 교육과 주류학계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면서 정설 이미지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럼 일단 감동적인 묘사에서 깨어나 한번 생각해보자. 그것이 동해의 찬란한 일출이든지, 일본의 태양신인 아마테라스든지, 우선 햇살이 본존불의 이마에 비추어야 한다. 햇빛이 반사되려면 반사체에 햇빛이 전달되어야 하는 것은 초등학교 상식 수준도 못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곧 석굴암 구조에서 '광창'의 존재 여부의 진실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어디를 가도 마애불처럼 특정한 사유나 목적이 아닌 이상 야외에서 한가롭게 일광욕을 즐기는 부처님은 없다. 더군다나 석굴암의 구조가 유례없는 조립식 석굴사원임을 감안하면 그에 걸맞는 토목 및 지붕구조가 필요했음은 자명한 일이다.

또한 현재 별 논란 없이 인정되고 있는 지붕구조(기와 세 겹, 토석층 세 겹 등)와 본존불의 위치 등을 조금만 들여다봐도 부처님 백호에 햇살을 전달해 줄 수 있는 광창은 물리적으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은 아주 상식적인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즉, 찬란한 아침해는 이 땅의 어디를 가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것이 석굴암 본존불의 이마에 비추어 온누리에 반사되는 장엄하고 환상적인 장면은 우리가 걷어내야 할 말 그대로 환상이라는 것이다.

석굴암 전경밑에서 올려다 본 석굴암. 전각이 먼저 다가와 맞는다. ⓒ 김동건


이외에도 명확해져야할 진실들로써 방송에서 거론되는 것은 '전각의 존재 여부' 및 '부처님 밑으로 물이 흐르는지 여부' 등이 있는데, 나와 같은 일반인의 상식적인 시선으로도 사실 논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되는데, 전문가 집단인 학계에서 진실게임을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다. 이것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각자가 확인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경우에건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결국 각자의 몫이다. 그리고 '진실'로 향하는 믿을만한 안내자를 찾아 길을 나서는 것도 각자의 선택일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역사를 마주할 때 '진실'에 다가가는 좋은 안내자 같은 훌륭한 프로그램 하나가 우리 주변에서 무심히 사라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많은 사람이 이와 같은 좋은 안내자를 한 번 만나보기를 권하는 이유이다.

* 1년 전 위 프로그램과 많은 부분에서 맥을 같이하는 전시회를 다녀온 적이 있다.

석굴암 미학연구소 소장이신 성낙주 선생님이 조계사에서 마련한 '석굴암 백년의 빛 - 사진으로 읽는 수난과 영광의 한 세기' 전시회였는데, 당시 전시회를 다녀온 후 적어둔 소감을 첨부한다. 프로그램을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석굴암 백년의 빛' 전시회를 다녀와서
 -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게 너무 많다.

첫 번째 기억

어린 시절, 내 마음속 석굴암, 그 위대성은 단순히 하나의 빛으로 남아있었다.
조형적 아름다움이 무엇을 뜻하는지, 고대유물 속에 내재된 상징과 상상력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사상과 집념, 소망이 무엇인지, 따위를 상상하려고도 하지 않고 감히 가늠할 수도 없던 어린 시절의 우리들 기억을 좌우하는 건 어쩌면 우리에게 주입되는 선배세대(부모님, 선생님, 교과서와 같은 책들 등)의 어떤 것들이다.

그것은 마치 새끼새는 어미새가 물어다주는 먹이만 먹고 자라듯이 어린 시절 나에겐 일종의 절대적인 진리와 같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내 기억 속 석굴암은 아, 얼마나 가슴 설레는 장엄한 이미지였는가 말이다. 동해 우뚝 솟은 산꼭대기에 계신 부처님이 동해에서 막 떠오르는 찬란한 아침햇살을 받아 부처님 이마(백호)를 통해 투명한 광채를 반사시켜 자비로운 햇살이 되어 온 나라 방방곡곡, 백성의 마음 속속마다 비추는 이미지 말이다. 

두 번째 기억

몇 년 전 선배와 함께 석굴암을 찾은 적이 있었다. 나름 우리 역사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진 어른이 된 후 오랜만에 찾은 석굴암이라 기대 반 설레임 반의 심정으로 힘들게 올라선 석굴암. 그러나 고백컨대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작은 설레임도 만족시키지 못하고서 올라온 길을 힘없이 걸어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유리벽(중생의 못난 속셈으로는 '창'이라기보다는 더 단절된 느낌의 '벽'일 수밖에 없었다. 유리를 통한 소통의 기대 또한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속 부처님은 땀을 삐질거리며 올라온 중생에게 자비의 가르침은커녕 고생했다는 눈길 한번 주지 못하셨다.

석굴암을 위한 변명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에서 진행중인 '석굴암 백년의 빛 - 사진으로 읽는 수난과 영광의 한 세기'를 다녀왔다. 석굴암미학연구소 소장이신 성낙주 선생님이 기획하신 전시실 한켠에는 전시회 부제처럼 최근 백년의 석굴암이 마주한 수난과 영광을 느낄 수 있는 사진들과 함께 나의 첫 번째 기억을 깨뜨리는 성 선생님의 죽비같은 말씀이 떠돌고 있었다. (성 선생님은 오시는 분들마다 함께 다니시며 일일이 설명을 해주고 계셨다)

그동안 석굴암 원형논쟁의 핵심인 이른바 '햇살담론'이란 것이(내 첫 번째 기억속 그 햇살) 실상은 태양과 태양신(아마테라스)의 나라라는 일본총독부에서 만들어 확산시킨 담론이라는 것, 어린 시절 믿었던 동해는 실상 일본해였다는 것, 어쩌면 우리들에게 석굴암의 햇살 이미지를 은연중 심어주었던 미술사학자 윤희순의 수필 <토함산 해맞이> 또한 일본 햇살담론에 마취된 당시 지식인의 산물이라는 것, 그리고 그런 마취상태는 지금도 권력화 되어 이땅 문화사학계에 의해 계속되고 있다는 것, 그들이 말하는 원형이란 결국 일제가 수리하기 전의(1913년) 허물어진 상태, 보호전각도 없이 비바람과 새와 짐승에게 무방비로 노출된 석굴암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라는 것.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고대 유물의 완전한 원형을 지금 이땅의 사람들은 알 수 없다. 따라서 그 원형의 아름다움은 실재하는 여러 증거들과 후대인들의 상상력에 의해서 복원되어진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최소한 상식적이고 합당한 상상력이어야 한다. 원형에 접근할 수 있는 실재하는 증거들과(전시회에 몇몇 증거들이 제시되고 있다)과 합리적인 추론도 없이 석굴암 전실 전각을 뜯어내는 대신 일본이 주입한 햇살 한 조각을 목숨 걸고 지키려는 사람들의 생각이 참으로 어이없다. 그래서 그런지 자기네들 집부터 지붕을 뜯어내라고 하시는 성선생님의 말씀이 와 닿는다. 당연한 얘기지만 전실 전각이 있으면 백호에 비치는 햇살은 다 허구이다.(물론 일제시대에는 전실 전각이 허물어졌기 때문에 백호에 햇살이 어쩌구저쩌구란 글을 지어낼 수 있었겠고 그것을 총독부가 선전·통치용으로 이용했지만 석굴암이 원래 그랬던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토함산석굴중수상동문1891년 석굴암의 전실 전각을 중창하고 남긴 것이다 ⓒ 한봉희


다른 한쪽 전시실에는 나의 두 번째 기억을 위로해주는 사진들이 실재 석굴암과 유사하게 배치(전실-비도-주실)되어 있었다. 실재 조각을 보는 듯한 사진 자체의 크기와 아름다움은 내가 경주 석굴암의 내부에 들어와 있다는 상상력을 동원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문화재는 당연히 보호되어야 한다. 더군다나 유네스코에 등록될 만큼 가치있는 문화재라면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지만 그런 문화재일수록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느끼게 해야 하는 게 또 한 축이다. 최소한, 우리의 마음을 톡톡 건드리는 석공의 그 예술적 손길과 불교경전으로써 중생들을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하는 김대성님을 비롯한 신라인들의 상징체계들과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말이다.

사진만으로 꾸며논 석굴암 안에 들어와도 이리 좋은 걸 보면, 힘들게 올라간 석굴암에서 유리벽만 보고 오는 허무함을 조금이라도 위로해줄 어떤 조치가 필요할 것 같았다. 개인적인 생각으론 석굴암 경내 근처에 유사 공간을 만들어 문화재를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석굴암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했으면 하는 소망이다.

석굴암에 대한 반성

석굴암 본존불사진가 안장헌님의 사진을 전시회에서 허락하에 재촬영함 ⓒ 한봉희


석굴암 원형논쟁에서 알 수 있듯이 성낙주 선생님은 기존의 문화권력들과 지난한 싸움을 하고 계신 것 같았다. 그것은 석굴암을 위한 싸움처럼 보였다. 신라인의 지극한 마음이기도 한 석굴암 본연의 마음에 근접하고자 하는 싸움으로 보였다. 여기에 언급한 것 말고도 석굴암에 관하여 많은 것들이 기존권력에 의해 왜곡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안다. 한 술 간만 보는 것으로도 그 음식의 전체 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을. 또한 나이를 먹어가면서 우리들은 안다. 기존의 거대권력과 싸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를. 그런 생각으로 보면 지칠 법도 하신데 오히려 더 열정적으로 보였다. 세상에는 아직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들이 많이 있다. 단지 현상으로 드러난 것들(권력자들이 제공하는)을 무방비상태로 그대로 받아들이며 살고 있는 마음의 안이함을 반성할 일이다.

어린 세대들은 어쩔 수 없이 기존 세대와 그 결과물들에 의해 교육을 받고 자란다. 어릴 적 각인된 기억은 때론 개인의 평생을 좌우하기도 한다. 그래서 어미새가 무엇을 물어다 주느냐에 따라 새끼새의 양육이 결정되듯이, 어린 시절 우리들이 어떤 사람에게 어떤 교육을 받느냐가 그만큼 중요할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면 어린 시절 내 기억은 얼마나 건강할 것인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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