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놀잇배를 타고 뱃놀일 즐길 때 부르던 노랫소리가 귓가로 다가왔다. 아, 저곳이 예성강인가. 아니면 한강인가. 마음은 어느새 짙푸른 바다 한가운데로 달려갔으나 머리가 윙윙거리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죽은 것인가?'
이를 악문채 손발을 움직여도 그것은 생각뿐 어느 곳 하나 끄떡할 수 없었다. 답답하리 만큼의 조용한 적막을 깨뜨리고 코끝에 날아든 건 감미로운 훈향이었다.
겨우 실눈을 뜨자 흐릿한 사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마를 푸른 비단으로 동여맨 사내와 자신에게 고문을 가한 갈건을 쓴 침술사였다. 곁에는 자신의 얼굴에서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지분거리는 스물 남짓의 처녀가 있었다. 눈을 뜨자 주인으로 뵈는 사내가 반색했다.
"이주부 손끝이 예리해 변을 당한 줄 알고 몹시 놀랐소이다. 심하게 다룬 건 공의 뜻을 알아보려는 것이니 서운해 마시오. 이틀 쯤 조섭 하면 가뿐히 일어나리니 달리 걱정 마시오."
사내는 걸쭉하게 웃고 나서 자신을 소개했다.
"공께서도 알다시피 고려의 성중관은 어느 한쪽에 쏠려있지 않습니다. 왕태사가 우리 집안을 찾아와 잃어버린 나랄 재건해 달라고 자금을 마련한 탓에 별시위에 몸담은 선조의 은덕으로 이곳 육의전 상권을 손에 쥐었소이다. 이 일엔 강상원(康尙元) 나으리가 큰 힘이 됐지만, 죽은 강비가 묻힌 정릉이 파헤쳐지고 황화방 북원(皇華坊北原)에서 양주 땅으로 옮겨가자 강상원 나으린 한을 품은 채 자진했습니다. 나으리께선 어떻게든 궁안을 쑥밭으로 만들어 달라는 유언이었지만 방법을 찾지 못한 채 4백년을 흘러왔습니다. 얼마 전 왕태사가 남긴 서찰을 우연히 보게 돼 이렇듯 공을 모시게 됐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강윤경(康允景)이라 밝힌 사내는 쉰은 덜돼 보이는 낯으로 신덕왕후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일이지만 사람의 마음이 어찌 변했는질 알 수 없어 마뜩치 않은 실수를 하게 될까 염려스러웠습니다. 예전의 일만 생각해 무작정 상대를 믿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라 여겨 무례를 범했습니다. 얼마 전 왕태사가 남긴 재물함(財物函)을 열어 그곳에 있는 글을 읽고 공을 찾아 나섰습니다. 생각해온 것들이 모두 준비됐으니 이젠 강비를 비롯해 고려 왕실의 한까지 풀 수 있으리라 봅니다. 몸이 완쾌될 때까지 푹 쉬면서 좋은 계책을 일러 주십시오."
모두들 물러가자 사내는 생각을 곱씹었다. 고려가 망한 지 4백년이 지났는데 새삼스럽게 고려의 부흥운동을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지금은 정조 15년의 가을이 아닌가. 고려 부흥을 일깨우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다. 자신이 옛 왕조의 영화를 말할 때엔 흔적조차 잊어야 하는 게 고려 왕조였다.
'그동안 인왕산이나 청계천의 위항을 멀리 하고 살꽂이벌에서 서책을 가까이 하며 지내왔다. 내가 무엇을 하며 지내왔는지를 전하께선 묻지 않으셨다.'
그의 선조가 왕씨인 것은 전해오는 귀엣말로 알 수 있었지만 보다 더 안전을 기하기 위해 성을 전(田)으로 바꿨다가 양반의 피를 받은 기녀의 후손으로 변신했다.
그렇다 보니 행세께나 하는 김씨 성을 쓰는 자의 서얼(庶孼)로 족보를 만들고 두 해 전의 과시(科試)를 거쳐 관직에 나간 건 금년 봄이었다. 최말단인 승정원 서리(書吏)였는데 단오가 지난 열이렛날 규장각으로 전보돼 이곳의 실무자 검서관(檢書官)을 보좌해 오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각신(閣臣)이라 불렀지만 그건 아니었다.
각신은 종1품에서 참하관에 이르기까지 노소 여섯 명으로 삼사보다 청요직(淸要職)으로 인정받았는데 이들은 승지 이상으로 대우 받았고 당직을 할 땐 조석으로 왕에게 문안했다.
그런 이유로 '신하와 왕의 대화' 때엔 사관으로 왕의 언동을 기록했으며 관리를 선발할 때는 '강(講)'을 맡는 시관이 됐고 경연관으로 전하와 정사를 토론하고 교서 등을 대리 찬술했다. 특히 정조 때는 <내각일력(內閣日曆)>을 기록했다.
선대왕 때와는 달리 규장각엔 두 명의 제학(提學)이 있었다. 송나라의 비서각(秘書閣)을 본뜬 명예로운 관직으로, 이조에서 추천하면 대제학의 동의를 얻어 임명됐다. 이 제학을 규장각에선 각신이라 한 것이다. 사내는 자신을 향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김일경(金一慶). 점쟁이가 신년 초에 내 운수를 구름 속에 비(碑)를 세운다 했는데 그게 이뤄진 것인가. 아니면 허망한 개꿈인가? 머지않아 귀인을 만난다는 점쟁이의 말이 길인가, 흉인가?'
사내는 품속을 더듬어 호랑이 발톱 노리개를 꺼내 망연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마방(馬房)에 오기 전 최주서(崔注書)의 부름을 받아었다. 그는 정원이라 부르는 승정원의 정7품직으로 자신보다 한 단계 윗전이었다.
승정원의 직제는 도승지를 비롯해 여섯 명의 승지가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정3품의 당상관으로 그 밑에 왕명 출납에 관한 것을 기록하는 정7품의 주서 2인과 스물여덟 명의 서리가 있었다. 규장각으로 자리를 옮긴 지 반년만이라 만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보게 김서리. 자네가 전하의 눈에 들어 규장각에 갔으니 내 부탁 하나 들어주게."
"말씀하십시오."
"전하께선 보위에 오르신 일곱 해부터(1783년) 조선의 옛기록을 더듬어 '정령형상(政令刑賞)'을 기록하신 모양이야. 전하의 시대에 있었던 건 각신들의 손이 필요할 것이지만 그 이전의 기록들은 자네와 같은 서리들 손을 타고 있으리라 보네."
"그렇지요."
각신에 의해 정리된 정령형상은 왕이 친히 첨삭한 뒤 등사를 하여 반포됐다. 지난 정조 5년(1781)엔 서호수(徐浩修)라는 각신이 3만여권의 <규장총목(奎章總目)>을 간행했다.
이것이 규장각 도서의 기원이 됐지만 당시엔 '벌을 내리고 상을 주는' 정령행상의 간행에 대해 벽파 중신들이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눈을 치켜 뜬 상태였다. 이런 때에 최주서는 달갑지 않은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규장각 직각(直閣)으로 오게 된 윤창하(尹彰河)가 제 날짜에 등청하지 못하면 자넨 그 자의 서랍을 열어 붉은 띠로 묶은 기록들을 내게 전해 주게."
"무슨 일이신지?"
"자넨 알 것 없네. 이번 과시가 끝나고 살꽂이벌에 전하가 납시어 강무를 펼치면, 자넨 규장각에 들어가 윤창하가 준비해 온 붉은 천에 묶은 기록들을 챙겨 놓게. 그 기록은 나라의 존망을 해치는 것보다 한 가문을 수치로 몰아넣는 것이니 전하의 손에 올려선 아니 되네. 자네가 공을 세우면 대비마마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을 것이네."
직각은 규장각의 최고 책임자였다. 정조가 보위에 올라 규장각을 설치할 때 제학이나 직제학, 대교 등과 함께 설치됐었다. 다른 관청의 중요관직으로 재임했던 제학이나 직제학과는 달리 직각은 홍문관에 근무했던 참상관으로 선발되었다.
윤창하에 대한 천기(薦記)를 읽은 이조에서 각신들이 점수를 줘 순위를 매긴 걸 참조했으니 실직(實職)된 것이고 젊은 문관 윤창하의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약용의 준마가 달려간 곳은 뚝도(纛島)라는 곳으로 나중에 뚝섬으로 바뀐 살꽂이벌의 동쪽 관문인 동교(東郊)였다.
동쪽 벌판엔 병사들을 사열하는 곳이기에 비교적 황량했지만 마장문이 있는 이곳 가까이 윤창하의 집이 있었다. 한때 성균관에서 학문을 논했을 친분이니 불쑥 찾아온 게 이상해 보이진 않았다.
해묵은 팽나무에 고삐를 묶고 안으로 들어섰으나 기척이 없었다. 보통 때라면 당연히 '이리 오너라!' 했을 것이지만 좀 더 친분을 나타내려는 것이었는지 정약용은 목소릴 낮췄다.
"이 사람 청암(淸岩)!"
아무 기척이 없다. 그의 아호를 다정히 불렀어도 뛰쳐나올 기미가 없었다. 겉문의 지도리를 당겨 안으로 들어서던 정약용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방안 위쪽으로 낡은 서안(書案)이 놓이고 그 오른쪽으로 해묵은 기록들이 쌓여 있었다.
윤창하는 안면을 상에 댄 체 고꾸라져 있었다. 식솔들은 도성 안에 있었고, 이곳은 교우들과 덕담을 나누는 장소로 세상의 명리와는 담을 쌓은 장소였다. 홀로 있는 걸 즐긴 탓에 이렇게 나와 있어도 성격 탓이라고 여긴 식구들이었다.
윤창하는 이미 입과 눈이 열리고 전신은 검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입과 코, 눈에서 흐른 검붉은 피는 이미 검게 퇴색한 채 굳어 있었다.
손톱과 발톱도 검은 색으로 변한 채 피부는 갈라져 있었고 수염은 들떠 씻을 수가 없었지만 죽기 전에 오물을 토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극독에 중독돼 단숨에 치사한 것으로 판단됐다.
독약을 먹은 경우, 즉시 발작하거나 또는 당일 늦게 발작하거나 조만간에 발작하는 데 약의 성질이 완만하면 하루나 이틀 사이 발작한다.
보통은 의복 위에 구토로 인한 약물을 찾아내고 죽은 자가 머물던 곳에서 약물과 그릇을 찾아야 했으나 없었다. 구토 흔적이나 약물 넣은 그릇도 보이지 않았다.
정약용은 서안(書案) 한쪽에 놓인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연산주와 장녹수 사건을 다룬 <호중록(壺中錄)>의 기록이었다. 옆으로 밀치자 붉은 끈이 서안 아래로 떨어졌다.
길이가 짧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내용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생각됐으나 묶은 기록들은 이미 어디로 사라진 후였다.
[주]
∎서안(書案) ; 책상
∎정령형상(政令刑賞) ; 규장각 총서를 기록한 내용
∎호중록(壺中錄) ; 항아리 속에 든 기록
'내가 죽은 것인가?'
겨우 실눈을 뜨자 흐릿한 사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마를 푸른 비단으로 동여맨 사내와 자신에게 고문을 가한 갈건을 쓴 침술사였다. 곁에는 자신의 얼굴에서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지분거리는 스물 남짓의 처녀가 있었다. 눈을 뜨자 주인으로 뵈는 사내가 반색했다.
"이주부 손끝이 예리해 변을 당한 줄 알고 몹시 놀랐소이다. 심하게 다룬 건 공의 뜻을 알아보려는 것이니 서운해 마시오. 이틀 쯤 조섭 하면 가뿐히 일어나리니 달리 걱정 마시오."
사내는 걸쭉하게 웃고 나서 자신을 소개했다.
"공께서도 알다시피 고려의 성중관은 어느 한쪽에 쏠려있지 않습니다. 왕태사가 우리 집안을 찾아와 잃어버린 나랄 재건해 달라고 자금을 마련한 탓에 별시위에 몸담은 선조의 은덕으로 이곳 육의전 상권을 손에 쥐었소이다. 이 일엔 강상원(康尙元) 나으리가 큰 힘이 됐지만, 죽은 강비가 묻힌 정릉이 파헤쳐지고 황화방 북원(皇華坊北原)에서 양주 땅으로 옮겨가자 강상원 나으린 한을 품은 채 자진했습니다. 나으리께선 어떻게든 궁안을 쑥밭으로 만들어 달라는 유언이었지만 방법을 찾지 못한 채 4백년을 흘러왔습니다. 얼마 전 왕태사가 남긴 서찰을 우연히 보게 돼 이렇듯 공을 모시게 됐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강윤경(康允景)이라 밝힌 사내는 쉰은 덜돼 보이는 낯으로 신덕왕후의 후손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오랫동안 준비해온 일이지만 사람의 마음이 어찌 변했는질 알 수 없어 마뜩치 않은 실수를 하게 될까 염려스러웠습니다. 예전의 일만 생각해 무작정 상대를 믿는 건 너무 위험한 일이라 여겨 무례를 범했습니다. 얼마 전 왕태사가 남긴 재물함(財物函)을 열어 그곳에 있는 글을 읽고 공을 찾아 나섰습니다. 생각해온 것들이 모두 준비됐으니 이젠 강비를 비롯해 고려 왕실의 한까지 풀 수 있으리라 봅니다. 몸이 완쾌될 때까지 푹 쉬면서 좋은 계책을 일러 주십시오."
모두들 물러가자 사내는 생각을 곱씹었다. 고려가 망한 지 4백년이 지났는데 새삼스럽게 고려의 부흥운동을 말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지금은 정조 15년의 가을이 아닌가. 고려 부흥을 일깨우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다. 자신이 옛 왕조의 영화를 말할 때엔 흔적조차 잊어야 하는 게 고려 왕조였다.
'그동안 인왕산이나 청계천의 위항을 멀리 하고 살꽂이벌에서 서책을 가까이 하며 지내왔다. 내가 무엇을 하며 지내왔는지를 전하께선 묻지 않으셨다.'
그의 선조가 왕씨인 것은 전해오는 귀엣말로 알 수 있었지만 보다 더 안전을 기하기 위해 성을 전(田)으로 바꿨다가 양반의 피를 받은 기녀의 후손으로 변신했다.
그렇다 보니 행세께나 하는 김씨 성을 쓰는 자의 서얼(庶孼)로 족보를 만들고 두 해 전의 과시(科試)를 거쳐 관직에 나간 건 금년 봄이었다. 최말단인 승정원 서리(書吏)였는데 단오가 지난 열이렛날 규장각으로 전보돼 이곳의 실무자 검서관(檢書官)을 보좌해 오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각신(閣臣)이라 불렀지만 그건 아니었다.
각신은 종1품에서 참하관에 이르기까지 노소 여섯 명으로 삼사보다 청요직(淸要職)으로 인정받았는데 이들은 승지 이상으로 대우 받았고 당직을 할 땐 조석으로 왕에게 문안했다.
그런 이유로 '신하와 왕의 대화' 때엔 사관으로 왕의 언동을 기록했으며 관리를 선발할 때는 '강(講)'을 맡는 시관이 됐고 경연관으로 전하와 정사를 토론하고 교서 등을 대리 찬술했다. 특히 정조 때는 <내각일력(內閣日曆)>을 기록했다.
선대왕 때와는 달리 규장각엔 두 명의 제학(提學)이 있었다. 송나라의 비서각(秘書閣)을 본뜬 명예로운 관직으로, 이조에서 추천하면 대제학의 동의를 얻어 임명됐다. 이 제학을 규장각에선 각신이라 한 것이다. 사내는 자신을 향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김일경(金一慶). 점쟁이가 신년 초에 내 운수를 구름 속에 비(碑)를 세운다 했는데 그게 이뤄진 것인가. 아니면 허망한 개꿈인가? 머지않아 귀인을 만난다는 점쟁이의 말이 길인가, 흉인가?'
사내는 품속을 더듬어 호랑이 발톱 노리개를 꺼내 망연히 바라보았다. 자신이 마방(馬房)에 오기 전 최주서(崔注書)의 부름을 받아었다. 그는 정원이라 부르는 승정원의 정7품직으로 자신보다 한 단계 윗전이었다.
승정원의 직제는 도승지를 비롯해 여섯 명의 승지가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정3품의 당상관으로 그 밑에 왕명 출납에 관한 것을 기록하는 정7품의 주서 2인과 스물여덟 명의 서리가 있었다. 규장각으로 자리를 옮긴 지 반년만이라 만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보게 김서리. 자네가 전하의 눈에 들어 규장각에 갔으니 내 부탁 하나 들어주게."
"말씀하십시오."
"전하께선 보위에 오르신 일곱 해부터(1783년) 조선의 옛기록을 더듬어 '정령형상(政令刑賞)'을 기록하신 모양이야. 전하의 시대에 있었던 건 각신들의 손이 필요할 것이지만 그 이전의 기록들은 자네와 같은 서리들 손을 타고 있으리라 보네."
"그렇지요."
각신에 의해 정리된 정령형상은 왕이 친히 첨삭한 뒤 등사를 하여 반포됐다. 지난 정조 5년(1781)엔 서호수(徐浩修)라는 각신이 3만여권의 <규장총목(奎章總目)>을 간행했다.
이것이 규장각 도서의 기원이 됐지만 당시엔 '벌을 내리고 상을 주는' 정령행상의 간행에 대해 벽파 중신들이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눈을 치켜 뜬 상태였다. 이런 때에 최주서는 달갑지 않은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이번에 규장각 직각(直閣)으로 오게 된 윤창하(尹彰河)가 제 날짜에 등청하지 못하면 자넨 그 자의 서랍을 열어 붉은 띠로 묶은 기록들을 내게 전해 주게."
"무슨 일이신지?"
"자넨 알 것 없네. 이번 과시가 끝나고 살꽂이벌에 전하가 납시어 강무를 펼치면, 자넨 규장각에 들어가 윤창하가 준비해 온 붉은 천에 묶은 기록들을 챙겨 놓게. 그 기록은 나라의 존망을 해치는 것보다 한 가문을 수치로 몰아넣는 것이니 전하의 손에 올려선 아니 되네. 자네가 공을 세우면 대비마마의 각별한 보살핌이 있을 것이네."
직각은 규장각의 최고 책임자였다. 정조가 보위에 올라 규장각을 설치할 때 제학이나 직제학, 대교 등과 함께 설치됐었다. 다른 관청의 중요관직으로 재임했던 제학이나 직제학과는 달리 직각은 홍문관에 근무했던 참상관으로 선발되었다.
윤창하에 대한 천기(薦記)를 읽은 이조에서 각신들이 점수를 줘 순위를 매긴 걸 참조했으니 실직(實職)된 것이고 젊은 문관 윤창하의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약용의 준마가 달려간 곳은 뚝도(纛島)라는 곳으로 나중에 뚝섬으로 바뀐 살꽂이벌의 동쪽 관문인 동교(東郊)였다.
동쪽 벌판엔 병사들을 사열하는 곳이기에 비교적 황량했지만 마장문이 있는 이곳 가까이 윤창하의 집이 있었다. 한때 성균관에서 학문을 논했을 친분이니 불쑥 찾아온 게 이상해 보이진 않았다.
해묵은 팽나무에 고삐를 묶고 안으로 들어섰으나 기척이 없었다. 보통 때라면 당연히 '이리 오너라!' 했을 것이지만 좀 더 친분을 나타내려는 것이었는지 정약용은 목소릴 낮췄다.
"이 사람 청암(淸岩)!"
아무 기척이 없다. 그의 아호를 다정히 불렀어도 뛰쳐나올 기미가 없었다. 겉문의 지도리를 당겨 안으로 들어서던 정약용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방안 위쪽으로 낡은 서안(書案)이 놓이고 그 오른쪽으로 해묵은 기록들이 쌓여 있었다.
윤창하는 안면을 상에 댄 체 고꾸라져 있었다. 식솔들은 도성 안에 있었고, 이곳은 교우들과 덕담을 나누는 장소로 세상의 명리와는 담을 쌓은 장소였다. 홀로 있는 걸 즐긴 탓에 이렇게 나와 있어도 성격 탓이라고 여긴 식구들이었다.
윤창하는 이미 입과 눈이 열리고 전신은 검게 부어오르고 있었다. 입과 코, 눈에서 흐른 검붉은 피는 이미 검게 퇴색한 채 굳어 있었다.
손톱과 발톱도 검은 색으로 변한 채 피부는 갈라져 있었고 수염은 들떠 씻을 수가 없었지만 죽기 전에 오물을 토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극독에 중독돼 단숨에 치사한 것으로 판단됐다.
독약을 먹은 경우, 즉시 발작하거나 또는 당일 늦게 발작하거나 조만간에 발작하는 데 약의 성질이 완만하면 하루나 이틀 사이 발작한다.
보통은 의복 위에 구토로 인한 약물을 찾아내고 죽은 자가 머물던 곳에서 약물과 그릇을 찾아야 했으나 없었다. 구토 흔적이나 약물 넣은 그릇도 보이지 않았다.
정약용은 서안(書案) 한쪽에 놓인 기록들을 살펴보았다. 그것은 연산주와 장녹수 사건을 다룬 <호중록(壺中錄)>의 기록이었다. 옆으로 밀치자 붉은 끈이 서안 아래로 떨어졌다.
길이가 짧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내용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생각됐으나 묶은 기록들은 이미 어디로 사라진 후였다.
[주]
∎서안(書案) ; 책상
∎정령형상(政令刑賞) ; 규장각 총서를 기록한 내용
∎호중록(壺中錄) ; 항아리 속에 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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