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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는 왜 '국보'가 없을까

역사유적과 문화유산 답사로 보는 '대구의 풍경' (9)

등록|2011.01.14 20:02 수정|2011.01.17 09:25

비산동 출토 금동관청동기 시대, 대구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거주한 곳은 지금의 비산동, 평리동 일대이다. 비산동 고분군에서는 금관동 등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국보로 지정되었고 삼성의 리움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사진은 대구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복제품이다. ⓒ 정만진


문화재청 홈페이지에서 확인해 보면 우리나라에는 '국보'가 315호까지 있다. 제 1호는 서울 숭례문이고, 제 315호는 경북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탑비(塔碑)이다. 불에 타고 없는 숭례문은 여전히 국보 1호로 등재되어 있지만, 복원되어도 그저 서울시가 지정하는 등록문화재 정도에 불과할 터, 국보의 숫자는 314호로 줄어들 게 뻔하다. 물론 새로 지정되는 국보가 있으면 그 수는 늘어나겠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대구에는 국보가 없다. 문화재청의 정의에 따르면 '국보는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인데, 대구에는 세계에 내놓을 만한 국가적 보물이 없다. 본디 대구땅에 있었는데 국립박물관 등 타지로 옮겨져 보관되고 있는 것도 단 하나뿐이다. 청동기 시대 대구 지역 최강의 세력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여겨지는 비산동에서 출토된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 유물들이다.

'대구 비산동 청동기 일괄' 유물은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을 보러 서울까지 갈 사람은 대구만이 아니라 전국에서도 그 분야 연구자 몇 명을 제외하면 없을 터이니, 대구에는 국보가 '없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니리라. (복제품은 대구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대구 앞산 안일사 뒤 왕굴고려 태조 왕건은 팔공산 아래 파군재에서 견훤 군대에 대패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한다. 도망쳐 숨어 있던 곳이 바로 지금의 대구앞산 안일사 뒤쪽 왕굴. 만약 통일신라 초기 신문왕이 서울을 경주에서 대구로 옮기려 한 계획이 성사되었더라면 왕건은 물론 신라, 우리나라의 역사는 아주 바뀌었을 것이다. ⓒ 정만진


대구에는 왜 국보가 없을까? 국보가 두드러지게 많이 있는 곳을 보면 국립중앙박물관(서울 용산구), 국립경주박물관(경북 경주), 국립공주박물관(충남 공주), 그리고 대한불교조계종의 불교중앙박물관(서울 종로구), 해인사(경남 합천), 리움미술관(서울 용산구) 등이다. 조선의 도읍이었던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 신라 천년의 변함없는 서울이었던 경주에 있는 국립경주박물관,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에 있는 국립공주박물관, 불교의 저력을 보여주는 불교중앙박물관과 해인사, 삼성의 리움박물관에  국보가 많이 있는 것은 그 까닭을 생각해볼 필요도 없는 일이다.

부산은 대구보다 더 큰 도시이지만 국보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김해의 금관가야가 맹위를 떨치던 철기시대에도 부산은 그저 작은 어촌마을에 불과했고, 아직 구석기 유물이 출토된 적이 없는 것은 물론 (신석기 유물의 출토는 있었으나) 청동기 유물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넘쳐 흐른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청동기 유물이 많은 대구에 비해 역사적 발전은 매우 늦었던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대구직할시가 1982년에 발간한 <대구의 향기>는 대구의 특징적 현상을 거론하면서 '청동기 유물이 많이 나온다'를 들고 있다.)

부산에 비해 역사 발전이 크게 빠른 대구에, 그렇다면 왜 국보가 없을까. 대구에도 서울이나 공주처럼 국보가 무진장 존재할 뻔한 기회는 있었다. 바로 689년(신문왕 9)의 일이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에 따르면, 통일신라를 건설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인 신문왕 초기에 왕은 서울을 달구벌로 옮기려고[移都] 계획했으나[欲] 성사시키지 못했다[未果]. <삼국사기>는 신문왕이 천도를 앞두고 지금의 경산에도 행차를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달구벌 천도 관련 기사
<삼국사기>에 나오는 신문왕의 달구벌 천도 관련 기사 원문는 '幸獐山城 築西原京城 王欲移都達句伐 未果'이다. 장산성은 지금의 경산시, 달구벌은 대구 지역을 가리킨다. 한문은 (왕이 재위 9년 윤달 9월 26일에) 장산성으로 행(幸)차하였으며, 서원경성을 쌓[築]았고, 서울[都]을 달구벌로 옮[移]기려 했으나 성과(果)가 없었다[未]는 뜻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문왕의 천도 계획이 어떤 경과를 거쳐 어떻게 성사되지 못했는가에 대해서는 언급이 되어 있지 않다.
신문왕이 지방을 순행한 곳은 대체로 문무왕의 뼈가 뿌려진 산골처(散骨處)인 동해안 일대였다고 한다. 장산성 행차는 특별한 예외였던 것이다. 왕은 왜 동해안과는 정반대인 경산으로 행차를 하였을까. 그 행차에는 어떤 특별한 정치적 목적이 내재되어 있었을까.

<대구시사>는 신문왕이 달구벌 천도 계획을 앞두고 예비답사를 한 것으로 본다. 분지여서 별도의 나성(羅城, 내성인 왕궁 바깥을 에워싸는 외성)을 쌓지 않아도 산성을 활용하여 방어에 유리한 점과, 육로교통의 요지일 뿐만 아니라 낙동강 수로도 원활하게 이용할 수 있는 달구벌의 지리적 장점에 지목한 왕은 새 서울로 대구 지역을 지목하였지만, 경주에 뿌리를 내리고 오랫동안 기득권을 누리며 살아온 귀족 집단의 강력한 반발 때문에 결국 천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신문왕의 달구벌 천도가 실현되었다면 지금 대구는 어떤 모습일까. 고구려의 평양 천도, 자의는 아니었지만 백제의 부여․공주 천도처럼 신라도 대구로 서울을 옮겼다면? 아마 대구는 지금과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을 것이다. 조선 시대 선조 때 들어서야 경상감영이 설치되고, 영조 때에야 대구읍성이 축성되는 수준이 아닌, 그래서 국보 하나도 남기지 못한 차원이 아닌, 통일신라 초창기부터 국가의 수도로 번창하기 시작하였으면 대구는 과연 얼마나 활기차게 자라났을까. 골목골목 국보와 보물이 빛나는 문화도시, 정치와 경제의 국가적  중심도시로서 나라의 윤택함이 한곳에 모인 세계적 명소가 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대구에는 지금, 국보가 없다. 경북 구미에서 출토된 불상 셋을 간신히 옮겨와 가까스로 '국립'이라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국립대구박물관의 소장품을 제외한다면 정말 하나도 없다. 신문왕이여, 천도의 꿈을 이루셨더라면 정말 좋았을 것을, 어찌 미과(未果)하고 마셨는지요?

경북 구미 출토 대구박물관 보관 국보 3점가장 왼쪽이 국보 182호인 금동불입상(金銅佛立像, 8세기초)이다. 그 다음의 둘은 183호와 184호인 금동관음보살입상(7세기)이다. 모두 신라의 것이며, 경북 구미시 봉한동 출토 유물이다. ⓒ 정만진


대구에 남았던 마지막 국보 '대구읍성'

1888년 가을, 프랑스인 여행가 샤를 바라(1842~1893)가 한양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대구를 찾는다. 그는 뒷날 프랑스로 돌아가 <조선기행>이라는 글을 발표하고, 다시 책으로 묶어낸다(2001년, 눈빛출판사 번역 출간). 그 책에서 그는 대구읍성을 북경성을 축소한 것과 같이 아름다웠다고 갈파한다.

바라에 따르면 대구읍성의 성벽은 도시 전체를 감싸는 평행사변형이었고, 사방 성벽에는 웅장한 성문이 서 있었다. 성문의 정자에는 옛 역사를 나타내는 그림과 조각들이 가득했다. 바라는 '성문의 정자에서 나는 가을 햇볕 아래 찬란한 색채를 빛내며 전원을 휘감아 흐르는 금호강의 낙조를 지켜보았다. 내 발 아래로 큰 도시의 길과 관사들이 펼쳐져 있었다. 서민들이 사는 구역에는 초가지붕이 이마를 맞대고 있고, 양반들이 사는 중심부에는 우아한 지붕의 집들이 늘어서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만약 대구읍성이 지금도 남아 있다면 틀림없이 국보의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국보 하나 없는 대구의 초라함은 모면할 수 있었을 텐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렇게 된 건 누구 때문일까. 대구읍성은 친일파 박중양 등이 중심에 서서 1907년에 붕괴시켰다. 조정이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박중양 등 친일파들은 성곽을 없앰으로써 장사에 도움을 얻으려는 일본인들의 부탁에 적극 호응하여 그같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러고도 박중양은 처벌은커녕 이토 히로부미의 지원을 받아 오히려 승승장구 매국 출세를 거듭했다. 일제의 침략과 친일파의 준동이 대구에 남아 있던 마지막 국보급 문화유산을 없애버린 역사적 사실과, 지금도 여전한 친일 미청산 문제를 바라보며 우리는 오늘도 가슴이 아프다.

대구읍성 일부의 복원된 모습그러나 복원 수준이 낮고, 새로 자리잡은 위치도 본래 읍성과 아무 상관이 없는 대구 외곽지여서 복원의 의미가 반감되고 말았다. ⓒ 정만진


문화재청 홈페이지의 '문화재의 종류' 설명
문화재는 국가지정문화재, 시도지정문화재, 문화재자료, 등록문화재. 비지정문화재로 구분된다.

국가지정문화재는 문화재청장이 문화재보호법에 의하여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지정한 중요문화재로서 국보, 보물, 사적, 명승, 천연기념물, 중요무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등 7개 유형으로 구분된다.

* 국보
보물에 해당하는 문화재 중 인류문화의 견지에서 그 가치가 크고 유례가 드문 것 ▷ 서울숭례문, 훈민정음 등
* 보물
건조물·전적·서적·고문서·회화·조각·공예품·고고자료·무구 등의 유형문화재 중 중요한 것 ▷ 서울흥인지문, 대동여지도 등
* 사적
기념물 중 유적·제사·신앙·정치·국방·산업·교통·토목·교육·사회사업·분묘·비 등으로서 중요한 것 ▷ 수원화성, 경주포석정지 등
* 명승
기념물 중 경승지로서 중요한 것 ▷ 명주청학동의소금강, 상백도하백도일원 등
* 천연기념물
기념물 중 동물(서식지·번식지·도래지 포함), 식물(자생지 포함), 지질·광물로서 중요한 것 ▷ 달성의측백수림, 노랑부리백로 등
* 중요무형문화재
연극, 음악, 무용, 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무형문화재 중에서 중요한 것. ▷ 종묘제례악, 양주별산대놀이 등
* 중요민속자료
의식주·생산·생업·교통·운수·통신·교역·사회생활·신앙 민속·예능·오락·유희 등으로서 중요한 것 ▷ 덕온공주당의, 안동하회마을 등

시·도지정문화재는 특별시장·광역시장·도지사(이하 '시·도지사')가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보존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을 지방자치단체(시·도)의 조례에 의하여 지정한 문화재로서 유형문화재·무형문화재·기념물 및 민속자료 등 4개 유형으로 구분된다

* 유형문화재
건조물,전적,서적,고문서,회화,조각,공예품 등 유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상 또는 예술상 가치가 큰 것과 이에 준하는 고고자료
* 무형문화재
연극,음악,무용,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것
* 기념물
패총·고분·성지·궁지·요지·유물포함층 등의 사적지로서 역사상,학술상 가치가 큰 것. 경승지로서 예술상,관람상 가치가 큰 것 및 동물(서식지,번식지,도래지를 포함한다), 식물(자생지를 포함한다),광물,동굴로서 학술상 가치가 큰 것
* 민속자료
의식주·생업·신앙·연중행사 등에 관한 풍속· 관습과 이에 사용되는 의복·기구·가옥 등으로서 국민생활의 추이를 이해함에 불가결한 것

문화재자료는 시·도지사가 시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향토문화보존상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시·도 조례에 의하여 지정한 문화재를 지칭한다.

등록문화재는 지정문화재가 아닌 근·현대시기에 형성된 건조물 또는 기념이 될 만한 시설물 형태의 문화재 중에서 보존가치가 큰 것을 말함. ▷ 화동 구 경기고교, 태평로 구 국회의사당 등. (근대문화유산의 개념과 범위 - '개화기'를 기점으로 하여 '해방 전후'까지의 기간에 축조된 건조물 및 시설물 형태의 문화재가 중심이 되며, 그 이후 형성된 것일지라도 멸실 훼손의 위험이 크고 보존할 가치가 있을 경우 포함될 수 있음.)

비지정문화재는 문화재보호법 또는 시·도의 조례에 의하여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 중 보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화재를 지칭한다.

일반 동산 문화재
국외 수출 또는 반출 금지 규정이 준용되는 지정되지 아니한 문화재중 동산에 속하는 문화재를 지칭하며 전적·서적·판목· 회화·조각·공예품·고고자료 및 민속자료로서 역사상·예술상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재
매장 문화재
토지·해저 또는 건조물 등에 포장된 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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