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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05회)

미치광이 유학자 <2>

등록|2011.01.18 08:32 수정|2011.01.27 10:12
서과가 금줄을 쳐놓아선지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았으나 서안이 있는 사랑채엔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탓에 음습한 내음이 배어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서안 위쪽 봉창(封窓)의 지도리가 벗겨져 바람을 타며 덜커덕거렸다. 비는 그곳에서 들어온 탓에 창틀 곁엔 고인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가 하면 서책 위엔 이슬이 내린 것처럼 빗방울이 튀겨 몇 권의 서책은 젖어 있었다.

빗물이 번져있는 서안 위를 내려다보던 정약용의 눈이 크게 치뜨였다. 하루 전만 해도 물기가 없어 가볍게 훑어 봤지만 비가 오고 봉창으로 짓쳐들어온 물기가 곳곳에 있고 보니 서안 위는  흐릿한 형태가 나타나 있었다. 예리한 칼끝으로 긋고 그 위에 밀랍한 것이 분명했다.

칼끝으로 그은 부분에 먼지가 끼지 않은 것으로 보아 최근에 어떤 모양을 만든 것으로 물기를 그곳에 보내자 도형은 더욱 또렷해졌다. 그것을 소매 끝으로 닦자 하나의 모양이 나타났다. '정(井)'이었다.

'청암이 남긴 것인가?'

윤창하의 아호가 청암이었다. 그 사람이 남겼다면 깊은 뜻이 있을 것으로 보았다. 당송(唐宋) 시대 이후 어느 유생도 모를 비밀스런 기호가 '정' 자였다.

조선에선 칼끝으로 새긴 이 글자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진 않았기에 윤창하의 심계(心計)를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정약용의 눈길이 문득 서책 쪽으로 향했다. 등나무와 칡덩굴을 엮어 얽은 서가(書架)엔 아무렇게 책을 놓아둔 것 같았으나 일정한 법식을 따르고 있었다.

정약용이 성균관에서 공부할 적에 윤창하는 술자리에서 흥미로운 말을 던지곤 했었다.

"이보시게 사암, 중원인들이 콧대를 세우는 복희팔괘도나 문왕팔괘도 또는 하도나 낙서는 그들이 주장하는 역법에 근거를 둔 것이지만 '홍범구주도'는 다르네."

"홍범구주도라니?"
"우리의 옛 문화지. 당송 시대의 학자들은 '하도'나 '낙서'를 정자 원리에 따라 배열했지만 그들은 '홍범구주도'의 배열 방법관 다르거든."

"흐음."
"홍범구주도는 동삼(東三), 서칠(西七), 남구(南九), 북일(北一)의 기준을 따른다네."

윤창하는 손가락에 술을 묻혀 탁자에 정(井)을 쓰고 동으로 세 번째, 서로 일곱 번째, 남으로 아홉 번째, 북으로 첫 번째를 가리키며 껄껄거렸다.

그때의 일이 생각나서인지 정약용은 세 단으로 얼기설기 엮은 서가를 눈여겨보았다. 서책이 이곳저곳에 흩어진 것으로 보아 남이 알지 못하게 하려는 윤창하의 계책임을 알아낸 것이다. 서책은 여러 권씩 꽂히기 마련이지만 여기엔 하나의 법식이 있었다.

물론 누군가가 만질 수도 있고 책을 흩어놓을 수도 있지만 서책 앞쪽에 거미줄이 쳐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으로 생각돼 홍범구주도의 방위에 따라 책을 헤아렸다.

무더기를 이룬 아홉 군데의 서책에는 큼직한 글자가 붙어 있었다. 동으로 헤아려 세 번째엔 수(手)가 있었고, 서에서 시작하여 일곱 번째엔 행(行), 남쪽부터 헤아려 아홉 번째엔 초(草), 북으로 시작해 첫 번째는 보(報)였다.

'수행초보(手行草報)?'

손으로 풀을 덮는다는 뜻이다. 글구의 뜻은 그러했지만 내용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문득 봉창문으로 시선을 돌리자 빗발이 조금씩 거칠어지며 창문에 몰아치고 있었다. 문이 닫혔지만 문틈엔 빗물이 새어들었다.

언제인가 윤창하 역시 이곳에 서서 창밖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승정원에서 사초를 뒤적이며 벽파가 숨겨놓은 그 무엇을 찾아냈을 때 기쁨보다 두려움이 앞섰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졌다고 느꼈을 때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이보시게 청암, 어찌 말이 없는가. 날 이곳까지 불렀으면 무슨 말이든 해얄 게 아닌가.'

정약용은 스르르 눈 감은 채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으리."

재우쳐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드니 뒤쪽에 서과가 있었다. 집안 곳곳을 살피며 사랑채로 온 그녀는 예기치 않은 일을 끄집어내며 고갤 갸우뚱했다.

"소인이 집 안팎을 살피던 중 가래떡을 만든다는 아낙을 만났습니다. 하온데 그 아낙이 묘한 얘길 하지 않겠습니까."
"묘한 얘기라니?"

"이 댁의 주인이 지난 칠석날 가래떡을 한 말 주문했답니다. 떡을 가져간 건 아낙의 서방으로 금액을 반만 받았기에 오늘 들렸답니다. 소인이 집안을 살펴본 바로는 음식을 해 먹은 적이 없어 보입니다. 아낙의 서방이 오늘 아침 이곳에 왔으나 출입문에 금줄이 쳐 있어, 혹여 그 사람이 신투(神偸)라는 도둑이 아닐까 했답니다."

"신투라니?"
"가난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먹을 것이나 재물을 나눠주는 도둑 말입니다."

"하긴 그렇겠지. 요즘은 어려운 때니 그런 말이 나올 만하지."
"나으리, 떡은 하루만 지나면 딱딱하게 굳어지기 마련입니다. 가래떡을 한 말이나 주문했으니 가까운 친지들을 불러 규장각에 직각으로 도임 받아 잔치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구석 구석을 훑어 봐야 음식을 준비한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허면, 떡은 먹기 위해 준비한 것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집안을 아무리 뒤적여도 떡의 흔적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상한 것은 이 집 주인이 가래떡을 준비할 때 떡의 크기를 그렇게 하되 일체의 문양을 넣지 말라고 했답니다. 떡은 떡인데 작은 목침과 같은 모양이니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서과가 물러가자 정약용은 '정(井)' 자가 새겨진 곳으로 향한 채 오른 손으로 가만히 토닥거렸다. 의혹의 심지에 불이 타오르며 조금 전에 본 글구가 불쑥 떠올랐다.

'수행초보(手行草報).'

왜 이 말을 남겼는지 궁금했다. 몇 번이나 글구를 읊조리다 사랑채를 서성이며 정(井)자와 수행초보를 남긴 이유가 뭔가를 되짚어 생각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머릿속이 맑아지긴 커녕 수만 마리의 벌 떼가 나는 듯 웅웅거리며 혼란스러울 뿐이었다. 정약용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허어, 이 사람 청암. 수수께끼 놀음을 하자고 이곳에 불렀는가. 참으로 야속하이.'

가만히 눈 감은 채 눈자위를 어릿어릿 눌러보았다. 그러던 그의 뇌리에 스쳐가는 게 있었다. 성균관 시절 윤창하와 광장동 남쪽 광나루에 갔을 때 술과 여자로 북적대던 나루터를 돌아보며 술 한 잔에 껄껄대던 그의 모습이 유난히 정겨웠다. 정약용은 그가 고함치던 소리를 떠올렸다.

"모두를 가져야 한다, 모두를!"
'가만.'

'모두를 가져야 한다'는 건 모든 숫자를 합한다는 의미다. 정약용은 정전법 수리에 따라 '동삼 서칠 남구 북일'을 합해 보았다. 스물이었다.

고조선의 정자 원리에 따라 책들이 꽂힌 서가의 중심부에서 스물에 해당하는 책을 뽑으니 그것은 맹교(孟郊)의 <유자음(遊子吟)>이었다. 서책을 펼쳐들었다.

자애로운 어머니가 나들이 떠나는 아들의 옷을 짓기 위해 바느질 하는데
나그네 길에 옷이 해어지지 않도록
실로 촘촘히 꿰매고 있다
그려면서도 마음속으론 자식이 나들이에서 늦게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하신다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은 춘삼월 햇볕과도 같은데
한 치 풀과도 같은 자식의 마음으로 어찌 보답할 수 있으랴

정약용은 손바닥을 탁 쳤다. 윤창하가 뭔가를 숨긴 장소를 알아낸 것이다. 청암은 자신이 남겨야 하는 것을 정전법 원리에 따라 숨긴 곳이다. '수행초보'는 맹교의 <유자음>과 정전법 원리인 '동3 서7 남9 북1'을 접목시켜 만들어낸 글자였다.

맹교의 책을 뽑아들고 벽을 가만 가만 두드렸으나 특별한 반향이 없었다. 청암은 죽기 전, 가래떡 크기로 떡을 주문했다고 했다.

'그것을 돌 쌓듯 놓을 곳은 벽이 아닌가? 벽의 중앙을 떡으로 쌓고 그 곳에 뭔가를 숨기고 벽지를 발랐다면···.'

염분이 많은 떡을 뜯어내자 푸르스름한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철상자가 있는 중앙엔 하루 전에 쓴 것처럼 밀지는 단아하게 놓여있었다. 거기엔 뜻밖의 기록이 방문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본시 중원인들은 허장성세가 심해 손 안에 사물을 쥐고서도 아니라고 우기는 게 태반이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나라를 열었고, 중국 최초의 국가 하(夏)나라는 기원전 2208년에 세워졌다. 그렇다보니 중국의 개국은 130년이나 늦다. 이 점을 만회하기 위해 중국인들은 역사를 조작했는데, 그 원흉은 <춘추(春秋)>를 저술한 공자(孔子)다. 그러니 유교에 물든 조선은 어찌해야 좋은가.>

[주]
∎봉창(封窓) ; 집안에 작게 낸 창
∎홍범구주(洪範九疇) ; 고조선의 이륜으로 사용한 서책
∎춘추(春秋) ; 역사를 조작하기 위해 공자가 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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