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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습관병'은 개인 책임이다... 진짜?

노곤한 일상에서 깨달은 '빈곤한 이들의 건강권'

등록|2011.01.19 10:16 수정|2011.01.19 10:16
예전에 '만석꾼 며느리 뽑기'(?)란 해학극을 본 적이 있다.  오래 전 일이라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느 만석꾼이 한달에 10냥 정도의 돈을 주고 그 돈으로 한달을 살아내는 규수를 며느리로 뽑겠다는 공고를 한다. 전국 각지에서 희망자가 쇄도했고 야심 찬 도전을 시도하지만, 그 누구도 한달을 견뎌내지 못하고 실패한다. 시간은 흘러가는데 마땅한 규수는 없고 만석꾼의 아내와 아들은 초조해했지만, 만석꾼은 반드시 좋은 규수가 나타날 것이라며 희망자를 계속해서 받는다.

모두들 지쳐갈 무렵 동네의 가난한 처녀가 마지막으로 도전했다. 그런데 그녀는 먼저 만석꾼에게 받은 10냥 중 절반 정도를 옷과 밥을 사는 데 썼다. 쌀밥과 고깃국을 실컷 먹고 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후 나머지를 기반으로 동네 삯바느질계에 당당히 도전장을 낸다. 꼼꼼하고 바지런한 그녀의 솜씨에 일감은 몰리기 시작했고 그녀는 오히려 돈을 벌어들이며 한달을 즐겁게 살아낸다. 다른 규수들은 밥을 굶고 돈을 아껴 어떻게든 살아보려 하다가 제풀에 지쳐 쓰러졌지만, 주인공은 발상의 전환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 낸 것. 관점을 바꾸고 문제의 핵심을 파고들어 마침내 풀어내는 개인의 역량이 극대화되니, 극의 재미도 쏠쏠해진다.

그런데 만약 가난한 처녀가 삯바느질할 줄 알아도 만석꾼의 며느리로 뽑힐 기회가 애초에 제공되지 않았다면, 만석꾼으로부터 기본금(?)으로 10냥을 받지 않았다면, 동네에 삯바느질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실천할 수 있는 여건 되지 않으면 건강 지식도 '공염불'

방학 중에 보건교과교육론 연수가 있어 요즘 매일 아주대학교로 등하교하는데, 돈 주고도 못할 공부를 체험으로 배우고 있다. 방학 전에는 학기 중에 운동도 제대로 못 하고 급하게 쫓기느라 식사도 불규칙적일 때가 많아 몸이 힘들었으니, 방학 중에는 연수가 있기는 하지만 마음을 다잡아 틈틈이 운동도 하고 규칙적으로 식사도 잘 해보겠노라고 결심을 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심대로 진행할 수가 없었다.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계단을 오르내리다 보면 어느 정도 운동량을 확보할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현실은 산술적으로 풀리는 게 아니다. 빽빽하게 몰려든 사람들 속을 비집어 서 있으려니 운동이 아니라 오히려 피로감이 더 쌓였다. 피로감이 몰리다 보니 커피를 평소보다 더 마시게 됐고 식사도 더 자극적인 음식이 당겼다. 한파 때문에 움직이는 게 싫으니 전체적인 운동량도 줄어들었고 대사율이 떨어지니 몸의 회복 속도도 느려진 것 같다. 잠에 대한 갈망이 깊어지고 잠자는 시간과 식사 시간을 쉽게 맞바꾸게 된다. 건강 지식을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할 수 있는 생활 여건이 되지 않으니 공염불이 되어버렸다.

<대한민국 병원사용설명서>에는 '생활습관병'이란 단어가 갖는 독성이 예리하게 분석되어 있다. 고혈압·당뇨·비만 등은 원래 '만성질환'으로 불렸다가 나쁜 생활습관의 결과가 축적돼 질병으로 나타난다는 점 때문에 '생활습관병'으로 변경되었다. 그런데 생활습관병이란 명칭은, 자칫 잘못된 개인의 생활 습관으로 기인한 질환이니 전적으로 병에 걸린 것은 네 책임이다 식으로 몰아붙일 우려가 있고 그로 인해 건강한 환경의 구축이나 보건의료제도의 개선을 간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TV 프로그램에서 야채와 과일을 직접 재배해 빈민층에게 싸게 공급하며 건강 증진 운동을 하는 미국 활동가를 본 적이 있다. 그는 빈민층의 건강 문제는 적극적인 보건교육과 동시에 건강한 환경에의 접근성과 건강한 생활 스타일의 설계가 중요하게 다뤄져야함을 역설했다. 빈민층은 더 많이 일해야 하므로 시간적 여유가 없다 보니 인스턴트 식품을 더 많이 섭취하게 되고, 건강한 식단을 꾸리고 싶어도 그들의 생활 반경 안에서는 값싸게 야채나 과일을 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안 후 직접 몸으로 뛰기 시작한 것이다.

지식과 기술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인프라가 있어도 활용할 수 없지만, 또 한편으로는 인프라가 있어야 가난한 처녀의 성공기도, 빈곤한 사람들의 건강권 확보도 가능하다는 사실, 노곤한 일상에서 온 몸으로 배우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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