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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06회)

미치광이 유학자 <3>

등록|2011.01.21 10:36 수정|2011.01.21 10:36
정약용도 눈에 핏발이 섰다. 역사 조작의 첫 단계인 <춘추>에 대해 바짝 신경이 곤두선 것이다.

'유교 오경인 <춘추>는 중국 최초의 편년체 역사서다. 춘하추동의 줄임말이 춘추고 공자가 서책의 제목을 그리 정한 건 사건의 발생을 연대와 계절로 구분하던 고대 관습 때문이었다.'

<춘추>는 본디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를 기준으로 엮어졌다. 기원전 722년 노나라 은공(隱公) 원년부터 기원전 481년 애공(哀公) 때까지의 기록으로 정치적 사건이나 나라 간의 전쟁, 일식(日蝕)이나 홍수, 큰 눈(大雪) 등의 기록을 담고 있다.

'내가 <춘추>를 읽으면서 느꼈던 건 타락한 제후에 대해 존칭을 생략하고 자구(字句)를 미묘하게 사용한 점이었어. 그것을 조선의 유생들은 각 사건에 대한 도덕적 평가라 여겼는데 한(漢)나라 때의 유학자 동중서(董仲舒)는 제후들이 천명을 어기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말이어서 <춘추>를 읽고 지나쳤는데 윤창하는 잊지 않고 지적해 놓았다. 즉, <춘추>를 읽으며 '중국'이란 나라를 부정한 것이다. 윤창하는 말한다.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고 고조선을 세울 시기에 중국엔 요(堯) 임금이 있었다는 주장은 역사적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시조 연대를 끌어올린 데 불과하다."

그렇다면 요순(堯舜)은 없었는가. 아니다. 후대의 임금 요(堯)나 순(舜)은 작은 제후국에 불과하다 보니 요를 시조로 끌어올려 2208년에 개국한 중국 최초의 국가 하(夏)나라를 뒷전으로 끌어내린 것이다. 어디 이것뿐인가. 밀지(密旨) 아래 놓인 기록엔 진(秦)나라 때의 기록도 있었다.

<서양에 알려지기론 중국을 지나(支那)라 한다. 이것은 진(秦)의 외래어 표기다. 그 진나라 때 여섯 나라를 통합한 진시황은 천하가 깜짝 놀랄 일을 저질렀다. 그것은 분서갱유(焚書坑儒)로 중원의 역사는 그 이유를 숨기고 있다.>

이것은 사마천이 쓴 <사기>의 진시황본기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러한 기록이 나오게 된 배경을 윤창하는 간략하게 풀어 놓았다.

<전국시대에 천하를 통일한 진왕 정(政)은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하며 봉건제도를 폐지하고 중앙집권제를 열었다. 그러던 진왕 34년, 함양궁에서 잔치를 열었는데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황제 앞에 나가 의견을 내놓는다.>

그것은 봉건제도가 부활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주장이었다. 이를 놓고 한바탕 접전이 벌어진다. 순우월이 주장한다.

"폐하, 은(殷)나라와 주(周)나라가 일천년 동안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왕족이나 공신들을 제후에 봉했기 때문으로 이들은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 황실을 보호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폐하께서 나라 안의 여러 지방을 분할하는 군현제도를 택하다 보니 황실을 뒤엎으려는 불충한 세력이 있다 해도 보호해 주는 세력이 없어 황실이 안정을 꾀할 마땅한 방법이 없나이다. 하오니 모든 일은 지나간 역사에 비추어 결정하는 게 옳은 일이라 보옵니다."

황제는 그 말을 받아들여 여러 고관들의 의향을 물으니 승상 이사(李斯)가 의외의 의견을 내놓았다.

"폐하, 예전엔 천하가 소란스러워도 이들을 다스릴 영웅이 없었기에 도처에 군웅이 할거해 제후들과 엎치락뒤치락 부질없는 싸움만 되풀이 했습니다. 지금은 혼란했던 천하가 안정됐습니다. 법률과 명령에 안정돼 있는 것이 그걸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무리들은 도당을 앞세워 폐하의 절대적인 힘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놔둔다면 폐하의 위덕(威德)을 손상시킬 것이오니, 아뢰건대 즉시 사민필수의 의약과 복술, 농경에 대한 것과 진나라 글을 제외한 모든 기록을 없애야 합니다. 시서(詩書)의 제자백가 글도 마찬가집니다."

이사의 진언을 받아들인 진시황은 각지의 모든 문서와 서적을 태워버렸다. 진시황은 보위에 오른 초기엔 영웅적인 활동을 벌였으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신선술에 빠져 방사(方士)들을 불러들였다.

그 가운데 노생(盧生)과 후생(侯生)이란 자도 있었는데 이들은 재물을 착취해 시황제를 속이고 도망쳤기 때문에 함양 성중의 학자들을 생매장시켰다. 이들은 거의 유교를 신봉했기에 역사서는 갱유(坑儒)라 했다. 이 점에 대해서도 윤창하는 드러나지 않은 점들을 지적한다.

"진시황 역시 최초의 국가 하(夏)나라가 고조선보다 130년이나 늦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나라를 다스릴 만한 기강으로 고대의 역사와 사상에 관련된 서적을 태운 것입니다. 당시의 식자층(識者層)은 모두가 조선 유민인 유학자들입니다. 책을 불태운 진시황은 우리 민족에 대한 두려움으로 유생들을 구덩이에 생매장 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저들 중원인들의 본색일까요?"

그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후 초한상쟁(楚漢相爭)을 통해 나라를 연 한(漢)나라의 후손임을 강조했다. 이 점에 대해 윤창하는 논박한다.

<저들 중원인들은 초한상쟁으로 천하를 통일해 55개의 소수민족을 수용한 그들 역사까지 한족의 역사로 몰아가고 있다. 소수민족을 배격하고 말살하는 게 아니라 겉으론 그들을 포용해 같이 살자는 의도적인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소수민족은 자기네가 차지한 것을 모두 내놓았는데 나중에야 자신들의 역사나 영토를 뺏으려는 의도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어찌 이것 뿐인가. 중원인들은 고구려가 그들의 지방정권이라고 억지를 쓴다. 이에 대해서도 윤창하는 반박논리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저들 중원인은 9백년간 고구려가 존속하는 동안 중원에 있던 나라들은 36개국이 망하고 흥했다. 고구려가 지방정권이라면 9백년간 지속할 때 중앙정권이 36번이나 망하고 흥했다는 것인데 이건 말도 안 되는 억지다. 그런데도 조선 유학자들은 사대주의에 빠져 나를 미치광이 취급하니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닌가."

그는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다. 우리의 역사를 지나치게 '한반도' 중심으로 본다는 것이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것으로 규정하다 보니 중원인들이 잔재간을 부린다고 역설했다.

<바라건대 조선의 사관들은 우리가 단일민족임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고구려의 전신인 단군조선과 고구려 발해 등이 한반도에만 있었던 게 아니기 때문이다. 마땅히 고구려의 후손들도 우리민족으로 받아들이는 시각이 필요하다. 말갈을 비롯해 거란이나 여진, 몽골 등도 고구려의 후예인데 어찌하여 우린 이런 부족들을 야만으로 폄하해 우리 역사에 수용하지 않는가. 중원인들은 고구려 땅에 발해가 세워지고 거란이 세워진 것을 놓고, 발해는 우리 역사라 하면서 거란은 자기네 땅에서 발생한 민족이니 중원의 역사라 칭한다. 우리는 왜 말 못하는가? 고구려 땅에 살던 백성도 우리와 뿌리가 같은 민족이다. 이러한 논리에서 받아들여야 앞뒤가 맞지 않은 중원인의 주장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전하께서는 한시라도 빨리 역사 왜곡에 대처해야 한다고 힘을 주었다. 밀지를 놓고 정약용은 비 내리는 창밖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의 귓가엔 윤창하가 껄껄거리며 들려줬던 말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것은 한족(漢族)에 관한 얘기였다.

"이보시게 사암, 중원엔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이 있다네. 그들은 소수민족들이 역대로 누려온 영토나 역사, 그리고 문화나 전통 등을 자기네 역사라 하고 있네. 그들은 56개의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의 국가라고 목소릴 높이며, 한족이 91.9%를 차지하고 55개의 소수민족은 8.9%에 불과하다고 큰소릴 치네. 한족이 점령한 소수민족의 땅은 중국 전체의 63.7%에 해당하니 만약 소수민족이 독립한다면 한족은 36.3%의 땅에 살아야 하네. 그러고 보면 중국이란 있을 수 없네. 생각해 보게. 청(淸)나라는 만주족이 세운 것이고 그 이전의 원(元)은 몽골족이 세웠으니 한족과는 거리가 머네. 그런데도 조선의 조정은 그들을 섬기지 못해 안달이 난 것처럼 공자를 떠받드니 참으로 가련한 일이 아닌가?"

그러고 보면 중국의 역사는 모두가 허구다. 중국이란 국명(國名)이 1911년에 정식으로 사용됐으니 1911년 이전엔 중국이란 나라 자체가 없었다. 실체가 없으니 역사가 존재한다는  건 뜬구름  잡는 억지에 불과하다.

그들은 역사 어디에도 없는 중화민국(中華民國)이란 족명을 만들었다. 이것은 소수민족의 영토와 역사를 빼앗으려는 계책이다. 그렇다면 그들이 쓰는 문자(漢文)는 자기네 것인가? 조선의 글은 언문이고 한문은 진서라 우겼는데 이게 참인가? 짜장 웃기는 일이다.

[주]
∎중화민국(中華民國) ; 중국은 56개의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로 역사의 어느 곳에도 없는 허구의 족명을 썼다.
∎중국(中國) ; 국명을 중국으로 사용한 것은 1911년부터다.
∎발해는 조선의 역사지만 거란은 중국의 역사란 억지를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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