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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어느 맑은 날

등록|2011.01.24 17:01 수정|2011.01.24 17:01
어느 맑은 날

안성시 일죽면 화곡리 사는
노인 한 분이 막걸리 뿌리며 노잣돈 놓았다고
죽은 소들을 향해 쉴 새 없이 절을 하며 두 손 모았다 하길래
같은 날 소 묻은 친구네 컨테이너 바닥에 누워
시라고 끄적여 보는데
꼬락서니도 없이 영 시는 되지 않고
한때나마 눈물 쏟은 기분이 영 개운치 않아
친구랑 히히덕 거리며
보상금이나 잘 나와야 할텐데
뻥친 얘기도 나누는 그 시간
바로 옆 논 구덩이에
트럭에서 한바탕 소들이 쏟아져 내리고

소밥을 주려는데 어머니가 말리셨다. 배부르면 죽을 때 더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그래도 마지막 길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했더니 그냥 편안하게 보내라 하셨다.
생각해 보니 내 욕심이었다.

모두 떠나고 빈 축사에 들어서니 석회에 덮여진 축사내부가 마치 무덤 같았다.
십 년이 넘도록 보지 못한 모습에 조금은 낯설었지만 소들의 눈빛이 담긴 마지막
울음소리가 여기 저기 묻어있는 것 같아 오래 있지 못했다.

지나간 시간들이 눈앞에 스쳐갔다. 13년 전 감곡 우시장에서 아버지와 같이 암송아지들을 고르며 트럭에 싣고 올 때와 첫 새끼를 낳으려 진통하는 소와 함께 밤을 지새웠던 그날도 몹시 추운 겨울이었다. 힘들어도 즐거웠고 괴로워도 희망이 있었다.

그것은 돈 때문이었다. 팔려가는 살찐 암소의 눈망울에는 공포로 얼룩진 슬픔이 있었지만 나는 애써 외면하며 입금된 액수에 흡족해 했다. 그 돈으로 밥을 먹고 오입을 했다.

마지막 가는 길 지켜줬어야 했는데 그럴 용기도 없었다.
끝까지 난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애정과 보살핌으로 그만한 대가를 원했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그렇고 그런  끈질긴 사육임을 내 어찌 속일 수 있으랴

미안하다. 고맙다. 이름마저 번호로 남은 생명들이여
인간의 탐욕에 내 욕심에 아무 죄 없는 너희들이 희생되었구나.
다음 생이 있거들랑 그때는 우리 바람과 이슬로나 만나자꾸나.

( 2011년 1월 12일 구제역 의심증상 신고, 시료채취  14일 한우 59마리 구제역 의심증상으로 살처분,  15일 검사결과는 음성 판정)
덧붙이는 글 자치안성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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