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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결혼에 대한 남녀이야기④] 서른셋 '브론즈 미스'의 항변

등록|2011.01.26 17:38 수정|2011.01.28 10:22
2년간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새삼스레 영어를 배우겠다고 필리핀에 온 지 한 달여. 나이 서른셋에 결혼을 해서 일을 관둔다 했으면 그나마 이해를 했겠지만, 애인은커녕 두둑한 통장 하나 없는 주제에, 가진 돈 다 털어 공부를 하러 간다니 대놓고 말은 안 해도 주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몇몇 지인들은 "네 용기가 부럽다", "나도 이참에 직장 때려칠까" 하는 말들을 얼마쯤은 진심인 듯 전했지만 그들이 나와 같은 선택을 하지 않으리란 건 그네들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개중엔 '저리 대책없이 살다 나중에 후회하지' 하는 식의 비꼼 혹은 자기위안 같은 것도 섞여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 12주간 머물 바클로드의 어학원 ⓒ 이명주


▲ 기숙사 방 안에 내 것이라고 놔둔 아담한 나무 책상이 정겹다. ⓒ 이명주


어쨌든 모든 우려를 뒤로하고 현재 필리핀 바클로드 모 어학원에서 3개월 연수과정을 밟고 있다. 그러나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 자의 반 타의 반 다양한 대인관계를 형성하게 됐다. 처음 올 때는 괜한 데 힘 쏟지 말고 공부에만 전념하자 했지만 그게 뜻처럼 되지 않았다. 하여튼 이 과정에서 가장 부각되는 것이 본인의 '나이'다.

대개 외국에 오면 나이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는데 유학생과 어학원 직원까지 99%가 한국인인 이곳에선 만나면 제일 먼저 받는 질문이 "몇 년생이세요?"다. 그 중 또 대다수가 사회경험 없는 20대 초반인지라 어디서 얼마만큼 일했다식의 커리어는 대개 주제가 되질 못한다. 그러니까 결국 나이가 문제다.

그 결과 얼마 전 내 어머니 또래 아주머니가 입학하기 전까지 '여자 최고령' 연수생 지위를 점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열아홉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그건 어디까지나 내 기분이요, 90년생 어쩌고 하는 애들이 "밥 드셨어요?" "잘 주무셨어요?" 같은 극존칭 멘트를 날릴 때면 폭삭 늙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유로운 영혼으로 늙는 게 결코 쉽지 않겠다 자각도 하게 됐다. 회사 다닐 적엔 실상 막내는 아니라도 입사 선배들에 가끔 애교도 투정도 부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거 주책이라고 욕 먹는 거 아닌가' 하는 눈치까지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간 아이 같이 구는 어르신들께 맘속으로나마 핀잔 준 걸 반성했다. 

현지인들 역시 표현방식은 달라도 본인 나이를 알고서 깜짝 놀라긴 매한가지다. 필리핀에 도착해서 첫 나흘은 세부에 머물렀는데 그땐 레즈비언 의혹을 사기도 했다. 대개 "왜 혼자 여행해요?"라는 질문으로 시작해 "몇 살인데요?" "아직 결혼 안 했어요?", "아이도 없어요?"(미혼모가 흔한 탓인지 이 질문도 꼭 잇따른다)로 이어진다.

아직도 당황스러운 질문 하나, "왜 결혼 안 했어요?"

바로 전날에도 어학원 앞 편의점에서 맥주를 구입하는데 앳된 여점원이 나이를 물었다. 스무 살 후반까지도 간혹 술집에서 민증을 요구받으면 '그래, 아직은 건재해' 하고 뿌듯해했지만 이젠 그 단계도 넘어선지라 되레 나이는 왜 묻냐 반문했다. 당황하는 듯해서 그냥 "Thirty three(33)"라 답했더니 다음은 예의 질문들이 쏟아졌다.

서른 살 어느 때까지는 길 가다 "아줌마!" 소리를 들으면 부러 못 들은 척을 했다. 그것은 결코 나를 부르는 호칭이 될 수 없다는 오기에서였다. 하지만 이제 목욕탕이나 백화점 등에서 나를 호명하는 것이 명백한 "아줌마!" 소리에 웃는 얼굴로 뒤돌아본다. 애 둘쯤 있는 아줌마여도 무방한 나이임을 인정한 것이다.

되레 "아가씨" 하고 부르면 입가가 슬쩍 올라가는 것을 막을 수 없다. 또 아주 가끔이지만 "어려 보이시네요"란 말을 듣거나, 내 나이를 알게 된 상대가 화들짝 놀라는 시늉을 해주면 '기분좋음 지는 거다'란 사실을 알면서도 순순히 무릎을 꿇는다. 하지만 이만큼의 내공이 쌓였음에도 여적지 당황스러운 질문이 하나 있다.

▲ SBS 드라마 <그대 웃어요>의 결혼 장면. ⓒ SBS


"왜 결혼 안 했어요?"가 그것이다. 이 물음은 "결혼 안 했어요?"와는 차원이 다르다. 후자는 '예' 혹은 '아니오'로 답하면 그만이지만 전자는 개인의 역사와 가치관, 미래 비전까지 포함한 고난도 주관식이기 때문이다. 알고 있다. 이런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그만큼의 심도있는 답을 원치 않는다는 걸.

하지만 역시 받는 입장이 돼 보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때때로 이미 저만치 걸어가는 타인의 뒤통수를 보며 날카로운 첫사랑의 기억을 끄집어 내고 부질없이 스쳐 간 인연들도 다시금 음미하다 그날 밤 쓰디쓴 소주를 들이켜는 사태도 발생하곤 한다. 사실상 충실한 답을 원치도 않으면서 무심코 이런 질문을 해대는 사람들은 들으시오!

"여보세요들, 사람 만나고 헤어지는 데 이유가 없다는 건 사람 만나고 헤어지는 데 말할 수 없이 숱한 어려움이 있다는 역설입니다. 어째서 저라고 부모님과 합쳐 10여 년간 쏟아부은 축의금이 아깝지 않으며, 늑대 같은 남편을 매일 밤 품에 안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저 날마다 인륜지대사요 진인사대천명을 마음에 새기며 하루하루 열심히 살 뿐이지요. 그리고 어찌 됐던 지금까지 결혼을 안 한 이유는 '마땅한 상대를 못 만나서' 밖에 더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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