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살인 사과 없었지만, 난 용서했다"
[인터뷰] 죽산 조봉암의 장남 규호씨... "선배 판결 뒤엎은 사법부가 고맙다"
지난 1959년 2월 27일 죽산 조봉암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1심과 달리 간첩죄까지 적용해 사형을 선고한 2심을 대법원이 그대로 확정한 것이다. 대법원은 그의 재심청구도 기각했다. 그리고 5개월 뒤인 7월 31일, 이승만 대통령의 최대 정적으로 떠올랐던 진보당 당수는 '간첩'의 굴레를 쓴 채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졌다.
사형이 집행된 이후 조봉암의 유족들은 5일장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이것조차 거부하고 '8월 2일 장례를 치르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문상객도 철저하게 통제했다. 결국 조봉암은 자택에서 3일장을 치른 뒤 8월 2일 오후 5시 30분께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비명(碑銘)도 세우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하얀 옷을 입고 있던 아버지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조봉암이 이렇게 역사에서 사라졌을 때 그의 장남인 규호(62)씨는 11살이었다. 그는 당시 장충초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작고한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과 방송인 임성훈씨 등이 그의 동기이고, 박근혜·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는 그의 3년 후배라고 한다. 지난 25일 강남역 근처 횟집에서 만난 그는 부친의 시신이 집으로 인도되던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아버지의 시체를 트럭에서 꺼내는 걸 봤다. 관도 쓰지 않고 그냥 트럭에다 실려 보낸 것이다.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조봉암을 대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하더라. 아버지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버지 시체를 내리면서 통곡했다. 염을 하던 분이 저에게 '규호야, 이제는 아버지 볼 수 없으니까 많이 봐둬라'고 해서 아버지를 봤는데 평온한 모습이었다."
부친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기에는 그의 나이가 아주 어렸다. 그도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몰랐다"고 했다. 그래서 부친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그는 울지도 못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계셨다가 없어지면서 혼동이 생겼다. '몰락'이 그것이다. 아버지가 간첩이라는 것 때문에 가족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경찰이 금호동 집에 새끼줄을 쳐놓았다.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한 것이다. 귀양 온 상황이랄까?"
그의 기억에 따르면, 조봉암은 가족과 지인들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숨겨라, 눈에 띄지 않게 하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죽음이 가족과 특히 장남에게 미칠 피해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날 동석한 여동생 의정(61)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어른들은 우리를 보호한답시고 설명을 안 해줬다. 그 사건을 알게 됐을 때 우리 삶의 기초는 다 망가진 후였다. 사실 아버지가 없다는 것만큼 치명적인 일이 어디 있겠나? 특히 남자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하늘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장충초등학교와 중동중학교를 거쳐 장충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지만 대학 입학은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입대 영장이 나왔는데도 2년간 군대에 가지 못했다.
"입대 영장이 나왔는데 중정(중앙정보부)에서 나를 불렀다. 내 담당자가 '별도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 가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2년 동안 입대를 못했다. 그러다 영장 나온 지 3년째에 입대했는데 공수특전단에 착출됐다. 당시 공수특전단장이 전두환이었다. 거기서 1년간 훈련을 받았는데 '신원부적격'으로 광주 상무대로 보내졌다."
사실 그는 '부선망독자'(아버지를 일찍 여읜 독자)여서 '입대 면제' 대상에 속했다. 그런데도 30개월 이상의 군생활을 고스란히 마쳐야 했다. 그는 "군에 안 갔다 왔으면 어떤 불이익이 있었을지 모른다"며 "군에 갔다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국에 의한 관리는 5공 때까지 계속됐다. 그는 "박정희 때도 내 뒤를 밟고 있었지만 5공 때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며 한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어느 날 아내가 놀란 표정으로 '당신 무슨 죄 지었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 형사들이 와서 집안을 뒤지면서 '당신 남편 조규호씨 어디 갔느냐?'고 추궁했던 것이다. 아내가 '내일 저녁에 온다'고 얘기했고, 형사들은 다음날 진짜 다시 찾아왔다. 신발을 신고 그냥 들어왔다. 제가 여기서 진짜 사는지를 확인하러 온 것이다. 그들은 제가 이사간 곳마다 찾아왔다."
의정씨는 "80년대에 유학가려고 했는데 여권이 나오지 않았다"며 "87년 민주화운동 이후인 88년에서야 여권이 나왔다"고 말했다.
"모나지 않고 잔잔하게 사는 것이 생존방식"
부친이 '간첩'으로 찍혀 사형당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평범하게 살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튀지 않고 시대를 견디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생존방법이었다. 그는 "나는 세상을 가장 평범하게 사는 것을 지향했고 그렇게 살았다"며 "특히 내 그릇이 그 정도에 불과했다"고 겸손해 했다.
"88년엔가 미국에서 돈을 많이 번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그 친구가 나한테 '훌륭한 아버지를 뒀는데 제약회사나 다니고 있으면 면목이 서겠냐?'며 미국 유학을 제안했다. 모든 비용을 대겠다고 했다. 1년간 고민하다고 '못 가겠다'고 말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출세 같은 것은 진작 포기했다. 그때 미국에 가지 않은 것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조봉암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자기방식대로 불의했던 시대를 견뎌내야 했다. 조봉암의 막내딸인 의정씨가 이렇게 말했다.
"가장 많이 아팠던 사람은 큰 언니(호정씨)였다. 큰 언니는 아버지와 많은 세월을 같이 지냈고, 철이 든 때에 그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큰 언니는 슬픔과 기쁨을 인식할 줄 알았던 것이다. 둘째 언니(임정씨)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자기가 '누구 딸'이라는 것조차도 입에 절대 올리지 않았다. 유일한 남자였던 오빠도 많은 피해를 당했다. 그런데도 오빠는 한번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의정씨 말에 오빠인 그는 "내가 아버지의 복수에 몰입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정말 잘한 것 같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절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남들이 바보라고 할 정도로 웃고 살았다. 선천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다. 아내는 나를 보고 '세상에서 제일 편한 사람'이라고 했다. 모나지 않게 잔잔하게 사는 것이 그때 내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군대에 다녀오자 부친을 모셨던 비서나 운전기사 등이 부친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부친을 조금씩 알게 됐다.
"아버지의 당 구성능력, 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당 강령 등을 봤을 때 그 분은 작은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약자를 수탈하거나 독재자로 군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골고루 잘 사는 복지국가를 지향했고, 평화통일을 얘기했다. 그런 점에서 사랑과 형제애, 골고루 잘 사는 사회 등을 설파한 예수 그리스도와 닮았다. (그런 관점으로) 아버지 위인전을 쓰고 싶다."
그는 "처음에는 아버지가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꿈 속에서 아버지가 까만 옷을 입고 웃는 모습만 봤다"며 부친을 향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몇몇 직장을 전전했던 그는 제약회사를 거쳐 지금은 경기도 평택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그들은 용기를 내서 선배의 판결을 뒤엎었다"
50여 년을 견디던 그에게 '빛'이 찾아왔다. 지난 20일 대법원이 재심을 통해 조봉암의 간첩죄와 국가보안법 위반에 무죄를 선고한 것이다. 52년 만에 '사법살인'의 잘못을 바로잡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계속 판결이 미뤄져 초조했다. 보수 우파들이 득세하니까 밀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무죄판결이 난 그날 감정이 복받쳐 일어나지 못했다. 한동안 울었다. 아주 기뻐서 슬프고, 아주 슬퍼서 기뻤다. 그래도 막상 무죄판결을 받으니까 허탈했다. 50여 년을 견뎌왔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판결이 나니 인생이 허무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규호씨)
"무죄판결이 났다고 우리 인생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동안 겪을 만큼 다 겪어오지 않았나?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지난 50여 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허무할 수도 있다."(의정씨)
하지만 사법부는 52년 전에 저지른 '사법살인'에는 사과하지 않았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한 이후 밝혀온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 의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그의 생각은 상당히 달랐다.
"저는 다 용서했다. 그들의 과실을 얘기하기보다 늦었지만 이렇게 무죄판결을 내려줘서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다. 사법부가 사과했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들도 이런 판결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나? 용기를 내서 선배들의 판결을 뒤엎은 그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는 "아버지를 딛고 일어서려는 (일부) 인간들의 욕심이 있었지만 그들을 욕한다고 해서 뭐가 좋아지겠냐?"며 "증오를 키우기보다 용서하고 화해하겠다"고 강조했다. 낙천적인 그는 "그것이 인생"이라고도 했다.
무죄판결 이전까지 언론 인터뷰 등을 피해왔던 규호씨와 의정씨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말에 의기투합했다. 특히 의정씨는 이런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아버지는 자신의 구상을 실행하지 못했다. 앞으로 그것을 실행할 사람을 찾아야 한다."
사형이 집행된 이후 조봉암의 유족들은 5일장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이것조차 거부하고 '8월 2일 장례를 치르라'고 명령했다. 게다가 문상객도 철저하게 통제했다. 결국 조봉암은 자택에서 3일장을 치른 뒤 8월 2일 오후 5시 30분께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비명(碑銘)도 세우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하얀 옷을 입고 있던 아버지는 평온한 모습이었다"
▲ 죽산 조봉암의 장남 규호씨. ⓒ 오마이뉴스 구영식
"아버지의 시체를 트럭에서 꺼내는 걸 봤다. 관도 쓰지 않고 그냥 트럭에다 실려 보낸 것이다. 누가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조봉암을 대우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하더라. 아버지는 하얀 옷을 입고 있었다. 사람들이 아버지 시체를 내리면서 통곡했다. 염을 하던 분이 저에게 '규호야, 이제는 아버지 볼 수 없으니까 많이 봐둬라'고 해서 아버지를 봤는데 평온한 모습이었다."
부친의 죽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알기에는 그의 나이가 아주 어렸다. 그도 "무슨 상황인지 전혀 몰랐다"고 했다. 그래서 부친의 억울한 죽음 앞에서 그는 울지도 못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계셨다가 없어지면서 혼동이 생겼다. '몰락'이 그것이다. 아버지가 간첩이라는 것 때문에 가족이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경찰이 금호동 집에 새끼줄을 쳐놓았다. 출입을 철저하게 통제한 것이다. 귀양 온 상황이랄까?"
그의 기억에 따르면, 조봉암은 가족과 지인들에게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숨겨라, 눈에 띄지 않게 하라'고 부탁했다. 자신의 죽음이 가족과 특히 장남에게 미칠 피해를 걱정했기 때문이다. 이날 동석한 여동생 의정(61)씨가 한마디 거들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어른들은 우리를 보호한답시고 설명을 안 해줬다. 그 사건을 알게 됐을 때 우리 삶의 기초는 다 망가진 후였다. 사실 아버지가 없다는 것만큼 치명적인 일이 어디 있겠나? 특히 남자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하늘이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장충초등학교와 중동중학교를 거쳐 장충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했지만 대학 입학은 포기해야 했다. 그런데 입대 영장이 나왔는데도 2년간 군대에 가지 못했다.
"입대 영장이 나왔는데 중정(중앙정보부)에서 나를 불렀다. 내 담당자가 '별도의 지시가 있기 전까지 가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2년 동안 입대를 못했다. 그러다 영장 나온 지 3년째에 입대했는데 공수특전단에 착출됐다. 당시 공수특전단장이 전두환이었다. 거기서 1년간 훈련을 받았는데 '신원부적격'으로 광주 상무대로 보내졌다."
사실 그는 '부선망독자'(아버지를 일찍 여읜 독자)여서 '입대 면제' 대상에 속했다. 그런데도 30개월 이상의 군생활을 고스란히 마쳐야 했다. 그는 "군에 안 갔다 왔으면 어떤 불이익이 있었을지 모른다"며 "군에 갔다오길 잘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당국에 의한 관리는 5공 때까지 계속됐다. 그는 "박정희 때도 내 뒤를 밟고 있었지만 5공 때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며 한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어느 날 아내가 놀란 표정으로 '당신 무슨 죄 지었냐?'고 물었다. 알고 보니 형사들이 와서 집안을 뒤지면서 '당신 남편 조규호씨 어디 갔느냐?'고 추궁했던 것이다. 아내가 '내일 저녁에 온다'고 얘기했고, 형사들은 다음날 진짜 다시 찾아왔다. 신발을 신고 그냥 들어왔다. 제가 여기서 진짜 사는지를 확인하러 온 것이다. 그들은 제가 이사간 곳마다 찾아왔다."
의정씨는 "80년대에 유학가려고 했는데 여권이 나오지 않았다"며 "87년 민주화운동 이후인 88년에서야 여권이 나왔다"고 말했다.
"모나지 않고 잔잔하게 사는 것이 생존방식"
▲ 지난 2009년 망우리 묘지에서 열린 죽산 조봉암 서거 50주기 추모행사. ⓒ 오마이뉴스 구영식
부친이 '간첩'으로 찍혀 사형당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평범하게 살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튀지 않고 시대를 견디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생존방법이었다. 그는 "나는 세상을 가장 평범하게 사는 것을 지향했고 그렇게 살았다"며 "특히 내 그릇이 그 정도에 불과했다"고 겸손해 했다.
"88년엔가 미국에서 돈을 많이 번 친구가 나를 찾아왔다. 그 친구가 나한테 '훌륭한 아버지를 뒀는데 제약회사나 다니고 있으면 면목이 서겠냐?'며 미국 유학을 제안했다. 모든 비용을 대겠다고 했다. 1년간 고민하다고 '못 가겠다'고 말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출세 같은 것은 진작 포기했다. 그때 미국에 가지 않은 것도 잘했다고 생각한다."
조봉암은 1남 3녀를 두었는데, 이들은 자기방식대로 불의했던 시대를 견뎌내야 했다. 조봉암의 막내딸인 의정씨가 이렇게 말했다.
"가장 많이 아팠던 사람은 큰 언니(호정씨)였다. 큰 언니는 아버지와 많은 세월을 같이 지냈고, 철이 든 때에 그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큰 언니는 슬픔과 기쁨을 인식할 줄 알았던 것이다. 둘째 언니(임정씨)는 아예 입을 닫아버렸다. 자기가 '누구 딸'이라는 것조차도 입에 절대 올리지 않았다. 유일한 남자였던 오빠도 많은 피해를 당했다. 그런데도 오빠는 한번도 누구를 원망하지 않았다."
의정씨 말에 오빠인 그는 "내가 아버지의 복수에 몰입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해보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은 정말 잘한 것 같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저는 절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남들이 바보라고 할 정도로 웃고 살았다. 선천적으로 낙천적인 사람이다. 아내는 나를 보고 '세상에서 제일 편한 사람'이라고 했다. 모나지 않게 잔잔하게 사는 것이 그때 내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가 군대에 다녀오자 부친을 모셨던 비서나 운전기사 등이 부친의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렇게 부친을 조금씩 알게 됐다.
"아버지의 당 구성능력, 사람들을 휘어잡는 카리스마, 당 강령 등을 봤을 때 그 분은 작은 그리스도라고 생각한다. 아버지는 약자를 수탈하거나 독재자로 군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또한 골고루 잘 사는 복지국가를 지향했고, 평화통일을 얘기했다. 그런 점에서 사랑과 형제애, 골고루 잘 사는 사회 등을 설파한 예수 그리스도와 닮았다. (그런 관점으로) 아버지 위인전을 쓰고 싶다."
그는 "처음에는 아버지가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꿈 속에서 아버지가 까만 옷을 입고 웃는 모습만 봤다"며 부친을 향한 그리움을 드러냈다. 몇몇 직장을 전전했던 그는 제약회사를 거쳐 지금은 경기도 평택에서 약국을 운영하고 있다.
"그들은 용기를 내서 선배의 판결을 뒤엎었다"
▲ 재판중인 조봉암.재판중인 죽산 조봉암. ⓒ 범국민위
"그동안 계속 판결이 미뤄져 초조했다. 보수 우파들이 득세하니까 밀리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무죄판결이 난 그날 감정이 복받쳐 일어나지 못했다. 한동안 울었다. 아주 기뻐서 슬프고, 아주 슬퍼서 기뻤다. 그래도 막상 무죄판결을 받으니까 허탈했다. 50여 년을 견뎌왔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판결이 나니 인생이 허무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규호씨)
"무죄판결이 났다고 우리 인생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동안 겪을 만큼 다 겪어오지 않았나? 무죄판결을 받았다고 해서 지난 50여 년을 되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허무할 수도 있다."(의정씨)
하지만 사법부는 52년 전에 저지른 '사법살인'에는 사과하지 않았다. 이용훈 대법원장이 취임한 이후 밝혀온 '사법부의 과거사 청산' 의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그런데도 그의 생각은 상당히 달랐다.
"저는 다 용서했다. 그들의 과실을 얘기하기보다 늦었지만 이렇게 무죄판결을 내려줘서 고맙다고 얘기하고 싶다. 사법부가 사과했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들도 이런 판결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힘들었겠나? 용기를 내서 선배들의 판결을 뒤엎은 그들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는 "아버지를 딛고 일어서려는 (일부) 인간들의 욕심이 있었지만 그들을 욕한다고 해서 뭐가 좋아지겠냐?"며 "증오를 키우기보다 용서하고 화해하겠다"고 강조했다. 낙천적인 그는 "그것이 인생"이라고도 했다.
무죄판결 이전까지 언론 인터뷰 등을 피해왔던 규호씨와 의정씨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는 말에 의기투합했다. 특히 의정씨는 이런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아버지는 자신의 구상을 실행하지 못했다. 앞으로 그것을 실행할 사람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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