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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몽고에서 한인들이 공산주의를 막게 해주오

[박용만과 그의 시대 67]

등록|2011.02.02 14:13 수정|2011.02.04 13:14

▲ 박용만 ⓒ 독립기념관

박용만은 이승만, 안창호와 함께 미주 3대 독립운동가의 한 사람이었다. 1912년 정치학 전공으로 네브래스카주립대학을 졸업했고,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와 하와이의 '국민보' 주필을 지냈다.

 그의 독립운동 노선은 '무력투쟁론'이었으며, 네브래스카 주와 하와이에서 군사학교를 창설해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외무총장으로 선임될 만큼 신망을 얻었으나 무력항쟁 기반 조성을 위해 북경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변절자라는 누명을 쓰고 1928년 동족의 손에 암살됐다.  국치(國恥) 100년에 즈음하여 잉걸불과 같은 그의 삶과 투쟁을 재조명코자 평전 <박용만과 그의 시대>를 엮는다... 기자 말

▲ 풍옥상(1882-1948) ⓒ 미상

"신랑 펑위샹(馮玉祥 풍옥상)은 신부 리더취안(李德全 이덕전)을 아내로 맞아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건강할 때나 병약할 때나 일정한 부부의 대의와 정조를 굳게 지킬 것을 서약하나뇨?"

주례 목사의 질문에 풍옥상은 "시다(是的. 네)"라고 대답했다. 이어 신부를 향해 물었다. 리더취안 역시 "시다"라고 대답하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 지니라." 주례목사는 성혼을 선언했다.

42세의 늙은 신랑과 28세의 젊은 신부 사이의 결혼은 그렇게 이뤄졌다.

결혼하고 2년 후인 1926년 6월 20일 리더취안은 장가구로 가 한국 최초의 비행사 서왈보의 시험비행을 참관하게 됐고 비극적인 비행기의 추락 사고를 목격하게 됐다.  한참 세월이 흐른 후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자 그녀는 초대 위생부장, 적십자 회장 등 요직을 지냈다.
  
풍옥상은 크리스천 장군이었다. 어느 모임에서 사례를 하자 사례금 전액을 전쟁고아들을 위해 기부했다. 그야말로 선한 사마리아인과도 같은 크리스천이었다.  그는 농부처럼 선량한 인상에 검소했다. 결혼식에도 새 옷을 입지 않았다. 회색 마고자를 입고 검은색 신발을 신었다. 결혼 선물도 사양했고 특별한 접대도 하지 않았다.

한편 우직한 면도 없지 않았다. 결혼하던 해 여름 폭우가 쏟아져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의 둑이 무너질 판이었다. 긴급 구원 요청을 받은 풍옥상은 병력을 출동시켰다. 장병들은 나무와 흙을 옮겨 둑을 높이 쌓았다.

그런데도 상황은 위급했다. 풍옥상은 물살이 거세지자 자신도 강에 뛰어들었다. 부하장병들과 한 덩어리가 돼 인간 둑을 만들어 범람을 막아냈다. 홍수가 그치자 새로 더 튼튼한 제방을 지어주었다. 주민들은 그 둑을 풍공제(馮公提)라고 이름을 붙였다.  

▲ 풍옥상이 청제국 마지막 황제 부의를 추방한 북경의 자금성 내 건청궁 ⓒ Jintan


1924년은 풍옥상에게 무지 바쁜 해였다. 결혼하랴 홍수를 막으랴 정신이 없던 중 가을로 접어들며 전쟁까지 터졌다. 9월 17일 장작림의 봉천군은 17만의 병력을 끌고 만리장성을 넘었다. 직예파의 대총통 조곤은 오패부를 총사령으로 해 봉천군을 막게 했다. 그 와중 풍옥상은 느닷없이 명분 없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10월 28일 북경을 점령해 대총통 조곤을 연금하고 청제국 마지막 황제 부의(溥儀)를 자금성에서 추방했다. 그리고 자신이 총사령관이 됐다. 그 때문에 오패부는 고립되고 직예파는 무너지고 만다. 손문의 국민당군이 북벌을 시작한 것도 봉직전쟁이 일어난 9월이었다. 그 이후 풍옥상은 반제(反帝), 반군벌의 민중운동에 영향을 받아 장작림 타도에 나서게 된다.

범재 김규흥은 풍옥상의 군사고문을 지냈다고 이력에 나온다. 어떤 역할이었는지는 자세치 않다. 하지만 풍옥상에게 접근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1924년 여름 그는 박용만과 함께 풍옥상을 찾아간다. 흥화은행을 설립했다가 낭패를 본 범재와 박용만은 새로운 돌파구를 필사적으로 찾지 않으면 안 될 처지였다. 두 사람은 풍옥상을 찾아가 내몽고에 한인들을 이주시켜 둔전병을 양성하겠다는 계획을 털어 놓았다.

▲ 내몽고 지역(붉은색 표시. 한반도 보다 5배 이상 넓음) ⓒ joowwww


내몽고는 인구도 적은데다 면적은 한반도의 5배 이상. 아직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게다가 일본은 농사짓기가 좋은 한반도에 자국의 농민들을 대거 이주시키려는 정책을 펴고 있는 중이었다. 농토를 빼앗긴 한국 농민들은 결국 만주나 시베리아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소련의 동진과 남하를 저지해야 할 일본으로서는 내몽고에서 한인들이 그 방패막이가 돼준다면 이거야 일거양득이 아니겠는가.

이 의견은 박용만이 하얼빈의 일본 영사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도 이미 제시한 바 있었다. 즉 보고서 중 연경야화(2)의 적화방지 방책으로 "나의 우견으로서는 일본은 차라리 조선인민을 지휘해 출동하여 러시아를 정벌할 임무를 져서 시베리아의 동부를 숙청하는 것이 제일의 양책으로 고찰된다"고 의견을 적은 것이다.

이것은 먼저 일본측에 그 다음은 중국측에 제시할 수 있는 그럴듯한 구실이었다.
박용만의 속내는 그렇게 해서라도 한인들의 둔전병을 양성할 가능성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으로서였다. 중국의 군벌들 역시 많은 병력의 사병을 유지한다는 것이 버거운지라 별도의 지출을 통해 새로 양병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해서 자기 밑천이 안 드는 군사력을 변방에 만들어두는 것도 나쁠 것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일본측이나 중국측이나 저울질이 많이 필요한 제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펑위샹 장군, 조선을 좀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도와드리면 된다는 말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조선 출신 서왈보 소령이 너무 훌륭한 군인이라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던 중이지요."

역시 풍옥상은 크리스천이어서인지 '돕는다'나 '감사한다'는 낱말들이 입술에 붙어 있었다.

 "펑 장군,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다음 그 핍박은 말할 수 없소. 무엇 보다 일본에서 건너오는 농민들이 조선의 농토를 야금야금 빼앗고 있소. 쫓겨난 조선 농민들은 갈 데가 없어 만주로 넘어올 수밖에 없었소. 그런데 3년 전 '간도참변'을 일으켜 대학살을 하는 바람에 수만 명이 목숨을 잃어야 했소."  

김규흥이 비감조로 나직이 말하자 풍옥상은 거대한 상체를 약간 앞으로 내밀고 진지한 표정이 됐다.

"일본의 야만적인 행동은 들어서 알고 있소.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마귀들이요."
"그래서 한인들이 일본의 공격을 덜 받을 수 있는 내몽고 지역으로 이주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글쎄요. 그게 꼭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정착하려면 막대한 자금이 들 것 아니오?" 

이때 박용만이 끼어들었다.

"펑 장군. 저희들 생각부터 말씀 드리지요. 일본은 소련의 공사주의가 팽창하는 것을 무엇 보다 주시하고 있지 않습니까?  장군께서 소련과 만주 사이에 있는 내몽고 지역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하자고 일본측을 떠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러니까 내몽고 요소요소에 새로 민병대촌을 조직하게 할 테니 일본에서 원조를 해줄 수는 없느냐고 말이지요. 그러니까 민병대촌이 정착될 때까지 영농자금을 대주고 또 군사훈련도 맡아줄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이지요."

풍옥상은 1926년서부터 공산주의에 호감을 갖고 접근하게 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관심을 두지 않고 있었다. 박용만은 얘기를 계속했다.

 "펑 장군. 문제는 내몽고 지역이 광활한데 비해 인구가 턱없이 적다는 것을 일본측도 잘 알고 있을 것 아닙니까? 그래서 만주에 출병한 관동군은 물론 조선총독부의 의견도 타진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일본 농민들을 조선으로 끌어들이고 조선 농민들을 쫓아내야 하는 게 조선총독부입니다. 그래서 내몽고의 부족한 인력은 조선총독부에서 조선 농민들을 집단이주 시킴으로써 메울 수 있지 않겠느냐고 알아보자는 겁니다. 대신 군사훈련은 관동군에서 맡는다고 하면 총독부도 관심을 가질지 모릅니다. 현재 일본 경찰이나 헌병은 한인들을 많이 부하로 거느리고 있으니 한인들을 통솔하는 방법도 어느 정도 터득했을 줄 압니다."
 "알겠소. 참모에게 연구를 해서 추진하도록 조치하겠소."

묵묵히 듣던 풍옥상의 대답이었다.   
  
그해 10월 박용만은 풍옥상의 밀사가 돼 서울로 갔다. 내몽고에 한인 둔전병촌을 설치하려는 밑그림은 감춘 채 그 정지작업을 위해 밀행한 것이다. 마고자와 스커트 비슷한 중국식 복장을 하고 중국인 여권을 가졌으니 영락없는 중국인이었다. 어디까지나 풍옥상이 보낸 밀사로서 총독부 관리들을 상대하는 임무를 띠고 떠난 것이다.

▲ 박용만이 방문했던 시기 1920년대의 경성(서울) 남대문로 풍경 ⓒ 미상


그러나 밀사들의 임무는 성공하지 못했다. 총독부 측에서 난색을 보였기 때문이다. 우선 사업의 규모나 성질 상 한 두 번의 협상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게다가 예기치 않았던 일도 벌어졌다. 박용만의 정체가 탄로나 황급히 도주하지 않으면 안 될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박용만의 청원은 그렇게 해서 실패로 끝났다. 해가 바뀌자마자 풍옥상을 접근한 한인들이 또 있었다. 김창숙과 이회영이었다. 그들도 풍옥상에게 청원했다. 내몽고에 독립운동 기지로 쓸 땅을 얻게 해달라는 거였다. 그들은 북경 정부의 전 외교총장 서겸(徐謙)을 통해 접근해 왔다. 

풍옥상은 내몽고 수원성(綏遠省) 포두(包頭)에 3만여 정보(町步)를 빌려주도록 조치했다. 그곳에 한인들을 이주시키고 무관학교를 설립하라고 인가한 것이다. 그런 걸 보면 풍옥상이 서왈보나 범재 김규흥을 잘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면  약자를 돕는 데 익숙한 그의 기독교 정신 때문이 아니었을까.

자금 마련을 위해 김창숙은 1925년 8월 북경을 떠나 서울로 잠입했다. 서울에서 정수기 등과 비밀결사 '신건동맹단'을 조직하고 직접 영남으로 내려가 자금 마련에 나섰다. 그러나 3·1운동의 열기가 사라진 뒤여서 반응은 미미했다. 내몽고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의 꿈은 아쉽게도 거기까지였다.
덧붙이는 글 필자 이상묵은 1963년 서울공대 기계과를 졸업했고 1969년 이래 캐나다 토론토에서 거주하고 있다. 1988년 '문학과 비평' 가을호에 시인으로 데뷔한 후 모국의 유수한 문학지에 시들이 게재됐다. 시집으로 '링컨 生家에서'와 '백두산 들쭉밭에서' 및 기타 저서가 있고 토론토 한국일보의 고정칼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참고문헌-

'독립지사 우성 박용만 선생' 다음 카페(cafe.daum.net/woosung18810702)

방선주 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안형주 저 '박용만과 한인소년병학교'

김현구 저 'The Writings of Henry Cu Kim'

이영신 저 '서왈보 이야기'

조규태 - 박용만의 중국에서의 민족운동

배경식 - 임시정부 외무총장 박용만 암살사건. 공개처형인가, 암살인가?

신한국보, 국민보, 공립신보, 신한민보, 단산시보 등 1백 년 전 고신문들.

독립기념관, 국가보훈처 등 국가기관에서 제공하는 각 종 자료들.

독립운동가 열전(한국일보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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