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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 이승훈'을 도운 두 남자를 기억하라

[2011 동계 아시안게임] 쇼트트랙과 매스스타트에서 빛난 페이스메이커의 활약

등록|2011.02.03 13:21 수정|2011.02.03 13:21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의 신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황영조와 함께 올림픽에 출전했던 김완기다.

김완기는 마라톤 레이스 당시 35km 부근까지 선두권을 유지하면서 황영조에게 결정적인 도움을 줬다. 결국 뒤로 밀린 김완기는 입상권에서 멀어지고 말았지만 김완기의 도움을 받은 황영조는 '몬주익의 영웅'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그것이 의도적인 작전이었는지, 페이스 조절 실패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김완기의 레이스가 일본의 모리시타에게 부담을 주고 황영조의 체력 안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것은 분명했다.

이렇게 중거리 이상의 육상이나 사이클 경기 등에서, 기준이 되는 속도를 만드는 선수를 '페이스 메이커'라고 부른다. 카자흐스탄의 아스타나-알마티에서 벌어지고 있는 제7회 동계 아시안게임에서도 페이스메이커들이 한국 선수단의 메달 사냥에 '숨은 공로자'로 활약하고 있다.

조해리-박승희, 앞에서 끌어 주고 뒤에서 밀며

▲ 벤쿠버에서 함께 울었던 박승희(왼쪽)와 조해리는 아스타니에서 함께 웃을 수 있었다. ⓒ MBC 화면 캡쳐


여자 쇼트트랙 선수단의 조해리와 박승희는 벤쿠버 올림픽에서 나란히 아쉬움을 남긴 선수들이다. 조해리는 벤쿠버에서 노메달에 그쳤고, 박승희는 1000m와 1500m에서 동메달만 두 개를 챙겼다.

그러나 이번 동계 아시안게임을 통해 두 선수는 서로 도우며 나란히 금메달 한풀이에 성공했다. 먼저 동생이 희생했다. 박승희는 지난 1월 31일에 벌어진 1500m 경기에서 조해리의 페이스메이커로 나섰다.

경기 초반에는 선두로 치고 나와 언니의 체력을 안배해 줬고, 6바퀴를 남겨 두고 조해리가 선두로 올라선 다음에는 2위 자리를 유지하며 상대의 길목을 차단했다.

조해리와 박승희가 안쪽과 바깥쪽을 철통 같이 지키고 있으니 벤쿠버 올림픽 1500m 금메달리스트 저우양(중국)조차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결국 1500m에서 조해리가 금메달, 박승희가 은메달을 차지하며 가장 완벽한 결과를 만들어 냈다.

2일 1000m에서는 언니 조해리가 조연을 자처했다. 박승희가 2바퀴를 남기고 먼저 선두로 치고 올라 왔고, 조해리 역시 류추홍(중국)이 박승희에게 신경 쓰는 사이 2위 자리를 확보했다.

이후 함께 스퍼트를 한 박승희와 조해리는 나란히 1,2위로 결승선을 통과해 함께 웃을 수 있었다. 만약 금메달을 욕심 내 한국 선수끼리 추월을 시도하며 무리하게 경쟁했다면 어떤 변수가 일어났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반면에 엄천호의 예선 탈락으로 홀로 1000m 결승에 출전했던 남자부의 성시백은 중국 선수들의 노골적인 방해 작전에 막혀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박석민-고태훈, 이승훈을 빛나게 만든 '킹 메이커'

▲ 고태훈(왼쪽)과 박석민은 이승훈의 2관왕 등극에 보이지 않는 수훈갑이었다. ⓒ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게임 홈페이지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은 이어 열린 남자 스피드 스케이트 매스 스타트 종목에서 더욱 빛났다.

메스 스타트란 출전 선수들이 동시에 출발해 레인 구분 없이 여자는 25바퀴, 남자는 35바퀴를 도는 종목으로 이번 대회 처음으로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한국은 이번 대회 4관왕을 노리는 이승훈을 비롯해 10대 선수 박석민과 고태훈이 출전했다. 매스 스타트는 기록 경기인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유일하게 추월과 몸싸움이 난무하는 종목이다.

앞서 열린 여자부 경기에서도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일본의 이시노 에리코가 레이스 도중 넘어지는 사고가 발생하면서 한국의 노선영이 다소 행운이 섞인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5000m 금메달리스트이자 매스 스타트에서도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이승훈은 경기 중반까지 중위권에 처져 있었다. 20 바퀴를 넘길 때까지도 앞으로 치고 나오지 않아 혹 컨디션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길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국팀의 작전이었다. 경기 중반까지는 박석민과 고태훈이 선두 자리에서 레이스를 주도하면서 일본의 히라코 히라키, 카자흐스탄의 드미트리 바벤코 등 경쟁자들을 견제했고 이승훈은 뒤에서 편하게 체력을 안배하고 있었다.

이승훈은 2바퀴도 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스퍼트를 시작했고, 체력을 비축했던 이승훈은 여유 있게 선두로 치고 나와 매스 스타트 종목의 초대 챔피언 자리에 올랐다. 결승선 부근에서는 2위와의 차이가 20m 이상 벌어져 있었다.

결국 이승훈은 이번 대회 두 번째 금메달을 차지했고, 이승훈의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했던 박석민과 고태훈은 최종순위에서 각각 8위와 10위로 밀려 났다.

물론 '탈 아시아급 기량'을 자랑하는 이승훈이라면 혼자의 힘으로도 충분히 우승을 차지했을 거라 믿지만, 두 페이스메이커의 희생이 이승훈의 2관왕 등극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 추월과 몸싸움이 난무하는 쇼트트랙 경기는 모든 일정이 끝났고, 스피드 스케이팅도 이제 선수들이 같은 레인에서 몸을 부딪히며 경쟁하는 종목은 없다.

비록 모든 영광은 메달리스트에게 돌아가겠지만, 어두운 곳에서 한국 선수단의 좋은 성적을 위해 희생을 감수한 페이스메이커들은 이번 동계 아시안게임이 배출한 '영웅'의 또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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