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지구와 사람들을 미치게 하는가?
시인 하종오 새 시집 <제국(諸國) 또는 제국(帝國)> 펴내
▲ 시인 하종오그가 6개월 만에 새로운 시집 <제국(諸國) 또는 제국(帝國)>(문학동네)을 펴냈다 ⓒ 이종찬
"소들 구덩이에 몰아넣어 / 생매장하는 광경 숨어서 지켜본 하빌 씨는 / 밤새도록 소들에게 쫓겨서 / 방글라데시로 돌아가는 악몽 꾸었다 // 공장에서 고용 허가기간 끝난 뒤 / 김용씨네 농가에 불법으로 취업한 하빌 씨 / 방글라데시 수도 빈민가에서 자라 / 소들 길러본 적 없는 하빌 씨 / 이제 겨우 제때 여물 주고 / 쇠똥 치우는 일에 익숙해졌는데 / 졸지에 실업자가 되고 말았다
다른 직장 구해 갈 수도 없고 / 밀린 봉급 달라고도 하지 못하는 하빌 씨 / 노환으로 누워 언제 숨 거두실지 모르는 / 노모에게 돈 부쳐야 하는 하빌 씨 / 한국에선 떠날 데도 머물 데도 없다 // 소들 생매장하고 넋 빠진 주인 김용씨는 / 하빌 씨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 소들의 울음소리 들리는지 / 흙으로 덮인 구덩이 멍하니 내려다본다"-'축산 노동자' 모두
설날연휴가 끝나가는 토요일. 귀경길 곳곳에 차량 분무소독대가 고속버스를 막아선다. 그렇잖아도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물가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는데 구제역까지 난리법석을 피우다니... 빌어먹을! 나라꼴이 어수선하면 죽어나는 것은 농가들과 서민들 아닌가. 여기에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우리나라로 날아온 이주민들 마음은 오죽 찢어지겠는가.
차가 지렁이처럼 느릿느릿 기어간다. 너무 답답해 시인 하종오가 요즘 펴낸 시집을 꼼꼼히 읽다 무릎을 탁 친다. 그렇다. 21세기 노동시는 이렇게 써야 한다. 우리나라 노동시인들은 그동안 우리 문제에만 너무 매달렸다. 문학평론가 고명철이 "20세기 한국문학을 구성하는 '최선의 문학'은 '한국'이란 근대 국민국가로부터 제기된 크고 작은 문제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말한 것처럼 그렇게.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앞 이미 노동현장을 떠난 나 또한 그랬다. 나는 그동안 21세기 노동시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노동현장 밖에서 살아가는 도시빈민, 노점상, 실직자, 아르바이트생 등을 끌어안는 것으로 그 품을 넓히는 것이라 여겼다. 이주민, 다문화가정 문제는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처럼 너무 가볍게 보았다.
시인 하종오가 이주민 속내를 꼼꼼히 다룬 시집을 4~5권이나 낼 때까지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나는 우리나라를 찾은 이주민들도 한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사우디 드림'을 꿈꾸며 사우디로 떠났던 이웃집 아저씨나 아주머니쯤으로 생각했다. 시인 하종오 시를 읽으며 비로소 꿈에서 깨어났다. 이주민 문제가 곧 우리 문제이며, 지구촌 문제라는 것을. 이제는 '공존'만이 살 길이라는 것을.
제국(諸國)은 공존해야 하고 제국(帝國)은 사라져야 한다
"지구에는 한국을 떠나 다른 국가에서 사는 한국계 이주민들이 있고, 다른 국가에서 한국으로 살러 들어온 한국계 이주민들이 있다. 또 당시, 당대라고 할 수 있는 과거의 현실, 과거가 되는 현재의 현실이 있고, 제국(諸國 또는 帝國)의 시공간을 넘는 한국계 자본들과 한국계 이주민들이 있고, 세계의 노동자들과 세계의 난민들이 있다."-'자서' 몇 토막
2010년 7월, 식의주를 위해 우리나라를 찾아든 지구촌 곳곳에 있는 노동자들 속내를 꼼꼼하게 파헤친 시집 <입국자들>을 펴낸 시인 하종오. 그가 6개월 만에 새로운 시집 <제국(諸國) 또는 제국(帝國)>(문학동네)을 펴냈다. 지난 시집이 우리나라를 찾아든 이주민들 속내를 바라본 것이라면 이번 시집은 지구촌 곳곳을 스모그처럼 떠도는 이주민들 뿌리를 파헤쳤다.
이 시집에는 제1부 23편, 제2부 16편, 제3부 19편 등 모두 58편에 이르는 시편들이 한국계+외국계 이주민들이 겪는 아프고 슬픈 삶이 아로새겨져 있다. '제국의 공장' 13편, '불법 아메리칸 드림', '늙은 코리안 아메리칸', '지구의 걸음걸이', '지구의 폐품', '국경 너머 국경', '출입국 관리소', '생명보험', '이율배반' 등이 그것.
시인 하종오는 7일(월) 낮 전화통화에서 "이주민들 모두는 의식주를 얻고 가족과 행복하게 생존하기 위해 같은 시각에 다른 장소에서 좌절하고 환희하는 세계의 시민들"이라고 귀띔한다. 그는 "그 세계의 시민들에게 제국(諸國)은 공존해야 하고 제국(帝國)은 부재해야 한다"라며 "감정이입이나 가치판단보다는 그들대로의 모습을 시로 쓰면서, 중심이 너무 많은 세계문학의 멀고먼 한 가장자리에서 나는 내 시로 충만하다"고 못 박았다.
공장 폐쇄해도 주가 치솟아 참으로 어리둥절한 세상
▲ 하종오 새 시집 <제국 혹은 제국>이번 시집은 지구촌 곳곳을 스모그처럼 떠도는 이주민들 뿌리를 파헤쳤다 ⓒ 문학동네
한국인 노동자들 농성하고 있는
자회사(子會社) 전자제품 조립공장 폐쇄하고
중국에 이전한다는 보도가 나오자
비로소 주가가 올라가기 시작했고, 폭설이 내렸다-'제국(諸國 또는 帝國)의 공장-소액주주들' 몇 토막
입춘이 지나 날씨는 많이 풀렸다지만 밤이면 밤마다 어둠이 꽁꽁 얼어붙는 밤. 시인 하종오 시집을 다시 읽다가 막걸리를 꿀꺽꿀꺽 마신다. 가족들과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지구촌 곳곳을 떠돌며 이 밤에도 언 손발 호호 불며 눈물을 삼키고 있을 이 세상 사람들이 너무 가슴 저리고 아파서다.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아등바등 살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나 서럽고 가슴 시려서다.
막걸리 두 잔을 마신 뒤 다시 '제국의 공장'을 읽는다. 나는 지금껏 우리나라 시인들이 지구촌 노동현실 문제를 제대로 쓴 시를 읽지 못했다. 시인 하종오가 쓴 시를 읽으며 21세기 우리나라 노동시가 나아가야 할 길을 보았다. 그래. 이제 눈을 크게 떠야 한다. 문학평론가 고명철이 "한국문학이 언제까지나 일국적(一國的) 관심사 안에서만 자족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한 것처럼.
제1부에 실린 시편들은 '제국(諸國 또는 帝國)의 공장'에서 뼈 빠지게 일해도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따라 흔들리는 '드림', '드림'을 결코 품을 수 없는 이주민들 시린 삶이 악악 소리치고 있다. "자회사 전자제품 조립공장 폐쇄한다는데도 / 주가가 마침내 상한가로 올라가서 / 개인 자신이 증가하니 어리둥절"하는 것처럼 말이다.
왜, 지진이나 화산폭발, 대홍수, 폭설, 이상기온이 일어날까
아이들이 첫걸음마를 할 때마다
지구는 움찔거리면서도
아이들의 다리가 탄탄해지도록
태연하게 자전을 계속했다
달이 이 광경을 내려다보느라 기울어졌다 -'지구의 걸음걸이' 몇 토막
제2부에 박힌 시들은 사람과 지구, 달, 해를 핵으로 삼아 삼라만상과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들 끝없는 욕심을 거칠게 꼬집는다. 사람들이 삼라만상을 길들여 '사람 중심의 세상'으로 이끌고 가고자 하는 것이 곧 지구촌을 병들게 하고 나아가 지구촌을 무너뜨려 급기야 다 같이 멸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시인은 그 '이기심의 화살'을 자신에게도 겨눈다. "한국에서 내 시집들이 나오기까지 / 종이를 만들기 위해 / 열대우림에서 나무들이 베어졌"(지구의 사건)다. 시인은 그 때문에 지구도 살기 위해 지진을 일으키고 화산폭발을 일으키고, 대홍수, 폭설, 이상기온 등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시인 시집도 아이티 지진에 묻힌 사람들처럼 묻혀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이런 시를 쓰고 있다"고 스스로 뺨을 때린다.
동물과 사람,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남이야 죽든 말든 저 혼자 잘 살면 그만이라는 사람 욕심이 낳은 매듭이다. 그 욕심이 결국 삼라만상을 피 뿜으며 쓰러지게 만들어 나아가 지구를 미치게 한다. "서로서로 움직이는 그것이 달에게 멀어지지 않으려는 / 해에게 가까워지지 않으려는 까닭"(지구의 걸음걸이)을 사람들만이 모른 척하기 때문에.
이민자, 불법 체류자들이 병신춤 추는 이상한 '코리안 드림'
오늘밤 똑같이 흐르는 시간에
한국에서는 취기와 우애로
버마에서는 허기와 공포로
어둠이 깊어간다는 게 슬프다-'정기 회식' 몇 토막
제3부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우리나라로 날아온 이민자 혹은 불법 체류자들이 병신춤을 추며 힘겹게 살아가는 현주소다. 시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면목동에서, 그 면목동 식당에서 이주민 혹은 불법체류자들을 자주 만난다. 그 사람들은 중국, 티베트, 인도, 버마 등 외국계 이주민이기도 하고, 조선족이나 고려족이기도 하다.
이들이 겪는 삶은 그 할아버지, 그 부모 삶과 그대로 이어진다. "중국 농촌에서 한국 산촌으로 와서 / 취업한 워이커씽 씨는 / 육이오전쟁 때 청년이었던 할아버지가 / 복중태아였던 아버지 얼굴도 못 보고 / 인민군을 돕기 위해 중공군으로 참전하여 / 남한 땅에서 죽었다고 들었다"(전사)는 것처럼 그렇게.
시인은 이들을 바라보며 지구촌 사람들 꿈은 어디 있는가,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살핀다. 그리하여 마침내 제국(諸國 또는 帝國)을 화두로 삼는다. 지구촌과 삼라만상, 지구촌 사람들과 지구촌 국가들이 '공존'하기 위해서는 제국(帝國)이 아니라 제국(諸國)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인이 제국(帝國)이 사라져야 한다는 뿌리는 결국 '공존'에 있다.
조부모님 조국에서 사할린 시골마을 그리워하다
"징용 와서 살다가 죽은 조부모님을 / 사할린 시골마을에 묻어두고 / 늙은 부모님과 함께 자진해서 / 김씨는 한국에 영구 귀국했다... 일제 때 강제로 이주했던 조부모님이 / 너무나 돌아가고 싶어하던 조국 / 한국에 온 김씨는 / 가난하고 힘겹기는 했어도 / 한글을 가르치는 교사와 / 한글을 배우는 학생들이 있던 / 사할린 시골마을을 그리워했다"-'영구 귀국' 몇 토막
문학평론가 고명철은 해설에서 "세계 자본주의 체재 아래 재편되고 있는 국제 정치경제의 역학관계 변화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문학은 비로소 하종오 시를 통해 본격적으로 그리고 래디컬(근본적인, 철저한)하게 일국적 관심사로는 포착할 수 없는 아시아적 타자의 현실을 끌어안게 되었다"고 꼬집었다.
맞는 말이다. 시인 하종오가 이번에 펴낸 <제국(諸國) 또는 제국(帝國)>은 지구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태어나 자란 국가에게 '공존'과 '평등'이란 화두를 내던진다. 그가 지구촌에 있는 모든 나라(諸國)는 더불어 살아야 하고, 그 모든 나라를 차렷 자세로 줄서게 하려는 못된 나라인 제국(帝國)은 하루속히 사라져야 한다고 목청 터지게 부르짖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시인 하종오는 1954년 경북 의성에 태어나 1975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호는 하시(河詩)이다. 시집으로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사월에서 오월로><넋이야 넋이로다><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들들하고><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쥐똥나무 울타리><사물의 운명><님 시편><님><님 시집><무언가 찾아올 적엔><반대쪽 천국> <지옥처럼 낯선><국경 없는 공장><아시아계 한국인들><베드타운><입국자들> 등이 있다. 1983년 제2회 신동엽창작상, 2006년 제1회 불교문예작품상 받음.
덧붙이는 글
<제국> / 하종오 / 문학동네 / 2011-01-10 / 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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