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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여전히 열강들의 이권 전쟁터

[중국근현대사 속 오늘-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 발발 107주년에 부쳐

등록|2011.02.08 16:52 수정|2011.02.08 16:52

러일전쟁 당시의 해전 모습러시아군은 육전에서도 해전에서도 연패를 계속했다. ⓒ 중국보고문학사


1904년 2월 8일, 일본군이 선전포고 없이 중국 뤼순(旅順)항에 정박 중이던 러시아 함대를 공격하면서 러일전쟁은 시작된다. 조선과 만주의 분할을 놓고 벌인 러일전쟁은 러시아의 패전으로 이듬해인 1905년 9월 5일 포츠머스강화조약 체결로 종결된다.

러시아-프랑스동맹과 영국-일본동맹이 맞붙은 러일전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초전 성격을 띠면서 조선과 청나라는 물론 세계정세에 미친 영향이 그야말로 지대했다. 일본은 러일전쟁 개전 직후인 2월 23일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했으며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사실상 조선에 대한 독점적인 지배권을 확보하게 된다.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패하면서 청의 조공국이었던 조선은 사실상 청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입장에 놓였다. 만주에 대한 지배권을 바탕으로 조선에 손을 뻗치는 일본을 경계하기 위해 명성황후는 러시아세력을 끌어들이는데 이에 일본은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고 러시아는 1896년 2월 고종과 왕세자를 러시아공관으로 피신시킨 아관파천(俄館播遷)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결국 러일전쟁으로 한반도에서의 세력균형은 완전히 깨졌고 일본은 별 저항 없이 조선병탄의 수순을 밟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러일전쟁은 청나라에게도 커다란 충격이었다. 청정부는 러일전쟁의 결과를 전제국에 대한 입헌군주제의 승리로 받아들였으며 의회제도를 도입하고 입헌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1905년 과거제를 폐지하고 5명의 대신을 유럽과 일본에 파견하며 입헌제 도입을 위한 사전 준비작업에 착수했으며 1906년 9월 예비입헌 방침을 선포하고, 1907년 8월에는 흠정헌법대강(欽定憲法大綱)이 발표되었다.

물론 청조는 중앙집권화와 황실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으나 입법개혁은 점차 지방분권적 성향을 강하게 띠게 되었으며 1909년 11월에 성(省) 단위 예비 지방의회인 자의국(諮議局) 개설로 지방자치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결국 청조의 멸망으로 이어진 신해혁명과 이후 이어지는 군벌의 할거는 이러한 지방분권의 일련의 연속선상에서 진행된다고 볼 수 있으며 그 직접적인 시발점은 러일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하는데 그 전쟁터는 조선과 청나라의 만주였다. 50여 년이 지난 한국전쟁 때도 미국, 소련, 중국의 이데올로기를 둘러싼 대리전이 한반도에서 벌어졌고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천안함사건이나 연평해전에서 보이듯 세계의 열강 미국과 중국의 외교적 힘 대결이 이뤄지며 포화의 위험에 노출되는 공간은 여전히 한반도이다.

최근에는 러시아마저 급부상한 중국과 미일동맹, 한일군사협정을 통해 우경화를 가속화하는 일본을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한반도 전략을 가동하고 있다. 시베리아철도와 남북한 관통철도 연결을 제안하거나 시베리아와 쿠릴열도 개발에 남북한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려는 제안 등이 바로 그 예일 것이다.

러일전쟁 이전의 조선이 러시아와 일본의 세력균형을 이용하여 대한제국을 건설하고 근대 국민국가로의 전환을 모색했듯이 북한의 체제가 불안정하고 신냉전 구도가 재편되는 현시점에서도 외교적 균형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절실해 보인다. 우리 주변의 그 어떤 나라도 남북한의 통일이나 발전을 원하지 않고 분단을 고착화하며 자신들의 영향력과 국익을 극대화하려고만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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