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땡추위+감기+쓰린 속' 후여후여 쫓아 봄 심는 귀신은?

[맛이 있는 풍경 94] '기러기아빠'가 끓이는 구수하고도 시원한 '호박된장국'

등록|2011.02.10 15:59 수정|2011.02.10 15:59

호박된장국호박된장국이 주는 시원하고 구수한 감칠맛은 어느새 집안분위기를 넉넉하고 포근하게 채운다 ⓒ 이종찬


올 겨울과 봄은 제 정신을 잃었는가. 설과 입춘을 지나 추위가 한풀 꺾이면서 아스라이 봄기운이 다가서는가 싶더니, 또 바늘바람이 얼굴을 콕콕 찌른다. 날씨가 엎치락뒤치락해서일까. 남북에 부는 얼음바람 때문일까. 서민들 얇은 지갑을 희롱하며 마구 치솟는 물가 때문일까. 곧 내야 하는 두 딸 대학등록금 걱정 때문일까.    

속이 쓰리고 아프다. 이럴 땐 답답한 속을 확 풀어주는 시원한 동탯국이나 명탯국 같은 생선국을 포옥 끓여 후루룩후루룩 마시면 참 좋은데. 생선 값이 너무 비싸다. 그렇잖아도 설을 쇠기 위해 고향에 다녀온 탓에 벌써부터 이달 생활비가 달랑거리는데 말이다. 1~2천 원만 들여 속을 시원하게 풀만한 그런 음식, 서민을 왕으로 받드는 그런 음식은 없을까.

있다. 호박된장국이다. 요즘 아무리 물가가 비싸다 해도 1천 원만 주면 애호박 1개는 살 수 있다. 호박은 예로부터 씨앗부터 줄기, 잎, 열매까지 먹을 수 있어 버릴 것이 없는 뛰어난 먹을거리다. 호박열매는 국이나 죽, 떡을 해먹을 수 있고, 호박씨앗은 간식이나 약재로 쓰인다. 호박잎은 쪄서 쌈을 싸먹으면 향긋하고도 깊은 감칠맛을 즐길 수 있다.

'보약'이라 불리는 호박. 이 으뜸 음식 호박을 누가 못난이에 빗댔을까. 옛말에 "동짓날 호박을 먹으면 중풍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이는 호박이 그만큼 건강을 지키는 파수꾼이라는 얘기다. 조선 허리춤께 명의 허준(1539~1615)이 지은 <동의보감>에서도 "호박은 성분이 고르고, 맛이 달며 독이 없으면서 오장을 편하게 한다"고 적혀 있다.

한의학에서는 호박을 부인병, 위장질환, 빈혈, 기침, 감기, 야맹증 치료 등에 쓴다. 호박은 몸이 자주 붓거나 다이어트에도 그만이다. 미국 국립암연구소에 따르면 호박을 당근, 고구마와 함께 즙을 내 하루 반 컵 정도 매일 마시면 폐암에 걸릴 위험을 반으로 줄일 수 있다. 호박에서 노란빛을 내는 루테인은 암 예방뿐만 아니라 시력을 감싸는 영양제이기도 하다.

호박된장국국물이 끓는 동안 흐르는 물에 잘 씻은 애호박을 반달 모양으로 조금 두텁게 송송 썬다 ⓒ 이종찬


호박된장국호박을 두툼하게 썰어놓는 것이 포인트 ⓒ 이종찬


"호박 이기 보약 중의 보약이라카이"

"옴마(엄마)! 새터때기(새터댁) 머스마 그거 땜에 짜증나서 못 살 것다. 지금 내 속에 천불이 펄펄 끓는다카이."
"와(왜)? 또 그라노? 내가 이웃사촌이라꼬 서로 잘 지내라 안 카더나."
"지(저) 보고 내가 아무런 해꼬지(해코지)도 안 했는데 무다이(괜히) 내 보고 탱자가시에 찔린 호박 겉은(같은) 가시나라고 자꾸 놀린다 아이가."
"뭐라꼬? 갸(걔) 그기 호박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 아이가. 호박이 울매나(얼마나) 잘생기고, 사람 몸에 좋은 긴데."

1970년대 들머리께 내가 고향 창원에서 중학교에 다닐 때.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는 그 집에 예쁘장한 얼굴을 가진 또래 가시나가 살고 있었다. 또래 동네 머스마들은 같은 동네에 살면서도 깍쟁이처럼 구는 그 가시나와 말을 한번이라도 더 걸고 싶어 서로 안달을 했다. 거짓부렁으로 별의별 이상한 소문을 내기도 하고, 괜스레 놀리기 일쑤였다.      

그 가시나 네 탱자나무 울타리 위에는 봄, 여름이면 애호박이 주렁주렁 매달렸고, 초가지붕 위에는 가을이면 보름달 같은 누런 호박이 탐스럽게 뒹굴었다. 그래서일까. 그 가시나 네에서는 네 계절 내내 호박으로 만드는 구수한 음식냄새가 입에 침을 고이게 했다. 동네 머스마들은 그 때문에 그 가시나를 탱자가시에 찔린 호박이라고 놀려댔다. 

"니, 탱자나무 울타리네 갸(걔)가 와(왜) 얼굴이 그리 이쁘장하고 키가 뻐드나무(미루나무)처럼 늘씬하게 큰 줄 아나?"
"내가 그거로 우째 알낍니꺼? 턱이 애호박처럼 갸름하고, 이마가 누우런 호박처럼 훤하게 생긴 그런 가시나가 이쁘장한 얼굴입니꺼?"
"1등 색시감 아이가. 니도 쪼매 더 커모 저절로 알게 될끼다. 그라이 니도 커서 멋진 머스마가 될라카모 이 옴마가 해주는 호박으로 만든 음식을 많이 묵거라. 호박 이기 보약 중의 보약이라카이." 

호박된장국양파는 채썰고, 마늘은 다지고, 고추는 송송 썬다 ⓒ 이종찬


호박된장국국물이 끓으면 팽이버섯, 송송 썬 양파, 다진 마늘, 매운 고추(입맛에 따라), 붉은 고추를 넣고 다시 한소끔 끓인 뒤 간만 맞추면 끝 ⓒ 이종찬


기러기아빠에게 음식 만드는 법 가르쳐주는 살가운 시장아주머니들

"애호박 이거 얼마씩 해요?"
"한 개 천 원씩인데, 날씨도 춥고 하니 세 개 2천 원에 가져가세요."
"세 개씩이나 필요 없는데......"
"뭘 해 드시려구요?"
"감기기운이 있는지 몸도 으슬으슬 춥고, 속도 쓰려 호박된장국이나 끓여먹을까 해서요."
"호박된장국을 끓이려면 멸치 다싯물을 따로 내지 말고, 쌀뜨물에 된장 풀어 중멸치 한 줌 던져 넣고 호박을 숭숭 썰어 많이 넣어야 맛이 좋아요. 애호박 이거 보기보다 양이 얼마 안 돼요."

내가 살고 있는 달셋방 주변에는 제법 큰 재래시장이 세 군데 있다. 면목역 옆에 있는 동원시장과 사가정역 옆에 있는 사가정시장, 그리고 면목시장이다. 면목역 옆에 살 때는 저녁이면 반찬거리를 사기 위해 동원시장에 자주 갔다. 지난해 8월 허리춤께 사가정역 옆으로 이사를 온 뒤부터는 사가정시장이나 면목시장에 자주 들른다.    

9일(수) 오후 7시쯤엔 면목시장에 갔다. 집에서 가까운 사가정시장보다 면목시장이 볼거리 살거리가 더 많기 때문이었다. 사가정시장이든 면목시장이든 시장에 갈 때마다 느끼는 점이 있다. 반찬거리를 파는 아주머니들이 내가 뭘 사려고 할 때마다 음식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것이다. 뭔가 적게 사려고 자꾸만 아등바등하니까 '기러기아빠'라는 것을 첫 눈에 알아차린 것이리라. 

그날, 면목시장에서 애호박 3개와 팽이버섯 2묶음을 3천 원에 샀다. 호박전을 참 좋아하는 큰딸이 문득 떠올랐다.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는 큰딸은 기러기아빠와 함께 살지만 겨울방학이어서 제 엄마가 있는 창원에 내려가 있다. 큰딸이 있을 때는 그나마 반쪽짜리 기러기아빠였지만 지금은 진짜 기러기아빠라는 생각에 마음까지 텅 빈 것 같아 막걸리 두 병을 더 샀다.

호박된장국잡곡밥과 함께 먹는 호박된장국 ⓒ 이종찬


쓰린 속, 쓰린 삶, 쓰린 세상 풀어주는 귀신 '호박된장국'

"아빠!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집이지."
"지금 뭐해?"
"음. 호박된장국 끓이려고 음식준비하고 있는 중이야."
"아빠! 나 서울 올라가면 내가 좋아하는 호박전도 부쳐줄 거지? 근데, 오늘은 막걸리 안 마셔?"
"당근이지. 그나저나 큰딸이 없으니까 온 집안이 텅 빈 것 같아. 그렇잖아도 호박된장국 끓여놓고 한 잔 마실 거야."
"조금만 마셔. 호박된장국 맛있게 잘 먹고."

면목시장에서 반찬거리를 사들고 집에 들어와 호박된장국을 끓이기 위해 재료손질을 마악 손질하고 있을 때 창원에 있는 큰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큰딸이라고 그래도 매일 저녁 때마다 안부전화를 거는 것을 보면 대견스럽다. 사실, 올해 대학교에 입학하는 작은딸도 큰딸 못지않게 안부전화를 건다. 자식농사 하나는 그나마 잘 지은 모양이다. 

호박된장국을 끓이는 것은 참 쉽다. 멸치 맛국물을 따로 우려내 쓰는 것도 좋긴 하지만 그 시장아주머니 말마따나 쌀뜨물에 된장 한 수저 풀어 중멸치 한 줌 던져 넣고 한소끔 끓인다. 국물이 끓는 동안 흐르는 물에 잘 씻은 애호박을 반달 모양으로 조금 두텁게 송송 썬다. 그 다음 국물이 끓으면 팽이버섯, 송송 썬 양파, 다진 마늘, 매운 고추(입맛에 따라), 붉은 고추를 넣고 다시 한소끔 끓인 뒤 간만 맞추면 끝.     

깊어가는 늦겨울밤. 봄동을 멸치젓갈에 찍어 안주 삼아 막걸리 한 병 마신 뒤 잡곡밥과 함께 먹는 호박된장국. 아무리 맛난 음식이라도 혼자 먹으면 쓸쓸한 것 같지만 호박된장국이 주는 시원하고 구수한 감칠맛은 어느새 집안분위기를 넉넉하고 포근하게 채운다. 쓰린 속, 쓰린 삶, 쓰린 세상 풀어주는 귀신이 호박된장국이라고나 해야 할까.

마음이 고되고 쓸쓸한 겨울밤. 속이 쓰리고 아픈 겨울밤. 값도 싸고 영양가도 만점인 호박된장국으로 감기도 쫓고, 땡추위도 쫓으며 몸과 마음에 새로운 봄을 꼬옥 품자. 제 아무리 추위가 까불어도 결국 저만치 다가오는 봄을 어찌 막을 수 있으랴. 제 아무리 물가가 올라도 허리띠 더욱 꼬옥 졸라매고 몸부림치는 서민들 삶을 어찌 더 짓누를 수 있겠는가.   

호박된장국호박된장국이 주는 시원하고 구수한 감칠맛은 어느새 집안분위기를 넉넉하고 포근하게 채운다 ⓒ 이종찬

원문 기사 보기

주요기사

오마이뉴스를 다양한 채널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