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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11회)

동경(銅鏡) <4>

등록|2011.02.11 10:37 수정|2011.02.11 10:37
정순왕후가 돌아간 뒤라 사람의 자취가 끊겼지만 운조루(雲鳥樓)엔 집안을 돌보는 이가 있었다. 윤창하의 본댁에 있는 예순 넘은 종(私奴)이었다. 사헌부 관속이 밀어닥치자 노인은 한쪽으로 물러나 허드렛일을 계속하고 있었다.

이곳을 정약용은 두 차례나 찾았었다. 한 번은 상감의 명으로 '집 터'를 살폈으나 특별한 점은 발견치 못했었다. 두 번째 왔을 때는 안채로 향하는 몸채 마당가에서 맷돌을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거린 것이다. 그것은 영락없는 '거북이' 형상이었다.

'청암이 신방에서 자라 꿈을 꿨다는 건 집터 때문일 게야. 그렇기 때문에 딸아이 이름을 미원(美黿)이라 했겠지. 자라형이니 그런 이름이 들어가는 건 당연하다 봤겠지만 왜 곳곳에 거북돌과 거북 모양의 맷돌이 있는가?'

집터가 예사롭지 않다는 걸 알리기 위해서라면 다른 비방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청계천에 사는 설씨 성의 풍수쟁이가 이 집에 관해 말한 적이 있었다.

"운조루는 저희 할아버님이 관상감에 계실 때 터를 잡았답니다. 그래서 그 댁은 자라가 기어오른 형상으로 '문왕팔괘도'에 따라 지은 것이지요. 그러니 복이 일어나려면 금거북터(金龜沒泥) 터가 잘 보존돼야지요."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일이어서 정약용은 풍수쟁이의 말을 곱씹었었다.
풍수지리에선 살아있는 사람을 양(陽), 죽은 사람을 음(陰)이라 한다. 그렇다 보니 주거지도 살아있는 이가 머무는 곳은 양택(陽宅), 죽은 이가 있는 무덤은 음택(陰宅)이다.

양택은 주거풍수의 개인양기를 말하므로 집을 지을 때는 뭣보다 좌향과 방위가 중요한 몫을 차지했다. 좌(坐)는 집이 자리잡은 위치고 향(向)은 어떤 방위로 서 있는가를 살피는 것이다.

풍수에선 당연히 방위를 중요시한다. 음택에서는 선천방위인 복희팔괘도를, 살아있는 사람이 사는 집은 후천방위인 문왕팔괘도(文王八掛圖)를 따른다.

이러한 방위를 보다 정확하게 측정키 위해 '나침반'을 쓰는데 그게 윤도(輪圖)란 것으로 기준점을 정할 때 사용한다. 이것은 지남철 원리에서 따온 것으로 동이족(東夷族)은 상은왕조 때부터 점치는 도구로 실용화했었다.

한(漢)나라 이후, 침(針)이 쇠붙이 따위를 끌어들이는 성질을 띠게 해 방위를 측정하는 도구로 발전하여 지방에 따라 여러 이름이 붙었다. 윤도를 비롯해 나침반 · 지남반(指南盤) · 지남철 · 패철(佩鐵) 등이 그것이다.

조선에서도 선대왕 18년인 1742년 11월에 청나라에서 오층윤도(五層輪圖)를 모조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무렵에 수입되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또한 윤도의 구성이 여러 종류임을 알 수 있다. 12방위나 24방위를 나타내는 1층짜리가 있는가 하면, 땅의 모양을 살피며 점을 치는 24층짜리도 있다.

금주령이 풀린 정조 때엔 풍류를 즐기는 선비들이 윤도를 부채 끝에 멋으로 달아 '선추(扇錘)'란 이름이 있었다. 이러한 윤도엔 오행과 팔괘, 십간 · 십이지가 있다. 풍수사는 말한다.

"음과 양은 각각 '어둠'과 '밝음'으로 구분됩니다. 음이란 글자엔 언덕(丘)과 구름(雲)이 상형됐으며, 양이란 글자엔 빛의 원천인 하늘이 숨어 있습니다. 음은 여성적이며 부드러움을 뜻하고 양은 능동적이고 남성적입니다."

목(木)은 동, 화(火)는 남(南), 토(土)는 중앙, 금(金)은 서, 수(水)는 북으로 나타내는데, 기자(箕子)가 고조선에서 가져온 <홍범구주(洪範九疇)>엔 오행의 첫머리에 물(水)을 놓는 게 다르다.

<물은 어느 형태로든 변화할 수 있으며 백성들이 사는 가장 낮은 곳으로 흘러내린다. 오행 중에 달이 바다와 깊은 관계가 있으므로 <월력(月曆)>을 만드는 게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두 번째는 화(火)다. 햇빛을 잘 받는 남쪽은 물과 달리 위로 타오르는 성질이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말은 불을 피우듯 조심성 있게 하라'고 했다. 그것은 예절을 지키며 사리를 밝히기 때문이다. 남녀가 혼인하면 '화촉동방'이라 한다. 왜 그랬을까? 이것은 신랑과 신부가 촛불을 태워 빛을 얻어온다고 보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목(木)으로, 사람의 행위 중 인(仁)에 해당하며 사계절로 치면 봄이다. 네 번째가 금(金)이며 절기로는 가을이고 인간 행위는 의(義)에 해당한다. 다섯 번째가 토(土)다. 사람이 아침저녁으로 땅을 밟기에 땅을 가장 의지했다. 오행으론 믿음(信)이다.>

이러한 오행과 10간에 속하는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12지를 순차로 엮어 길흉을 살피는 게 '주택의 관상법'인 가상법(家相法)이다.

사주는 사람이 태어난 해(年)와 달(月), 날(日)과 때(時)를 간지로 삼아 길흉화복을 점치는 방법이지만, 가상법은 아무래도 <양택요결(陽宅要訣)>을 따르는 게 일반적이다. 여기엔 시선을 끄는 부분이 있다.

<집을 한 채 지어도 법식에 맞추면 후손에 이르러 복을 받는다. 자신은 타고난 운명을 바꾸지 못해도 좋은 집의 길운(吉運)을 받고 태어나면 후손들은 꿈을 이룬다.>

그것이 풍수법이겠지만 정약용이 골몰한 건 운조루(雲鳥樓)가 '금거북터'가 맞느냐였다.
정순왕후 역시 관상감의 감여(堪輿)가 세세히 살피고 내린 결론이니 이의없이 따랐지만 이곳에 들어설 때는 들뜬 마음이 가라앉은 상태였다. 머릿속에 꿈틀거리는 건 이 집에 대한 비방을 사월이가 어떻게 알았느냐였다.

좌향으로 보면 집자리는 기울어진 직사각형이다. 직사각형을 사선(斜線)으로 놓은 모습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런 점 때문에 윤창하의 장인은 풍수의 이론을 거슬려 진혈(眞穴)을 마루 밑으로 정한 게 뜻밖이었다. 그런 탓에 풍수쟁이들은 가상법에 어긋난다는 말을 했었다.

"금거북터는 복이 일어날 자리가 부엌입니다. 그러므로 바닥을 쓸지 않아야하며 이따금 흙으로도 덮어야 합니다. 집을 지을 땐 부엌 자리에 방을 만들지 않아야 하는 것은 불을 때면 거북이가 말라죽을 것이니 안방을 오른쪽으로 옮기고 거북 자리를 부엌으로 옮겨 언제나 물기에 젖게 해야 합니다."

이에 맞춰 솟을대문을 세운 뒤, 좌우 행랑은 열 두 칸으로 대문 위엔 악한 기운이 틈타지 못하도록 호랑이뼈를 놓은 것이다. 누군가가 그것을 훔쳐간 탓에 지금은 말머리뼈가 걸려 있었다. 윤창하는 운조루에 대해 의혹이 일어난 부분을 말한 적이 있었다.

"장인어른은 부엌자리에 물기를 젖게 하지 않고 왜 마루밑으로 삼았는지 모르겠네. 풍수사들이 옳지 않다고 했지만 장인 어른은 모른 척 했네. 그로인해서인지 청나라를 다녀온 뒤 모함을 받고 벼슬길에서 물러났네. 액운이 겹쳐 외로운 죽음을 당했으니 그것은 운조루 집터가 좋지 않은 건지 분간할 수 없었네."

겉으로 드러난 것은 그것뿐이지만, 지신사께선 운조루를 손질 했다고 나이든 사노(私奴)가 멈칫대며 입을 열었다.

"소인이 죽지 않고 이제껏 산 것은 지신사 어른의 신신당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으리께서 사헌부에 계시지만 사위되시는 분과 절친하다 들었으니 이 말은 해야 될 것으로 보입니다."

"무슨 말인가?"
"이 집의 출입구는 아래쪽이었는데 지신사 어른이 청나라를 다녀오신 후 그 문을 막고 출입구를 오른쪽으로 틀어 기역 자 형의 출입구를 가지게 된 것입니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소인도 영문을 알 수 없는 데다 우물을 파려고 집에 온 인부들 역시 모두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물이라···."
"그곳이 대문과 가까워 피한 것으로 여겼습니다만, 그렇다고 소인이 나설 일이 아닌지라···."

이곳 운조루(雲鳥樓)가 '금거북터'기에 거북 모양의 맷돌이 있는 것이지만 '자라형'이라 소문난 건, 명당이란 사실을 감추기 위한 술책일 수 있었다.

'그렇다고 굳이 감춰야 할 이유는 뭔가? 중책을 맡은 청암의 장인은 청나라를 여러 차례 다녀왔으니 혹여 진한(秦漢) 시대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고서야 집을 갑자기 고칠 리 없잖은가. 집을 고친 것은 뭔가를 숨기기 위한 고육지책일 수 있었다. 그게 뭔가?'

정약용은 몸채와 일직선이 되는 중앙에 선 채 좌우를 돌아보았다. 집터가 '금거북터'라면 엎드린 거북이의 등판에 자신이 올라있는 형국이었다. 더구나 거북이는 가만있는 게 아니라 기어오른다. 몸채를 향해 가는 거북이라고 할 때, 풍수쟁이들이 금거북터라 한 것은 '부엌 자리' 때문이다. 그래서 하인들은 결코 바닥을 쓸지 않고 흙으로 덮기까지 했다.

집을 지을 때 부엌 자리에 방을 앉히려 했으나 그렇게 되면 거북이가 말라 죽을 것이므로 안방을 오른쪽으로 옮기고, 거북 자리를 마루 밑으로 옮겨 항상 눅눅한 기운이 머물기를 바란 것이다. 그렇다면 마루 밑이 명당인가? 정약용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것은 관상감에서 나온 감여(堪輿)들이 벌써 알았을 것이다. 정순왕후가 궁으로 돌아간 걸 보면 명당은 마루 밑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인가?'

이른바 진혈(眞穴)을 찾아야 하는 문제가 생긴 것이다. 와우형(臥牛形)은 미간을 중심으로 해야 복이 일어나고,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은 알을 품은 곳,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은 화방 부분이며, 보검출갑형(寶劍出匣形)은 칼끝이 진혈이다.

'금거북터'가 명당인 건 분명하지만 윤창하의 장인은 풍수쟁이들이 알 수 없게 집을 손질했었다. 자라형이란 말을 흘리며 개축한 데엔 깊은 의미가 있어 보였다.

대문 가까이 다가서며 정약용은 나직이 읊조렸다. '이곳에서 자라가 올라갔다면?'이란 전제 하에 집안을 둘러보았다.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런데 '금거북이라면?' 했을 때 그의 머리를 세차게 두드리는 생각이 있었다. 금거북이는 움직이기 전에 이곳에서 알을 낳았을 것이다. 알은 물이 넘치는 걸 좋아하니 물기가 살아 움직이는 우물 자리일 것이다.

'그런 탓에 집안으로 들어오는 좋은 기운을 숨기기 위해  대문을 바꾼 것인가?'

정약용은 우물을 파려던 자릴 서리배에게 명해 좌우 석 자 넓이로 파게 했다.
"이곳이 진혈(眞穴)이다. 청암의 장인이 세상에 전하려던 비밀은 이곳에 숨겨 있을 것이다. 여길 좌우로 한 자(尺)이상을 파라!"

네 명의 관원이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괭이질을 하는 것도 잠시 이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나으리! 철제함입니다. 오래 된 철제함이 나왔습니다!"

[주]
∎감여(堪輿) ; 관직에 있는 풍수사
∎사노(私奴) ; 하인, 종
∎진혈(眞穴) ; 복이 일어날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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