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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12회)

숨겨진 기록 <1>

등록|2011.02.15 10:18 수정|2011.02.15 10:34
쇠로 만들어진 함은 두께가 한 자(尺) 남짓이었지만 좌우 폭은 위와 아래의 길이보다 짧았다. 표면에 있는 문양엔 치달아 오르는 용이 사나운 발톱을 내세우며 한쪽으로 고개를 튼 채, 금방이라도 불을 쏟아낼 듯한 위엄을 보이고 있었다.

구름무늬가 있는 표면에 곳곳을 은으로 장식한 것이 단순한 물건이 아님을 풍겨주고 있었다. 과연 아래쪽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한궁유조(漢宮遺照)>

한나라 궁정에서 만들었다는 뜻이다. 네 곳에 잠긴 고리를 풀자 안에서 나온 것은 '구리 거울'이었다. 정약용의 입에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이것은 동경(銅鏡)이다.'

동판의 표면을 잘 다듬고 문질러 얼굴을 비쳐볼 수 있게 만든 물건이 '동경'이다. 그 옛날엔 거울의 기원을 청동제의 감(鑑)에서 찾았는데 이것은 '큰 대야'다. 안에 물을 담아 비춰 보았기에 나온 말로 나중엔 물이 없어도 얼굴이 비치는 걸 깨닫게 돼 만들어진 게 동경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나타난 게 아니고 빗모서리가 네 개인 사릉경(四稜鏡)이다.'

동경은 원형이나 오화형(五花形)이 많았다. 당시만 해도 궐 안이나 사대부가 여인이 쓰는 건 장방형이나 종형(鐘形), 자루가 달린 병경(柄鏡)이 고작이었고 이것들은 중앙의 꼭지(鈕)를 중심으로 장식 형태가 달라지기도 한다. 즉, 꼭지를 둘러싸고 있는 모양이 나뭇잎이나 꽃으로 나타내는 경우이나 이 동경은 다른 것과는 형태가 판이한 '사릉경'이다.

관원에게 운조루를 지키게 하고 금줄을 쳐 외인 출입을 통제시키고 관아로 돌아온 정약용은 탁자 위에 철제함을 올리고 '사릉경'의  주위를 조심스럽게 닦았다. 문양으로 보인 부분들이 도드라지며 선이 가느다란 길상어(吉祥語)가 나타났다.

'용피오색이유(龍被五色而遊)'

뜻이 심상찮다. '용은 물속에 있어야 오색 문채(文采)를 발산해 헤엄친다.'는 말이다. 그런 것으로 보면 이 물건은 일반 사가에서 쓰던 게 아니었다.

정약용은 감찰부의 노감찰을 불러 조선 땅에 있는 동경에 대해 들어보았다. 승정원에서 계사(啓辭)에 관한 일을 도맡아 보다 사헌부에 온 것은 석 달이 채 못 됐다.

"나으리, 조선 땅의 동경은 삼국시대 이래 통일신라까지 유물이 나오고 있질 않습니다. 가끔은 고려에서 전해진 것이 있지만 형태로 보면 원형이나 방형, 장방형, 오화형이 많습니다. 불가에서 알게 모르게 전해진 것들은 빗모서리가 네 개인 것과 여섯 개인 것, 그리고 여덟 개인 것으로 나눠집니다."

"다른 특색은 없는가?"
"동경은 중앙의 꼭지(鈕)를 중심으로 몇 가지 다른 무늬가 장식돼는데 대개 소원뉴(素圓鈕)나 수형뉴(獸形鈕)로 나뉩니다. 이 아래쪽 명문대(銘文帶)에 일반인들이 사용해선 안 되는 '용(龍)'이란 문자를 썼고 주변을 은장식으로 감싼 것으로 보아 이것은 궐 안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흐음."
"명문대엔 별다른 말이 새겨있지 않으나 동경의 가장 바깥쪽에 '기해사은(己亥賜恩)'이란 글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동경은 기원 전 202년인 기해년(己亥年)에 만든 것으로 보입니다."

동경의 가장 바깥쪽 명칭은 '연(緣)'으로 글자나 인물고사(人物故事) 등을 기록으로 나타낸다.

기원전 202년이라면 초한상쟁(楚漢相爭)의 막바지다. 특히 기해년(己亥年)은 중원인들이 극구 찬양하는 '해하가무(垓下歌舞)'의 모략이 성공한 시기였다.

지혜주머니 범증(范增)을 항우의 진영에서 떼어내 멀리 쫓아버린 한나라 진영엔 후방을 맡은 총사령관으로 소하(蕭何)가 있었으며, 육해군의 대원수 한신(韓信), 그리고 천리 밖의 적들이 움직이는 모습까지 한눈에 파악하던 장량(張良)이 있었다. 정치 두뇌가 모자란 항우는 상대가 한 수 아래라는 과신에 차 유방의 담판에 응한 것이다.

"만약, 나 유방이 약속을 어긴다면 그건 배신행위이므로 천하가 항우를 따를 것입니다. 내가 어찌 만인에게 불신을 얻어 항우를 대적하겠습니까. 이러한 여러 상황을 보더라도 나는 절대 약속을 어기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이 얕은 항우는 회담을 즉석에서 허락하고 분계선을 홍구(洪溝)로 정했다. 홍구 동쪽을 항우의 서초 정부, 홍구 서쪽을 유방의 서한정부 관할로 정한 것이다.

항우가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이 지쳐있어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치인의 속성'을 무시한 잘못을 범했다. 약속을 어기는 데 정치인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이 뿐만 아니라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밀기로 유명한 것도 정치하는 사람들이다.

홍구를 분계선으로 정한 약정서의 먹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항우는 자기의 군대를 이끌고 철수했으며 유방은 약정서를 무시하고 추격명령을 내렸다. 그제야 상대의 속임수에 걸려들었음을 깨달은 서초 군단은 맹반격을 가해 유방으로 하여금 또 다시 상갓집 개처럼 꼬리를 감추고 도망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것이 항우의 마지막 승리였다. 상대가 이렇게 나올 걸 미리 예측한 유방은 호로병 진지를 구축해 상대가 걸려들길 기다리는 참이었다. 이것을 당시에는 십면매복(十面埋伏)이라 불렀다.

기원전 202년인 기해(己亥). 유방의 서한 군단이 겹겹이 포위하자 항우는 만감이 교차함을 느끼며 자신이 지은 슬픈 노래를 불렀다.

힘으로 산을 뽑고 기개로 강물을 덮었지만
이제는 지나간 과거가 되었구나!
정세가 험악한 데도 오추가 나를 버리지 않으니
우희여 우희여 내 할 일을 알려다오!

비통한 노래를 부르며 항우는 굵은 눈물을 떨어뜨렸다. 우희도 그와 함께 노래 부르다가 항우를 위해 춤을 추고 그 자리에서 시를 지어 항우의 노래에 답했다.

한나라 병사가 모든 땅을 차지하고
사면에서 초나라 노래가 들리니
대왕의 꿈도 산산이 깨어졌는데
소녀가 살아 무슨 뜻이 있으랴!

이것은 참으로 비통하고 처절한 장면이었다. 모두가 항우 곁을 떠나고 남은 거라곤 칠 백 군사와 한 필의 전마(戰馬), 그리고 우희 뿐이었다. 드넓은 천하에 자신이 서 있을 곳은 한 치도 못 된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은 것이다. 이 점을 깨달은 우희는 눈물을 흘리며 속삭였다.

"나는 살아서 당신을 따랐듯이 죽어서도 당신을 따를테니 부디 몸조심하세요."

우미인은 항우가 방심한 틈을 타 은장도를 꺼내 자진했다. 지금도 안휘성 정원현에 가면, 남쪽에 그녀의 무덤이 남아 있지만 잡초가 무성하고 여기저기 들쥐가 구멍을 뚫어 인생의 무상함을 후인들에게 가르친다. 이때가 기원전 202년인 기해(己亥)다.

그러면 사은(賜恩)은 무슨 말인가? 은혜를 내렸다는 뜻이다.  '기해사은(己亥賜恩)'은 그 동안 왕실을 위해 애를 썼기에 기해년에 은혜를 내렸다는 뜻이다.

돌이켜 보면, 이 동경은 한(漢)나라 왕실이 공을 세운 장량에게 내린 것이다. 노감찰이 조심스럽게 한마디 덧붙인다.

"나으리, 한(漢)나라 때의 동경은 원형이 기본입니다. 거울의 면은 평면이지만 약간 볼록면(凸面)에 가까운데, 큰 것은 평면으로 작은 것은 볼록면으로 비치는 게 특이합니다. 동경이 크지 않는데 빗모서리가 네 개인 동경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철제함엔 다른 물건이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그러했다. 동경을 들어내자 아래엔 원을 이루는 네 개의 열십자 모양에, 열두 가지 동물 그림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었다.

첫 번째 것을 구미호로 맞추고, 두 번째 것은 삼족오로, 세 번째 것을 백토로, 네 번째 것은 두꺼비에 맞춰 중앙의 튀어오른 꼭짓점을 눌렀다.'덜컥!' 소리와 함께 얽힌 고리가 풀리는 기척이 손 끝에 느껴졌다.

안에 든 것은 한(漢)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뵈는 해묵은 죽간(竹簡)이었다. 댓조각을 엮어 만든 그것들은 한 눈에 보기에도 아주 오래된 것이었는데 첫 번째 쓰인 댓조각의 글귀가 뜻밖이었다.

<요순우문무왕지전설(堯舜禹文武王之傳說)>

이것은 '요순우문무왕이 전설'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댓가지를 둘러 싼 천에 장상영(張商英)이란 이름이 쓰인 게 너무 의외였다.

시기적으로 보면 도무지 맞지 않은 연대기(年代記)였다. 서한 왕조의 창업에 공을 세운 장량(張良)과 수백 년이 흘러 이름을 드러낸 장상영(張商英)이 무슨 상관있는가? 그에 대한 설명이 죽간(竹簡)에 있었다.

<나라가 위태롭자 황제는 나라를 구할 비책을 내게 물어왔다. 나라를 구할 방법이 없다고 여긴 황제는, 이날 정의인사인 장량의 무덤을 열자고 제안한 것이다. 선대의 제왕이나 정의인사의 무덤은 도굴이나 굴총을 막으려 무덤 속에 어떤 장치를 해놓았기에, 나는 제향을 올리고 자방(子房) 어른 무덤을 파헤쳤다. 그것은 외적(外敵)의 침입에 대한 좋은 방비책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안에서 나온 것은 예기치 않은 기록이었다. 나는 황망히 놀라 석관(石棺)에 들어있는 비책을 황제께 올리고 나머지는 춘추관 학사들이 읽은 후 처리하기로 했으나 이후의 일이 어떻게 됐는지 난 모른다. 그런데 이후 나와 함께 무덤을 파헤친 자들을 죽이라는 교지가 떨어졌다는 말에 내가 읽은 내용을 <소서고(素書考)>로 만들어 선조의 기록임을 증명키 위해 동경과 함께 죽간을 숨겨놓은 것이다.>

이런 기록은 송(宋)나라에 있음이 당연한 것인데 무슨 이유로 조선 땅, 그것도 윤창하의 장인 댁에 숨겨있는 것일까?

[주]
∎감(鑑) ; 청동으로 만든 큰 대야
∎길상어(吉祥語) ; 좋은 말. 상서로운 말
∎장상영(張商英) ; 장량의 후손으로 송나라 때 사람
∎계사(啓辭) ; 죄를 논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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