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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월대보름날, 그들이 서로 돌 던진 까닭은?

투석전의 기원

등록|2011.02.16 12:05 수정|2011.02.16 12:05
이 글은 우리 민족의 문화와 풍습을 새롭게 조명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기자의 말>

곧 정월대보름입니다. 가족 단위 명절인 추석과 설날을 제외하고 거의 유일하게 오래 살아남은 세시풍속인데요, 그만큼 농경사회 전통인 마을축제 중에서도 정월대보름날이 중요했던 증거이기도 합니다.

정월대보름은 새해 첫 보름달이 뜨는 날입니다. 풍요를 상징하는 보름달이 뜨는 날인만큼 풍년을 빌고 가족의 건강과 행운을 비는 행사가 유독 많습니다. 특히 농경사회에서는 설날보다 더 행사도 많고 더 요란스러운 날이었습니다. 가족 제의보다 마을제의가 더 중요했던 공동체문화의 유산이기도 합니다.

다채로운 마을 축제가 벌어지는 이날, 유독 가장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것이 바로 투석전입니다. 왜 정월대보름날 두 마을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서로에게 돌을 던진 것일까요? 이 풍습의 기원을 알아보기 위해선 정월대보름 세시풍속이 시작된 청동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김해석전놀이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보면 김해지방에서는 매년 음력 4월 초파일 경부터 마을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성(城)의 남쪽지역에서 온 마을 사람들이 좌, 우부로 나누어 편을 가르고 깃발을 세우고 북을 치며 기상을 돋우고 돌을 던져 상대편을 공격하는데 마치 돌비(石雨)가 오는 것 같았다고 한다. 사상자가 생겨도 승부가 가려질 때까지 싸웠다고 하며 음력 5월 단옷 날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고 한다. ⓒ 김해시청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사유적지인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신석기시대 유적지입니다. 대표적인 청동기시대 유적지인 여주 흔암리나 부여 송국리 유적지와 비교한다면 두 유적지의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납니다.

암사동 선사유적지대표적 신석기 유적인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한강변에 위치해서 물과 가깝고 지대가 낮다. ⓒ 네이버


송국리 선사취락지청동기시대 마을은 강에서 떨어진 구릉지대에 마을이 만들어졌다. ⓒ 네이버


암사동 선사유적지는 한강근처 낮은 평지에 있습니다. 아직 농경이 본격화되지 못해서 농사만으로는 식량을 다 충당하지 못했던 신석기인들의 주거지는 바다나 강 근처에 있었습니다. 수렵이나 어로로 보충되지 않으면 생계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청동기시대가 되면, 마을의 위치는 변합니다. 충적지 평야가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산구릉으로 대략 해발 75미터에서 100미터 사이에 마을이 들어섭니다. 이른바 배산 임수지형이 생기게 된 거죠. 청동기시대 마을이 이렇게 농경지에서 멀리 떨어진 높은 곳에 위치하게 된 이유가 뭘까요?

신석기시대에 농업혁명이 일어나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는 해도, 신석기 유적에는 대규모 밭이 없습니다. 집 앞 텃밭이나 아니면 저습지를 이용해서 조금씩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어요. 왜냐하면 이 시대에 한반도는 온통 수풀이 울창하였던 때거든요.

이 숲을 개간해서 밭으로 만드는 일은 한 가족에겐 불가능한 일입니다. 연구에 의하면 숲을 개간해서 밭으로 만드는 데는 5년 정도가 걸린다고 합니다. 먼저 나무를 베고 난 뒤 불을 지르고 그 뒤에 뿌리가 썩기를 기다립니다. 살아있는 나무뿌리는 돌도끼를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죠. 드러난 나무뿌리에 돌이나 동물의 뼈, 혹은 나무로 된 정을 꽂아두면 차츰 뿌리가 썩어갑니다. 그 후에야 나무뿌리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공력을 기울이는데 한 가족이 다 매달리다가는 굶어죽기 십상이죠. 온 식구가 종일 먹을 것을 찾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도 평균연령 20세를 넘기기 어려운 때였으니까요. 이런 때에 식구가 불어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그 식구를 먹여 살릴 경작지는 만들어지지 않으니까요. 폴리네시아인들의 몰락은 신석기에 머물러야만 했던 그들의 비참한 최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다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열립니다. 바로 청동기시대. 그것은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표현됩니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이 새로운 시대는 이 슬로건이 모든 것을 말해줍니다.

청동기시대를 열었던 사람들은 특별히 신석기시대보다 달라진 생산도구를 쓰기 않았습니다. 여전히 돌도끼가 유일하고도 중요한 도구였지요. 도구의 변화 없이도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힘의 비밀은 '협동노동'입니다. 우리 단군신화에도 표현되었듯이 '풍백, 운사, 우사'와 같이 농사에 필요한 지식을 갖춘 과학자와 협동노동을 지휘할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대규모 경작지가 만들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석기시대엔 없었으나 청동기시대에 최초로 탄생한 것이 밭입니다.

진주대평리 유적진주 남강가에 위치한 대평리 유적엔 이랑이 경사면을 따라 만들어져 배수에 용이하도록 설계된 대규모 밭이 발견되었다. ⓒ 국립중앙박물관


밭의 등장으로 잉여농작물이 만들어지기 시작합니다. 이 잉여농작물은 그만큼 약탈의 대상이 되기 쉬웠습니다. 당연히 잉여농작물을 지키기 위해 마을의 위치는 전망이 좋고 방어가 쉬운 구릉지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리고 환호라고 하는 깊은 도랑을 주변에 파거나 목책을 두르기도 합니다. 그리고 송국리에서처럼 마을 입구에 높은 전망대를 세우기도 합니다. 

청동기시대라고 해서 말이 청동기시대이지 무기는 여전히 돌이었습니다. 기마병도 없었고, 잔인한 금속무기도 없었지요. 하지만 돌칼, 돌창, 돌화살은 마음만 먹는다면 서로 깊은 상처를 낼 수 있었습니다. 청동기사회 협동노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었습니다. 전쟁은 서로에게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하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나라간 전쟁도 농사철을 피했고, 항상 일정한 숫자의 농사꾼들을 남겨놓고 징발했습니다. 돌로 농사짓던 시절이다 보니 협동노동을 망치는 일은 어쩌면 전쟁보다 더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을과 마을 사이에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있었지요. 환호로도 목책으로도 막을 수없는 전쟁이 바로 물전쟁입니다.

마을이 번성하고, 밭의 크기가 커지면 커질수록 물은 더 이상 저절로 흘러넘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줄기 물이 풍요롭게 해 줄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까지 경작지가 생기지 않으면 안될만큼 마을이 커지게 되자 그 물을 둘러싼 전쟁이 시작된 것이지요.

훗날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이 전쟁은 굉장히 오래되었는데요, 그때마다 피흘리며 싸울수는 없는 법, 이때 현명한 방법을 제안합니다. 바로 정월대보름날 두 마을이 모여서 물전쟁을 치르기로 말이죠. 바로 그것이 투석전 혹은 석전입니다.

일부 지방에서는 투석전을 위해 미리 건장하고 날랜 젊은이들을 뽑아 준비를 시킨다고 하는데요, 머리가 깨지고 심지어 목숨을 위협하는 이 싸움이 마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었으니 그럴법했습니다. 이렇게라도 해서 승자가 결정된다면, 심각한 전쟁으로 치닫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으니까요.

환호유적청동기시대부터 마을 주변에는 이런 환호가 빙둘러 파져있는데, 이곳에선 종종 투석의 흔적인 돌이 발견되기도 한다. ⓒ 문화체육관광부


이렇게 해서 며칠이고 계속된 돌팔매질 끝에 승부가 나면, 이긴 마을은 물길을 가져갔습니다. 그렇지 못한 마을은 이긴 마을이 물을 쓸 만큼 쓴 뒤에 물길을 자기 마을로 터서 조금이라도 농사를 지으며 버티고 그 다음해를 기다릴 것입니다. 다시 다음해 정월대보름이 되면 마을간에는 돌팔매질을 시작하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이렇게 마을간 돌팔매질도 이때가 지나면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같은 강을 끼고 사는 마을간 규칙은 두 마을간 치명적 전쟁을 미리 예방했습니다. 어찌보면 야만적으로 보이지만 가장 현명하고 합리적인 방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더 현명한 마을에선 고싸움을 하거나 줄다리기를 했을 것이고요. 정월대보름 풍습에 마을간 대결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일부 지방에선 투석전이 단오 때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단오는 논밭에 물을 대야 할 때입니다.

투석전 장면마을의 운명을 결정짓는 처절함이 투석전에서는 느껴진다. ⓒ 김해시청


이 놀이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사회불안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일본에 의해 금지되면서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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