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민은 기자다

"친구는 비디오 찍다 죽고, 난 고무탄 50발 맞고"

[현지 취재 : 여기는 카이로] 압달라와 함께 발로 되짚어본 알렉산드리아 시위

등록|2011.02.19 13:52 수정|2011.02.19 21:54
<오마이뉴스>는 국제팀 김덕련 기자를 이집트 현지에 파견했습니다. 지난 11일 카이로에 도착한 김 기자는 무바라크 30년 철권통치를 끝낸 이집트의 분위기와 혁명 이후 새롭고 민주화된 미래를 준비하는 이집트 사람들의 열정을 생생하게 전해줄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 압달라. ⓒ 김덕련

압달라를 만난 건 우연이었습니다. 그 우연 덕분에 무바라크 퇴진을 위해 목숨을 걸었던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의 경험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16일(현지 시각) 전 카이로를 떠나 알렉산드리아로 향했습니다. 지중해에 접한 항구인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 제2의 도시입니다. 이름이 말해주듯이 알렉산더 대왕이 B.C.331년에 건설을 명한 도시입니다(정작 알렉산더 본인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져 이 도시의 완공을 보지 못합니다).

B.C.30년 클레오파트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곳도 이곳이고, 현대 이집트의 기틀을 다진 나세르 대통령은 바로 여기에서 1956년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했습니다. 열강들이 손에 쥐고 주무르던 수에즈운하를 이집트인의 품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나세르의 선언을 계기로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하기도 했지요.

이처럼 세워진 지 2000년이 넘는 이 유서 깊은 도시는 최근 무바라크 퇴진 요구 시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다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시위대를 결집시킨 상징적 인물인 칼레드 사이드가 죽은 곳도 바로 이곳입니다. 칼레드 사이드는 경찰의 마약 밀거래 현장을 포착한 영상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불법 연행돼 경찰 손에 맞아죽었습니다. 

카이로에서 알렉산드리아까지는 차로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하는데, 이날은 그보다 시간이 더 걸리더군요. 모래가 섞인 강한 바람 때문에 시정이 좋지 않아 속도를 줄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모래바람 지대를 지나니 하늘에선 잠시 비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맑고 파란 하늘이 펼쳐졌습니다. 지중해성 기후 지대인 알렉산드리아가 가까워졌다는 뜻이지요.

"수만 명이 해안을 꽉 채우고 '무바라크 퇴진' 요구하며 행진"

▲ 아흐마드. ⓒ 김덕련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후 시민들의 의견을 듣고자 돌아다니던 저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서 아흐마드를 만났습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직원인 아흐마드는 무바라크 퇴진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고 하더군요.

아흐마드는 "부정부패가 너무나 싫었고 무바라크를 권좌에서 끌어내려 그런 문제를 바꿔보고 싶어" 시위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아흐마드는 무바라크가 퇴진 결정을 미루던 지난 10일 40여 명과 함께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으로 갔고, 그곳에서 무바라크 사임 소식을 들었다고 합니다.

아흐마드는 시위가 한창이던 때 국영방송이 보인 행태를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타흐리르 광장에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국영방송은 시위 때문이 아니라 결혼식 때문에 사람들이 모인 것이라고 보도했다"는군요. 이어 "시위대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예전 타흐리르 광장 모습을 내보내기도 했다"고 덧붙였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한 콥트 교회에서는 올해 1월 1일 폭탄 테러가 발생했는데 그 때문에 종교 간 갈등이 커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 묻자 아흐마드는 손사래를 치며 "이집트에서 무슬림과 기독교인은 친구이고, 무바라크 반대 시위도 함께했다"고 강조했습니다.

시위 과정에서 죽은 사람의 가족이나 다친 사람을 아는지, 안다면 소개해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흐마드는 "경찰이 쏜 고무탄을 50발이나 맞은 압달라라는 친구가 있다"며 바로 전화기를 꺼냈습니다.

압달라를 기다리는 동안 아흐마드는 저를 바닷가로 데려가더니 "무바라크를 몰아내기 위해 모인 수만 명이 (해안선 한쪽 끝을 가리키며) 저기부터 (다른 쪽 끝을 가리키며) 저쪽까지 꽉 채우고 바닷가를 따라 행진했다"고 말하더군요. 이어 "우리가 없었으면 무바라크를 못 끌어내렸을 것"이라고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아흐마드가 "칼레드 사이드는 훌륭한 사람"이라며 사이드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압달라가 도착했습니다. 선글라스를 끼고 카메라를 든 그의 점퍼 여기저기에 작은 구멍들이 숭숭 뚫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습니다.

▲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 김덕련


"고무탄 50발 맞아 지금도 아프긴 한데, 마음은 편하다"

시위 초기인 1월 28일('분노의 금요일')에 맞은 고무탄 흔적입니다. 압달라가 맞은 건 작은 구슬만한 크기로, 산탄들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고무탄이었습니다. 이집트 경찰은 시위 초기에 진압용으로 고무탄을 사용했지요(나중엔 실탄도 쏩니다). 요즘 반정부 시위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아랍 국가들의 경찰도 마찬가지로 고무탄을 애용하고 있습니다.

압달라는 하체에도 고무탄을 맞았다며 바지를 내려 제게 그 흔적들을 보여줬습니다. 벌겋게 부어올랐다가 이제는 딱지가 내려앉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압달라는 스마트폰을 꺼내 고무탄을 맞은 직후 촬영한 영상을 보여줬습니다. 영상 속의 압달라는 상의를 벗고 있었는데, 얼굴의 일부분은 물론 상체의 3분의 1 정도는 피부가 주변과 확연히 구분되는 붉은색을 띠고 있었습니다.

고무탄을 맞던 때에 대해 압달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팡 소리가 나면서 수많은 고무탄이 날아왔고 내 앞에 있던 3명이 쓰러졌다. 쓰러진 사람들은 경찰에 끌려갔지만, 난 쓰러지지 않았고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도망쳤다. 이때 고무탄에 눈을 다친 사람이 꽤 된다(기자 : 고무탄을 눈에 맞으면 실명할 수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맞았을 때 너무 아파 머리에서 지진이 난 느낌이었다. 난 병원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그런데 나보다 더 많이 다친 사람도 많았고, 병원에 누워 있고 싶지도 않았다. 의사가 말렸지만 그 다음날 다시 시위하러 나갔다. 비싼 병원이었는데, 병원 측에서 '좋은 일을 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니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해서 그냥 나왔다."

압달라는 고무탄 때문에 생긴 상처를 지금도 치료하고 있다며, "여전히 아프긴 한데 무바라크가 없어져서 맘이 편하고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압달라의 스마트폰 속에는 경찰이 최루탄을 쏘아대고 시위대가 돌을 던지며 맞선 당시 현장의 모습도 담겨 있었습니다. '팡'하고 최루탄을 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화면도 흔들렸습니다.

▲ 16일(현지 시각)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만난 압달라가 무바라크 퇴진을 이끌어낸 시위 과정에서 고무탄을 맞아 생긴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 김덕련


"희생자 중 저 사람이 비디오 찍다 죽은 내 친구"

압달라는 제게 시위와 관련된 현장들을 안내하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 저는 몇 시간 동안 압달라와 함께 다니며 그날의 흔적들을 되짚었습니다(아흐마드는 먼저 자리를 떴습니다).

거센 바닷바람을 맞으며 걷는 동안 압달라는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두 아들을 둔 34세의 아빠이고, 월급의 절반은 은행 빚을 갚는 데 들어간다고 합니다. 지금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소속 사진가로 일하고 있지만 본래 전선기자를 꿈꿨다고 하더군요. 그러다 1월 25일 시위가 시작된 후 매일 현장에 나와서 카메라와 스마트폰으로 상황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다른 나라의 전쟁터가 아니라 "좋은 사람(무바라크 퇴진 요구 시위대)과 나쁜 사람(무바라크 지지 세력)의 싸움터"에서 '전선기자' 역할을 한 셈이지요.

압달라는 그렇게 현장에서 겪은 일들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고 합니다. "무바라크 때문에 열을 받아서 이번 시위를 계기로 페이스북을 시작하게 됐다"고 하더군요.

그러던 압달라가 어느 모스크 옆에 멈춰 섰습니다.

"여기다. 우리 그룹은 이 모스크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과 함께 시위를 시작했다."

그 주변엔 희생자들의 모습을 담은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고, 한 시민은 휴대전화로 희생자들의 얼굴을 촬영하고 있었습니다. 압달라가 희생자 중 한 명을 가리키며 말했습니다.

"비디오카메라로 현장을 찍다 죽은 내 친구다."

나중에 카이로로 돌아오는 길에 '카이로에서 시위 현장을 비디오로 촬영하던 한 남자가 주검으로 발견됐는데, 고무탄에 맞고 쓰러졌다가 차에 치여 숨진 것 같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났습니다. 압달라에게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그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16일(현지 시각)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에서 한 시민이 무바라크 퇴진을 이끌어낸 시위 과정에서 희생된 이들의 모습을 휴대전화로 촬영하고 있다. ⓒ 김덕련


불탄 경찰서, 무너져 내린 지방정부 청사

압달라가 그 후 저를 데려간 곳은 시위 때 불탄 경찰서였습니다. 경찰서 창문과 벽은 불탄 흔적이 역력했고, 경찰서 뒤쪽에는 흉물스럽게 타버린 경찰 차량이 방치돼 있었습니다. 경찰차 주변엔 짓밟힌 경찰 모자와 경찰복, 경찰 신발 등이 있더군요.

압달라는 "당시 경찰들이 제복과 모자를 벗어던지고 도망쳤다"고 말했습니다. 뒤쪽 벽에는 '알라가 나쁜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낙서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경찰서 입구에 장갑차를 탄 군인이 있었지만 촬영을 막지는 않았습니다.

▲ 무바라크 퇴진을 이끌어낸 시위 과정에서 불탄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경찰차. ⓒ 김덕련


▲ 무바라크 퇴진 요구 시위 과정에서 불탄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한 경찰서 뒤편에 버려진 경찰 모자. ⓒ 김덕련


조금 더 걸으니, 무너져 내린 커다란 건물 잔해가 나왔습니다. 꼭대기에서 여전히 이집트 국기가 펄럭이고 있는 그 건물은 알렉산드리아 지방정부 청사 잔해였습니다.

"카이로보다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위가 더 격렬했다"는 말을 몇 번 들었는데, 이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 무바라크 퇴진을 이끌어낸 시위 과정에서 폐허가 된 알렉산드리아 지방정부 청사. ⓒ 김덕련


노동자들은 파업 중

그렇게 압달라와 걷던 중,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70~80명의 노동자들을 만났습니다. 이들은 길 건너편에 있는 '알렉산드리아 수자원공사' 소속 노동자들로 파업 중이었습니다. 제가 사진을 찍으니 몇몇 사람은 제게 다가와 아랍어로 하소연했고, 다른 몇몇은 피켓 방향을 제 카메라 쪽으로 돌렸습니다. 주변에 물어보니, 현재 실제로 받는 월급은 350이집트파운드(약 7만원)밖에 안 되니 월급을 올려달라고 외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집트의 법정 최저임금은 월 1200이집트파운드(약 24만원)이지만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들은 요구 사항 20여 가지를 적은 종이를 제게 건넸습니다. 나중에 아랍어를 할 줄 아는 분을 통해 해석해 보니 ▲노동시간 단축 ▲임금을 물가 인상 수준에 맞춰줄 것 ▲위험수당 책정 ▲보너스 지급 등의 요구 사항이 담겨 있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시내를 다니는 동안 전 노동자들의 이런 시위 모습을 다른 곳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 곳곳에서 파업이 확산되고 있다는 보도를 현장에서 확인한 셈이지요.

▲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이집트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의 노동자들. ⓒ 김덕련


"위험한 일에 나선 이유? 아들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노동자들을 뒤로하고 압달라와 함께 다시 길을 나섰습니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압달라가 다시 멈춰 섰습니다. 압달라는 좁은 계단으로 오르는 어느 건물 2층을 가리키며 "저기가 내가 숨었던 곳"이라고 말했습니다. 압달라는 "정부에서 용역깡패를 고용해 시위대를 공격하게 했고, 그 깡패들은 칼을 들고 설치고 다녔다"며 "시위를 마치고 돌아가다가 (길 건너편을 가리키며) 저쪽에서 깡패들이 지나가는 걸 보고 이리로 올라가 숨어 있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습니다. 압달라는 그런 깡패들과 마주칠 것에 대비해 '나는 무바라크를 사랑한다'고 쓴 종이를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하더군요.

압달라에게 물었습니다. 그렇게 위험한 일을 하는 것에 대해 가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고.

"무바라크가 계속 버텨서 난 10일 카이로의 타흐리르 광장으로 갔다. 다시 못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아내와 아이들을 꼭 껴안고 '다녀오겠다'고 말했다. 아내는 울었고,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아이들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떠난 압달라는 아흐마드와 마찬가지로 무바라크 사임 소식을 타흐리르 광장에서 들었다고 합니다.

무바라크 퇴진 시위를 벌인 18일간(1.25~2.11)을 "하루하루 새로웠다. 지금껏 내 인생에 그런 날이 없었다"라고 말하는 압달라에게 다시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위험한 일에 나섰느냐고. 압달라는 간결하게 답했습니다.

"아들들에게 자유를 주고 싶었다."

압달라는 "이 나라를 떠나지 않고 여기서 새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습니다. 이어 거리를 가리키며 "당신이 5년 후에 이집트에 다시 온다면, 그때는 이 거리들이 깨끗하게 단장돼 있을 것이고 모든 면에서 새로운 이집트를 만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뉘엿뉘엿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 전 카이로로 돌아오기 위해 압달라와 헤어져야 했습니다. 그에게 작별 인사를 전했습니다.

"Good luck to you and Egypt(당신과 이집트에 행운이 깃들기를)."

▲ 16일(현지 시각) 이집트 수도 카이로에서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길. 강한 모래바람으로 인해 시야가 좋지 않았다. ⓒ 김덕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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