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악산 국립공원 입구 ⓒ 성낙선
100만의 폭설이 내린 강원도. 온 세상이 하얗게 눈에 덮였다. 도시는 물론이고, 도시 외곽의 들판과 산 모두 하얀색 일색이다. 자동차를 타고 가다 보면, 하얗게 눈이 덮인 들과 산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눈이 부셔서 햇살이 맑게 쏟아져 내리는 날에는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다. 보기 드문 풍경이다. 누구는 이런 풍경 앞에서 시베리아 벌판이 따로 없다는 말도 했다. 100년만에 내린 폭설이 100년 동안 보지 못했던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 권금성 아래, 새하얗게 빛나는 설악산 ⓒ 성낙선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폭설로 도시 기능이 마비되면서 대다수 도시민들이 겪어야 했던 혼란과 일부 산간 마을에 고립된 주민들이 남모르게 감수해야 했던 고통을 생각하면, 허리 위로 쌓인 눈이 그저 징글맞기만 하다.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 그런데 그게 그냥 그렇게 나 혼자 마음을 다잡아 먹는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순백으로 변한 들판과 산비탈에 서 있다 보면, 나도 모르는 새 입이 벌어진다. 땅이란 땅은 모두 하얀 색으로 뒤덮여 있는 이 어마어마한 광경에 시종 초연한 모습으로 일관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저절로 눈이 돌아간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그 새 '아'하고 탄성을 내지른 뒤다.
▲ 눈 덮인 권금성 ⓒ 성낙선
100년만의 폭설, 100년만에 마주하는 장관
이럴 때 생기는 갈등이 참 복잡하고 미묘하다. 재난을 입은 지역에서 한가하게 여가 시간을 즐기는 게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런 부담까지 안아가며 여행을 떠날 생각이 없다. 삼가는 게 예의라는 생각도 든다. 여행을 떠나는데 이것저것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다. 가지 않으면 그만이다.
그렇지만 지역 사정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 지역이 특히 관광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은 경우에는 사정이 더욱 복잡해진다. 재난으로 입은 피해에다, 관광객들의 발길마저 끊겨 생각지도 못했던 이중고를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럴 땐 사실 또 그냥 열심히 놀아주는 게 그 사람들을 제대로 돕는 일이 될 수도 있다.
▲ 발 아래가 아득한 권금성 ⓒ 성낙선
때맞춰 속초시에서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고 나섰다. 폭설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는 바람에 지역 경제가 큰 타격을 입고 있다는 하소연이다. 눈이 그치고 제설 작업에 힘쓴 결과, 관광지로 이어지는 대부분의 도로가 정상을 회복했다고 한다. 여행을 하는 데 큰 지장이 없다는 설명이다.
눈 덮인 산천을 대놓고 홍보하지는 않는다. 100년만의 폭설이 100년만의 장관을 연출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 100년만의 폭설로 100년만의 고통의 겪어야 하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좀 여유를 가질 때가 됐다.
▲ 설악산 케이블카 ⓒ 성낙선
▲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면서 바라다 본 풍경 ⓒ 성낙선
설악산 눈 덮인 산봉우리 아래, 사방이 절경
18일(금) 아침, 설악산에 올랐다. 눈 덮인 설악산을 보기 위해서다. 등산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상태라 등산을 한 것은 아니고, 설악산의 일부분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생각으로 케이블카를 탔다.
'폭설' 때문에 여행을 꺼린 탓인지 관광객들이 그다지 많지 않다. 예전 같으면 이 무렵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보통 30~40분 가량을 기다렸어야 했을 텐데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다. 표를 끊고 나서는 바로 승차다. 케이블카에 탑승한 관광객들 입에서 '한가해서 좋다'는 말이 나온다.
좋은 게 단지 한가한 것뿐일까. 케이블카가 지상을 떠나 고도를 높이면서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일망무제, 발 아래로 내려다보는 풍경이 장관이다. 다들 그 풍경에 압도되어 있는 모습이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권금성'까지 10분 가량을 더 걸어서 올라간다. 권금성에 눈이 두텁게 쌓여 있다.
▲ 권금성 눈비탈 위로 얼굴을 내민 키작은 나무 ⓒ 성낙선
권금성, 눈 덮인 바위 위를 네 발로 올라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사방이 절경이다. 첩첩이 가로막힌 산들이 온통 하얗게 눈을 뒤집어쓰고 있다. 푸른 하늘 아래 하얀 산이, 넓은 하늘이 비좁다 싶을 정도로 꽉 들어차 있다. 장쾌하기 그지 없는 풍경이다. 그 풍경을 뭐라고 말로 다 설명할 길이 없다.
겨울에 설악산에 가 본 사람들은 안다. 왜 설악산을 설악산이라고 부르는지. 설악산은 예로부터 '설산', '설봉산', '설화산'으로 불려왔다. 그 이름들에 하나 같이 '눈 설'자가 들어가 있다. 한겨울, 눈으로 덮여 있는 산봉우리와 계곡을 보고 나면 그 이름이 붙여진 이유를 자연스럽게 깨달을 수 있다.
▲ 신흥사, 유난히 돋보이는 키를 자랑하는 전나무 한 그루 ⓒ 성낙선
이번 폭설로 속초 시내에는 약 60cm, 설악산에는 약 130cm 눈이 쌓였다는 소식이다. 현재 쌓여 있는 눈의 높이는 그보다는 낮아 보인다. 한낮의 기온이 영상을 회복하면서 빠르게 눈이 녹아내리고 있다. 속초시에 따르면, 설악산에서 눈 구경을 하는데 지금이 적기라고 한다. 그래도 2월말까지는 '설악'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진수를 극히 일부나마 여기 사진으로 옮겨 담는다. 영화관에 가서 봐도 부족할, 눈 덮인 설악산을 손바닥 만한 사진으로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다. 내 눈으로 보고 온 것과 사진으로 남은 것 사이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림'이 아니다 싶은 건 모두 내가 그 그림을 그려낼 만한 능력이 없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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