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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14회)

숨겨진 기록 <3>

등록|2011.02.22 09:37 수정|2011.02.22 09:37
대비전엔 거미줄을 늘어뜨린 듯한 기류가 너울거렸다. 끊어진 거미줄은 더듬어 잡을 수 없는 데다 뜯어내려 다가서면 어느 사이 달라붙어 사람의 마음을 불안스럽게 옥죄었다.

내시들의 업무공간인 내반원(內班院)에 몸담은 추내관은 곳곳에 파견한 귀뚜라미같은 내시들의 업무 보고를 반추하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대비마마, 내의원 일이 발견됐다지만 그건 최직장의 주검이 드러났을 뿐입니다. 그 자는 관직이 낮은 처지지만 전하의 총애를 받고 있으니 죽음을 맞이한 건 당연하다 보옵니다."

"그건 그렇소만, 그 일이 주상의 귀에 들어가면 당연히 조사를 명할 게 아니오. 그리되면 기다렸단 듯 형조나 사헌부 관 속들이 궐 안에 들어올 것이고 정약용이란 자도 나설 게 아닙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지난 선조대왕 때엔 기대승이란 자가 성균관 대사성을 지내며 이 땅의 중신들을 얼마나 조롱했습니까. 윤원형 일파가 반대파를 숙청하자 그에 맞서 싸운 신하들에게 내린 공훈을 취소하려 하자 망아지 마냥 날뛰었습니다. 그들은 결코 위훈자(僞勳者)가 아니며 선왕이 정한 공훈을 깎을 수 없다 했습니다."

"하지만, 그 일 때문에 벼슬길에서 물러났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그때도 대국에서 들여온 <초한지>나 <삼국지>를 봐선 안 된다고 했습니다. 조선의 젊은이가 <초한지>를 읽고 강도가 될까 두렵고, 나이든 이가 <삼국지>를 읽으면 더욱 음흉해지기 때문이라 했어요."
"저런, 고이얀."

정순왕후는 마른 침을 삼키며 그 일을 어렵지 않게 기억해내고 있었다. 기대승. 그 자가 맞는 얘길 한지도 모른다. 사실 <삼국지>는 과장이 많은 소설이다. 무엇보다 경계해야할 것은 '한족우월사상(漢族優越思想)'이 짙게 깔려있단 점이다. 그렇다 보니 설문청의 <독서론>을 치켜세워도 거기에 빠져들어선 안 된다는 강변이었다.

'기대승이란 자가 주장하는 게 틀린 말이 아닌 게야. 조선의 젊은이가 도둑떼의 행동을 사모해선 안 되겠지. 나이든 노인네가 갈수록 교활해지는 것도 막아야 하는 거고. 나관중의 <삼국지>에 '젊어선 초한지를 읽지 말고 늙어선 삼국지를 읽어선 안 된다(少不看水滸 老不看三國)'는 경고가 틀린 건 아니야.'

정순왕후 역시 <초한지>나 <삼국지>가 조선의 젊은이를 왜 들끓게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에 대해 상감과 얘기를 나누었을 때, 윤창하를 규장각에 도임하려는 상감은 좌승지를 장인으로 모신 그의 가계를 혀끝에 올렸었다.

"대비마마, 과인이 청암을 규장각에 들여 높이 쓰려는 것은 역사를 보는 올바른 식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청암은 오래 전부터 사숙해 온 기대승의 학풍을 따르고 있는 데다 얼마 전엔 과인에게 차자(箚子)를 올려 조선의 젊은 유생들이 잘못 돼가고 있음을 아뢴 적이 있나이다."

"잘못돼 가다니오?"
"역사를 잘못 인식하고 있다는 탄식이었습니다. 지난 선조대왕 때에도 기대승(奇大升)은 성균관 대사성에 있으면서 <초한지>와 <삼국지>를 읽어선 안 된다는 훈시를 유생들에게 내려 중신들의 탄핵을 받았습니다."

"그래요?"
"요즘 글께나 쓰는 얘기꾼이 <초한지>와 <삼국지>를 요사스런 말로 끼적여 인기를 얻고 있고, 급기야 그 책들을 성균관에 들어올 수 있는 지침서로 삼는단 말이 있어 조선의 유생들을 청암이 크게 꾸짖었습니다. 그런 책들을 읽는 것은 사탕을 먹는 것과 같아 단맛에 취한 어린아이가 이가 썩는 걸 모른다고 탄식했습니다."

"주상은 <삼국지>를 읽어선 안 되는 이유를 아십니까?"
"청암은 첫째, <삼국지>에 나오는 위(魏) · 촉(蜀) · 오(吳)가 단명한 나라란 점을 들었습니다. 위나라는 46년, 촉나란 43년, 오나라는 59년입니다. 이들은 중국의 '25사(史)' 가운데 가장 단명한 나라로 기록도 많지 않은 데다 중국인들도 전연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조선의 유생들이 고작 50년에 불과한 단명 국가를 만드느라 싸우는 <삼국지>를 기준으로 삼는 건 끔찍한 일이라 했습니다."

"으음, 그랬군요."
"둘째로는 <삼국지> 내용에서 배울 게 없다는 점입니다. 상대를 몰아치는 전쟁과 권모술수로 날을 새우는 <삼국지>에 빠지는 것을 교훈으로 삼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중국의 <삼국지>에는 '젊어선 <수호지>를 읽지 말고 늙어서는 <삼국지>를 읽지 말라(少不看水滸 老不看三國)는 경구가 있다 합니다. 혈기가 왕성한 젊은 시절엔 <수호지>를 읽고 강도가 될까 겁나고, 나이가 들면 가뜩이나 교활한데 삼국지를 읽으면 더욱 음흉해질 수 있다는 걸 경고하는 것이라 합니다."

"또 있습니까?"
"셋째는 <삼국지>에서 존경한 인물을 찾아선 안 된다는 점입니다. <삼국지>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제갈공명이라 했습니다만, 알고 보면 그의 실력도 별 게 아니란 것입니다. 천기를 읽는 기문둔갑이 뛰어나기는 하나 자기 나라가 60년도 못 가 망한다는 건 예견치 못한 일개 술수꾼이라 했습니다."

"그렇군요."
"마마, 신라 말의 도선국사는 '개성에 도읍하면 5백년은 갈 것이라 했습니다.' 어떻습니까? 고려는 5백년을 갔습니다. 그런데도 조선의 유생들에게 제갈공명과 도선국사를 비교해 누가 도력이 높은가를 물으면 제갈공명이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순왕후는 그런 걸 대수롭게 생각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그런 느낌 때문에 상감은 나직이 한숨을 몰아쉬며 뒷말을 열었었다.

"마마, <삼국지>의 가장 큰 패악은 사대주의입니다. 나관중의 <삼국지>엔 청류의식과 중화주의가 깔려있습니다. 나관중은 <삼국지>를 지을 때 유비를 성인군자로, 조조와 여포는 악인으로 그렸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 맞닿아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습니까?"
"당시 중원의 지배자는 원나라로 한족이 몽고족의 지배 하에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관중을 비롯한 한족 지식인들은 몽고족의 지배를 받고 있는 한족의  현실을 개탄하고 한족이 위대하다는 중화사상을 밑바탕에 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성인군자로 추앙 받는 유비는 무능한 가장이었으며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양아들을 제 손으로 죽인 비정한 인간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청암은 세상에 떠도는 조조에 대한 식견이나 관점을 들췄다. 조조는 어떤가? 그는 탁월한 정치가였다. 둔전제를 시행해 떠도는 유민들을 안정시킨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런 인물을 환관의 자식이란 이유로 '난세의 간웅'으로 여겼지 않은가.

여포는 어떤가? 몽골 출신의 오랑캐라는 이유로 자신을 보살펴 준 양아버지를 죽인 희대의 악한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유비를 친동생 이상으로 생각한 신의있는 인물이었다. 상감은 무엇보다 <삼국지>에 깔려있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을 경계해야 한다고 힘을 주었다.

정순왕후는 새삼 상감의 행동을 추스르며 윤창하가 머문 곳에서 가져온 붉은 함(函)을 넌지시 내비쳤다. 그가 규장각에 직각으로 도임하는 것을 기화로 잘못된 중원의 역사를 밝히려는 의도를 막은 것은 추내관의 공이었다.

단오 이후 대비전으로 옮겨 온 추내관은, 고려의 중흥을 꿈꾸는 반적들을 이용해 힘을 잃은 벽파(僻派)에게 힘을 실으려 했으나 그게 무리란 생각에 계책을 바꾸었다. 정순왕후가 생각하는 것만큼 상감은 허약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보오, 추내관."
"예에."

"윤창하가 규장각에 가져온 '붉은 함'엔 무엇이 있었는가?"
"동이족의 역사가 있었습니다만, 그 가운데 눈에 띈 것은 당(唐)나라 때의 기록입니다."
"당나라라니?"

"마마께 아뢰었듯, 중원인들이 쓰는 글자는 나중에 한자(漢字)란 이름을 얻었습니다만 그 글자들은 모두 동이족의 글문(契文)인 214자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게 한나라 때에 와서 '한자'라는 이름을 얻게 됐습니다만, 당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자신이 권세를 잡았을 때 '당(唐)'이란 국호를 '주(周)'로 바꾸겠노라 공표했습니다."

"뭐요?"
"게다가, 새로이 측천문자(則天文字)를 만들어 한자를 쓰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 같은 일이 계속 시행됐다면 중원은 말할 것도 없이 이 땅의 선비들도 큰 혼란을 일으켰으리라 봅니다만 측천무후가 세상을 떠나자 다시 원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시파(時派)에서 들고 일어서길 전하께선 바란지 모르겠습니다."
"주상이 바라요?"

정순왕후가 호들갑스럽게 웃자 추내관은 품에서 서찰 하나를 내놓았다. 그것은 상감이 요즘 집필하고 있다는 <홍제전서>의 초고지였다. 평소 잡기를 멀리하고 바둑 같은 것은 두지도 않는다고 소문났었지만 추내관이 내놓은 시구는 전연 뜻밖이었다.

물이 휘돌아 흐르는 곳 정자가 몇인가
그대 주인되어 그곳에 돌아가는구나
고깃배는 비를 맞으며 밀물 따라 들어오고
바둑판은 주렴 아래 종일 한가롭구나

상산의 네 늙은이처럼 사는 것도 좋겠으나
반백이 노인을 흉내내는 건 좋은 게 아니로세
와유정에서 좋은 경치 보기를 마다치 마시고
저녁풍경 그림에 남기는 것 잊지 말게나

멀리 지방으로 떠난 신하를 격려하는 내용으로 군신간의 정이 도타워 보이는 내용이나, 좀 더 들여다보면 자신과 바둑 두던 사람이 떠났으니 주인 잃은 바둑판이 외롭다는 걸 나타낸다.

"대비마마, 상감께선 문인들을 아낀 고상한 취미가 있사오나, 이 시에서 보는 것처럼 바둑을 둘지 모르는 게 아니라 상당히 고수(高手)란 느낌입니다. 아끼는 신하를 바둑판 가까이 불러 계책을 강구할 것이니 그 자들이 전하 가까이 다가서면 소인이 계책을 쓸까 합니다."

∎문방아기(文房雅技) ; 문인들이 아끼는 고상한 취미
∎청암(淸岩) ; 윤창하의 호
∎기대승 ; 선조 때 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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