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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15회)

금서(禁書) <1>

등록|2011.02.25 09:28 수정|2011.02.25 11:31
추일환은 내관이지만 향랑공이다. 전임 이공수 내관이 역모에 휩싸여 목숨을 잃은 뒤 독보적인 그의 솜씨와 아호까지 이어받은 그가 대비전에 온 것은 부드러움(女)이 강함(男)을 이긴다는 간단한 논리 때문이었다. 물론 그가 살았던 곳은 이공수 내관이 머물던 운니동(雲泥洞)이다.

운니는 운현궁(雲峴宮)과 니동(泥洞)의 머리글자를 떼어 만든 지명으로 그 역할은 1914년 4월 일제의 대단치 않은 노력이지만, 어쨌든 운니는 '구름'과 '진흙'이 어우러졌음을 알 수 있다. 나라를 다스리는 상감 가까이 있으니 '구름'을 타는 허망한 위세가 있었고 꿈에서 깨어 현실로 돌아오면 '진흙' 속을 나뒹구는 허접 떠는 똥개 꼴이었다.

그래도 그들은 상감 곁에서 권세와 노닥거리는 생활을 좋아했다. 왕과 그 일족이 생활하는 공간이 궁(宮)이고, 신하들이 왕과 사무를 보고 업무를 처리하는 공간이 궐(闕)이다.

그러므로 내시들은 궐 안에 들어와 업무를 보고 정해진 시간에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궐 안엔 이들 내시들이 140명 근무 했는데 가장 윗전인 종2품 상선(尙膳)에서 종9품 상원(尙苑)에 이를 때까지 다 마찬가지다.

궐 밖엔 내시들이 양자를 얻을 수 있고 생활할 수 있는 거처가 있다. 이들은 왕이 사는 곳과 가까운 지역에 끼리끼리 어울려 마을을 이루었다. 내시촌(內侍村)이다.

조선시대 내시들은 '화자동(火子洞)'이란 곳에서 살았는데 나중엔 민망스런 이름을 효자동(孝子洞)으로 바꾸고 그럴싸하게 거처를 꾸몄으며, 가끔은 한양의 사대문 안팎에 정하고 출퇴근에 용이하게 했다.

전임 상선을 지낸 이공수는 궐 안에 들어와 잠시 대전에 있다 정순왕후 눈에 들어 대비전으로 옮겨와 적지않게 큰일을 치러냈다.

그 공으로 '화자동'의 경치 좋은 곳에 널찍한 집터를 마련했는데 이곳에 추일환이란 소년이 찾아와 내시가 되겠다고 울먹이자 그를 받아들였다. 그의 아비는 왕궁 수비대 금위영(禁衛營)의 군관으로 나라의 재물을 통 크게 꿀꺽한 장닉죄(藏匿罪)를 저질러 당사자는 목이 달아나고 그의 아내와 아들은 관비로 끌려갈 처지였다.

평생을 관아의 돼지우리같은 뒷방에서 살 걱정을 하던 어미가 목을 매 세상을 버리자 어린 소년은 화자동(火子洞)의 이공수 내관을 찾아와 자신의 쌍방울과 거시기를 잘라내 한평생 '권세의 구름바다' 속에서 살겠다고 옹골진 마음으로 이를 악물었다.

그는 이공수의 손끝에 거시기와 쌍방울이 잘렸다. 집 안으로 보면 일평생 조상의 제사를 지낼 수 없는 반면, 향기를 맡을 수 없는 꽃들이 널비한 내시부(內侍府)에 들어가 품계를 받지 못한 채 '눈치'를 배웠다.

그것은 세상일을 적당히 메우는 잔재간이 아니라 궐에 들어온 처녀들의 습성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 연약한 여인이 사내를 넘어뜨리는 방법 등을 일일이 추려뽑아 비망(備忘)의 수첩에 적어 머릿속에 집어넣어 암기했다.

이것이 모두인가? 아니었다. 어린 그가 궐에 들어와 나이가 차 상원(尙苑)에 이르렀을 때는 궐 밖에 있는 여인을 이용해 전하를 공격하던 네 해 전의 역모가 드러난 시기였다.
이공수는 자신이 거사에 나서기 전, 고작 스물 셋인 추일환을 아들로 삼아 대비전에 들렸다.

"대비마마, 토끼는 자신의 위난을 피하기 위해 굴을 셋이나 판다고 했습니다. 우매한 소인도 그렇게 했으나 능력이 따르지 않아 고작 이 아이 하나만 찾아냈습니다. 그것이 소인에겐 적들을 건곤일척(乾坤一擲)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 소인이 세상을 버려도 이 아이가 대비마마를 뫼실 수 있으니 안심하셔도 되리라 봅니다."

대비전을 물러나온 이공수는 집으로 돌아와 궐 안 생활을 혀 끝에 올렸다.

"일환아, 네가 터를 내린 곳은 내시부지만 적(籍)은 대비전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마마께서 너에 대한 소문을 들은 바 없다만은, 그것보다 네가 알아야 할 것은 궁(宮)이나 궐(闕)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곳이 적지 않다는 걸 기억하거라. 더구나 대비전은 무수리나 나인들이 드나드는 곳이기에 여인의 움직임에 세심한 주의를 표하는 것이 좋다."

당부의 말을 마치고 이공수는 보자기에 싼 물건을 건네주었다. 평소에 자주 보던 방술서(方術書)를 비롯해 <찰요(察要)> 등의 비기서였다.

날이 지나 추일환이 대비마마의 보살핌으로 서른도 못된 스물 일곱에 상선(尙膳) 자리에 오르자 어느 날 자신의 진면목을 나타낼 뜻밖의 말을 하여 정순왕후를 긴장시켰다. 그곳은 엿듣는 이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대비전 밀실이었다.

"대비마마, 전하께서 장번 내시(長番內侍)들을 뒤바꾼 것으로 보아 전하 곁에 나인이나 무수리가 가까이 오는 걸 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오니 일단 물러났다가 전하의 주변 사람들을 엮어 나가면 전하께서 함부로 생각할 것이니 그때에 미인계를 쓰는 게 가하다고 봅니다. 해서···."

"다른 방법이 있다?"
"예에."

"뭔가?"
"금서(禁書)이옵니다."
"금서라니?"

"조선엔 백성들이 읽어서는 안 될 서책이 있습니다. 그게 나라에서 정한 '금서(禁書)'로 선대왕 때엔 열일곱 종류인데 금상이 보위에 앉으신 후 두 종류가 더해 열아홉으로 늘어났습니다. 전하 때에 많아진 것은 <정감록>을 비롯하여 <송하비기>가 있었기 때문인데 이런 책들은 문인방이나 송덕상의 역모사건 때문으로 보입니다."

"추내관이 열아홉이나 되는 '금서'를 이용한다는 게요?"
"모두를 이용하는 건 아닙니다."
"하면?"

"전하께서 규장각에 서얼을 따지지 않으신 채 각신(閣臣)을 두고, 책임자인 직각(直閣)에 윤창하를 임명한 것은 학문을 좋아하는 것 뿐만 아니라 편당을 이루는 정치를 타파하고 백성들이 살기 좋은 나라라고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그러나?"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규장각에서 하는 일에 '정령형상(政令刑賞)'이란 게 있습니다."
"있지요."

"역대 왕조의 실록을 뒤적여 죄를 지은 자에게 벌이 올바로 내렸는지, 선한 일을 한 자에게 상이 올바로 집행됐는지를 따집니다."
"그런다고 들었습니다."

"대비마마, 전하가 이 일에 손댄 것은 채제공의 주청이 있기 때문이지만 엄밀히 살피면 이 일은 전하의 원대한 계획의 일부일 뿐입니다. 전하께서 유배지에 있는 정약용을 십여일 만에 불러올린 일은 개혁의 의지가 없는 벽파(僻派) 때문만은 아니옵니다."

"다른 뜻이 있습니까?"
"겉으론 벽파의 힘을 분쇄한다는 의미가 있지만, 한걸음 더 파고들면 임오년에 세상을 떠난 사도세자의 묘역을 깨끗이 단장하여 왕권(王權)을 단단히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은 짐작했던 일이 아닙니까?"
"대비마마,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섰을 때 태조대왕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도읍지를 옮기는 천도(遷都)였습니다. 고려의 실권자들은 어쨌습니까? 도읍을 옮기는 일은 절대 안 된다고 반대했지요. 그러나 태조대왕께선 한양을 새로운 도읍지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되니 고려의 옛 땅에 기득권(旣得權)을 주장하던 대신들은 꼼짝없이 빈 몸으로 따라왔으니 왕권이 설 수밖에 없었지요."

"허면, 주상은 왕권을 강화하는 게 목적이오?"
"그런 점도 있습니다만. 소인의 생각엔 사대부들의 힘을 빼앗으려 수원에 성(城)을 쌓을 계획인가 봅니다."

"성을 쌓아요? 한양은요?"
"당연히 이곳은 휴가철에나 한두 번 들르게 되는 별궁(別宮)이나 이성(離城)이 되겠지요."
"허어!"

"그런 점을 늦추게 하고 벽파 대신들이 방책(方策)을 마련하려면 무엇보다 전하가 하고자 하는 계획에 균열을 가져오게 해야 합니다."

"그 균열에 적합한 것이 금섭(禁書)니까?"
"그렇습니다. 좌승지와 윤창하가 손을 댔던 '정령형상(政令刑賞)'에 덫을 깔아야 합니다. 조선을 칼로 좌지우지 했던 훈구파(勳舊派)가 저지른 악행을 그대로 맛보게 해야 합니다."
"가만, 가만! 그 덫이란 게 뭔가?"

"항아리에 들어있는 기록입니다. 그것을 궐 안에선 <호중록(壺中錄)>"이라 부르지요."
"흐음, <호중록>을 이용해 덫을 놓는다?"

정순왕후는 입언저리를 가리지 않고 호들갑스럽게 웃어댔다. 그것은 아주 흥미롭고 입맛 다셔지는 얘기였다.
"오호호호!"

[주]
∎금서(禁書) : 민간인들이 보아선 안 되는 책
∎<호중록(壺中錄)> : 항아리에 들어있는 기록
∎<찰요(察要)> : 관상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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