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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행 실패 <프레지던트>, 두가지 질문은 유용했다

시청률 한 자리 수 '웰메이드' 드라마를 위한 변명

등록|2011.03.02 11:45 수정|2011.03.02 11:55

▲ KBS수목드라마 '프레지던트' 타이틀 사진 ⓒ KBS


'당신이 장일준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KBS 드라마 <프레지던트>(극본 손영목 정현민 손지혜, 연출 김형일)가 결국 시청률 한 자리수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지난주 아쉬움 속에 막을 내렸다. 겉보기엔 초라한 성적표지만 드라마의 여운은 길게 남았다. 한국 최초의 '본격 정치 드라마'를 내세웠던 이 드라마가 우리 사회에 남긴 질문은 무엇일까.

80년대 이후 한국 현대사가 걸어온 길, 장일준

시청률이 낮았던 만큼 설명을 해두는 편이 좋겠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드라마 <프레지던트>는 대통령을 소재로 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다. 이 드라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중심에 서 있는 주인공 장일준(최수종 분)이라는 독특한 인물을 이해해야 한다.

장일준은 80년대 서울대 법대에 입학해 군부 독재에 저항하다 하나뿐이던 형과 함께 이른바 '형제 간첩단 사건'으로 투옥된다. 그의 형은 누구보다 진지하게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인물이었으나 학생운동에 나서기보다는 묵묵히 훗날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일준은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하게 되고, 결국 그로 인해 아무 죄가 없던 형은 사형을 당하고 만다. 일준의 곁을 떠나기 전 그의 형은 수의에서 뽑은 실과 자신의 몸에서 짜낸 피로 그동안 연구해온 새로운 사회의 청사진을 성경책 곳곳에 빼곡이 적어 일준에게 남긴다. 그리고 그것이 장일준의 무서운 권력 의지를 뒷받침하는 근간이 된다.

그 뒤 일준은 시민운동가로 살아가다 독일로 유학을 떠나게 되고, 그곳에서 한국에서 손꼽히는 대기업인 대일기업의 외동딸 조소희(하희라 분)를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조소희와 그의 아버지 조태호 회장이 사랑한 것은 일준의 '야망'이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일준은 보수 성향의 정당에서 정치 인생을 시작하게 되고, 젊고 깨끗한 이미지에 명석한 두뇌와 달변으로 국회에 입성한 뒤 내리 3선에 성공한다. 그리고 마침내 마흔아홉의 젊은 나이에 당내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사표를 던진다. 드라마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마치 격동의 80년대를 지나온 대한민국이 3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했음을 상징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주인공 장일준을 보며 가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오르기도 했다. 청년 장일준이 시민운동가로서 철거민들의 곁을 지켰듯이 청년 노무현도 인권변호사로서 노동자들의 곁을 지켰던 적이 있다. 무모한 도전 끝에 밑바닥에서부터 바람을 일으키며 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과정도 그렇고, 위기 때마다 벼랑 끝에서 한 발을 더 내딛던 승부사의 기질도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주관적 평가이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노 전 대통령이 국민의 힘을 믿고 국민에게 도움을 구하기보다는 자신의 판단을 더 신뢰하면서 자신의 방식대로 어려움을 돌파해 나가려했다는 점도 드라마 속 장일준과 겹쳐보였다. 특히, 막걸리를 앞에 두고 농민들을 상대로 한미FTA의 정당성을 설득하던 장일준의 논리는 바로 노 전 대통령의 그것이었다.

제법 잘 만든 정치 드라마가 남긴 첫 번째 질문

▲ KBS2 수목드라마 <프레지던트>의 한장면. ⓒ 필름이지 엔터테인먼트 제공


이 드라마는 최수종-하희라 부부의 동반 출연이 화제가 됐을 뿐 그밖에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배우를 내세우진 않았다. 주인공 곁을 지키는 선거 캠프의 참모들과 쟁쟁한 경쟁 후보들은 어디선가 본 듯한 중견 배우들로 꾸려졌고, 오랜 준비를 거친 듯 잘 준비된 대사와 배우들의 안정된 연기 덕에 드라마는 마치 실제 여의도 정치판을 옮겨놓은 듯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특히, 어울리지 않을 것 같던 해외파 정치 컨설턴트 기수찬 역의 김흥수가 자기 역할을 훌륭하게 소화해낸 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

이 드라마의 힘은 무엇보다도 잘 짜인 이야기에 있다. 주인공 장일준이 밑바닥에서부터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설 때마다 어려움과 맞닥뜨리게 되고, 이를 전혀 생각지도 못한 대담한 방식으로 돌파해나가는 모습이 바로 드라마의 매력이자 힘이었다. 그리고 결국 일준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권좌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시청자들은 그의 승리에 온 마음을 다해 박수를 보내지 못한다. 그가 어려운 고비마다 내린 선택들이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들은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 '옳은 이상을 위해서라면 부정의한 수단을 사용해도 되는가'라는 아주 오래된 질문이 그것이다.

장일준의 선택은 우리들 머릿속에 새겨진 정치의 정도(正道)로부터는 멀었다. 상대 후보의 스캔들을 언론에 흘리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표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토록 혐오하던 구시대의 썩은 정치인들에게도 주저 없이 무릎을 꿇고 손을 내미는가 하면, 자신의 참모가 청와대 서버에 침입해 상대 후보의 핵심 정책을 빼내온 불법 행위마저 묵인한다. 물론 그 모든 선택의 뒤에는 그럴듯한 명분이 뒤따랐다. 상대가 저지른 더 큰 악을 넘어서기 위한 약자의 정당방위쯤으로 설명되거나, 자신이 모르는 새 참모들이 저지른 일로 그려지곤 했다. 때로는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드라마 속 주인공의 선택이, 그것도 대통령을 꿈꾸는 주인공의 선택이 우리들에게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다.

"군주는 인간에게 합당한 방도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야수의 짓을 교묘히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 (<군주론> 18장. 군주는 어떻게 신의를 지켜야 하는가)

누군들 이 명제에 선뜻 동의하긴 어렵겠지만, 이 명제가 담긴 책은 무려 50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을 넘어 지금까지도 고전으로 읽히고 있다. 그만큼 어려운 문제라는 얘기다.

드라마가 남긴 두 번째 질문,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 KBS 드라마 '프레지던트' ⓒ KBS


조금 더 쉬운 질문, 아니 조금 더 쓸모 있는 질문을 던져보기로 하자. '만약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하는 질문이다. 당장 내년에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생각이 없는 이라면 이런 질문도 괜찮다.

'진보·개혁진영의 후보라면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알다시피 지지율은 턱 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시작한다. 돈도 없고, 물론 변변한 조직도 없다. 상대 후보는 화수분이라도 숨겨뒀는지 끝없이 돈을 뿌려대며 사람들을 구름처럼 몰고 다닌다. 법에 기대고 싶지만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검찰이 살아있는 권력을 상대로 칼을 뽑을 것 같지는 않다. 선거에서 이기기만 하면 모든 게 묻히고 만다는 뜻이다.

TV 토론회에서 눈물어린 호소로 국민의 마음을 움직여보겠다는 당찬 포부도 가져볼 수는 있다. 드라마 <대물> 속 서혜림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드라마를 두고 '정치 동화'라며 비아냥대던 것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현실에서는 깨진 독의 구멍을 막아줄 두꺼비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역시 진보·개혁진영이 기대를 걸어볼 만한 것은 '정책 선거'뿐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과연 우리는 '정책 선거'를 하면 이길 준비가 돼 있긴 한 걸까. 아니, 대체 '정책 선거'를 어떻게 하는지 알고 있긴 한 걸까.

정책 선거를 하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경쟁 후보보다 나은 정책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결국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유권자들에게 전달이 되고, 유권자들의 마음을 움직여 표로 이어질 때만이 비로소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정말 어려운 것은 정책을 만드는 일보다 정책을 전달하고 설득하는 일일지 모른다. 게다가 대한민국 유권자들은 정치인들이 힘주어 이야기하는 정책에 귀를 기울일 만큼 대한민국 정치(인)를 신뢰하거나 애정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드라마 속 장일준의 부정의한 선택을 옹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가 당내 경선 과정 내내 정책 대결을 통해 유권자의 마음을 얻기보다 온갖 권모술수를 동원해 표를 긁어모으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만큼은 이해한다. 그것은 그가 상대했던 경선 선거인단의 대부분이 후보들의 정책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정당당하게 '정책 선거'를 할 수 있는 토양 자체가 마련돼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기실 드라마 밖 대한민국의 정치 현실도 드라마 속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부정의한 선택을 불편하게 지켜보면서도 간단히 채널을 돌릴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한국의 <웨스트 윙>을 기대한다

▲ KBS2 수목드라마 <프레지던트>의 한장면. ⓒ 필름이지 엔터테인먼트 제공


드라마 <프레지던트>에는 생각보다 굵직한 정책들이 등장했다. 어느 정치인의 회상을 빌려 '무상 의료' 정책의 정당성을 눈물로 호소하는 장면이 등장하는가 하면, 한미FTA의 필요성을 주장하면서도 한국 농업의 새로운 과제로 '국민 농업'이라는 전망을 제시하기도 했다. 마지막 회의 TV 토론 장면에서는 최근 정치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는 복지 정책의 재원 마련 방안을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이 장면에서 장일준은 '사회복지세' 신설이라는 다소 파격적인 주장을 선보이기도 했다. 물론 낮은 시청률로 어느 것 하나 관심을 끌지는 못했지만, 그저 권모술수만 판치는 드라마였다는 평가는 아무래도 억울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KBS가 만든 첫 정치 드라마로서 이 정도면 충분히 가능성을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4년 연속 '에미상 최우수 TV 드라마 시리즈상'을 수상하며 정치 드라마의 새로운 길을 연 <웨스트 윙(The West Wing, 1999~2006)>에는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정책들이 등장한다. 드라마 속 대통령과 그의 보좌관들은 그 수많은 정책들을 두고 끊임없이 논쟁한다. 그들의 상대는 공화당 의원들이기도 하고 이익단체의 성원들이기도 하다. 때로는 각료들과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물론 자신들끼리 맞부딪치기도 한다.

논쟁의 밑바닥에는 대개 정부의 역할과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이라는, 미국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가치관의 대립이 자리하고 있지만, 어쩌면 그래서 더더욱 그들의 논쟁은 모호하지도 얄팍하지도 않다. 논점을 비껴가거나 어설프게 균형점을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물론 실제로 백악관이 그렇게 운영된다고 믿진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논쟁을 지켜보는 미국 시청자들의 정치 의식과 관심도 그만큼 성장해나갈 것이라 생각한다.

한국 사회에서의 정치적 선택은 미국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그래서 어쩌면 국민의 입장에서 알아야 할 것이 훨씬 더 많은지도 모른다.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들어가야 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열심히 신문 정치면을 열심히 들여다 보거나 늦은 시간까지 졸음을 참으며 시사 토론 프로그램을 지켜보기에는 우리 국민의 삶은 너무 고단하다. 게다가 앞서도 말했지만 그렇게 힘들게 관심을 기울일 만큼 정치나 정치인에 대한 애정도 크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우리가 그토록 바라마지 않는 '정책 선거'라는 것은 과연 가능할까. 그것도 '복지'라는 대단히 구체적인 주제를 두고 벌이는 정책 대결에서 말이다.

<프레지던트> 시즌2가 제작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드라마 한 편이 무엇을 얼마나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라도 대한민국 정치가 국민들에게 한발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기를, 그리하여 우리 사회의 정책 공론장이 더 넓어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는 만큼 더 좋은 드라마가 만들어질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웨스트윙> 시즌8보다 <프레지던트> 시즌2가 더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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