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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교사는 정교사가 아니라고?

등록|2011.03.02 15:44 수정|2011.03.02 15:44
<촘스키처럼 생각하는 법>에는 논쟁이 뜨거운 사회 문제 등에서는 단어 선택이 중요하다며 낙태 찬반 토론의 예가 제시되어 있다. 토론자는 자신을 '생명을 중시하는 사람'이나 '선택권을 중시하는 사람'으로 표현하지, '생명을 반대하는 사람'이라거나 '선택권을 반대하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토론자 입장을 어떻게 표현하고 소개하느냐에 따라 같은 주장인데도, 청중의 지지가 달라질 것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언어가 어떻게 인식을 바꿀 수 있는지 실증하는 사례도 소개하고 있다. 1992년 미국 국제식품정보협회는 식품생명공학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바꾸고 홍보 방향을 결정하기 위해 대대적인 조사를 시작했는데, 긍정적인 단어를 집중적으로 사용할 것을 강력하게 권고했다는 것이다. 아름다움, 풍요, 어린이, 선택, 다양성, 흙, 유기물, 유전, 미래 세대, 근면, 개선, 청결, 완전함 등과 같은 단어는 사용하되, 생명공학, 경제, 실험, 산업, 실험실, 기계 장치, 돈, 살충제, 이익, 방사능, 안전, 연구원 등은 절대적으로 사용을 금지하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사용되는 말 같지만, 말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교육 현장에서도 종종 경험하게 된다. 언젠가 응급처치 관련 토론회에 참석했다가, 학교에서 응급처치 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는 보건교사가 정교사가 아니어서 교육을 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듣게 됐다. 요지는 학교의 교사마다 지위가 다른데, 보건교사는 정규 교사가 아니라는 것.

청중석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바로 반론을 펼 수 없어서, 토론이 끝나고 청중과의 질의응답 시간에 기회를 얻어, 초중등학교 교사 제도에 대하여 설명을 했다. 초중등교육법 제21조제 2항에 따르면, 교사는 정교사(1급·2급)·준교사·전문상담교사(1급·2급)·사서교사(1급·2급)·실기교사·보건교사(1급·2급)영양교사(1급·2급)로 구분되고, 정교사는 교사의 종류일 뿐, 정식 교사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규정이 아니라고 한참을 설명했더니, 그제서야 토론자와 청중들이 이해를 했다. 심지어는 어느 지역에서는 교육청 관계자가 보건교사 연수에서 보건교사는 정교사가 아니니, 보건수업 시간에는 정교사가 수업을 참관하여야 한다고 발언했다가, 사과를 한 경우도 있었다.

처음에는 그 분들이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사례가 되풀이되다 보니, 결국 '정교사'란 단어의 횡포가 주원인임을 깨닫게 됐다. 현재 초중등교육법의 정교사는 중등학교의 경우 교과교사를 의미한다. 즉 국어, 영어, 수학, 음악, 체육, 양식, 농업, 섬유 등 교과목을 지도하는 교사를 뜻한다. 또 초등학교, 유치원, 특수학교의 경우에는 여러 과목을 한꺼번에 지도하므로 교과목 대신 학교급별에 따른 정교사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그런데, 국어 사전에 따르면 정교사(正敎師)는 교과교사 및 급별교사 뿐만 아니라 학교에서 정식 교사로 근무하는 교사도 지칭하기 때문에, 부지불식간에 정교사 외의 교사는 정식 교사가 아닌 것처럼 인식될 우려가 있다. 또 '정'(正)'이란 단어가 '바른', '온전한' 등의 뜻이 있기 때문에 정교사만이 교육의 자격이 있고, 전문성이 있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

실제, 보건교사의 경우 '보건'과목이 있고, 양성 및 임용 과정이 정교사와 동일하지만, 정교사가 아니란 이유로 연수, 승진, 보직 등에서 차별이 현존하고 있다. 승진, 연수, 보직 등이 모두 '정교사' 독점 구조로 되어 있는데도, 입법자 등이 볼 때는 '정(正)'이란 단어 때문에 그 문제점이 쉽게 보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정교사란 단어를 '교과교사'나 '급별교사'로 바꾸어보면 어떨까. 학교와 교육을 다양화하고 교육에서 공정한 기회를 강화하겠다는 입법자들이 교사 중에서 교과교사나 급별교사만 승진, 연수, 보직 등을 독점하거나, 유리하도록 고착된 정책을 그대로 두어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2007년 학교보건법이 개정되면서, 2009년부터는 모든 학교에서 모든 학생이 보건교사에게 보건교육을 받아야한다. 법률우위의 원칙에 따르면, 고시수준의 교육과정이 개정되더라도, 보건교육과정은 우선 적용하여야 하지만, 보건교육의 현실은 정교사의 말꼬리 논란 속에서 여전히 어렵다. 어디 교육계뿐이랴. 객관성을 유지하는 듯 하면서도 편향성을 주입하는 것이 왜곡의 방법이라니, 새삼 말의 힘이 두렵다.
덧붙이는 글 이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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