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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저절로 진보하지 않는 이유는?

[강신주의 정치철학 특강 2부 ③] 역사철학, 혹은 기억의 투쟁 - 역사철학테제1

등록|2011.03.06 17:23 수정|2011.03.06 17:23

▲ 강신주 박사가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대회의실에서 '정치철학 특강 시즌2' 강의를 하고 있다. ⓒ 권우성


"예전에 보릿고개 시절이 있었죠? 혹시 우리에게 보릿고개가 있었던 시절보다 박정희가 경제개발해서 보릿고개가 없어진 시절이 더 나아졌다고 생각하세요?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면 벤야민은 배우기 어렵습니다. 두 시절이 '똑같다'고 느끼는 감각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이 벤야민을 이해할 수가 있어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경제개발이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에서는 보릿고개가 사라졌다. 그렇다면 박 전 대통령 이후는 이전보다 나아졌다고 할 수 있을까? <철학 VS 철학>의 저자 강신주 박사는 "억압받는 자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나아진 것이 없다"며 "나아졌다고 말하는 순간 여러분은 조갑제를 비판할 수 없다"고 말했다(굶는 사람이 줄어들었으니 나아졌다고 말한다면 박정희 정권의 경제적 치적을 긍정하는 사람을 비판할 수 없다는 뜻이다).

강 박사는 지난 2월 23일 <오마이뉴스> 강의실에서 '정치철학 특강 시즌2 - 역사철학, 혹은 기억의 투쟁'이라는 주제로 강의했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교재로 진행된 이날 강의에서 강 박사는 "벤야민은 계속됐던 억압의 역사를 들어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고 말했다"며 "우리 대부분은 지금 자신의 삶이 위기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벤야민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

유대계 독일인으로 마르크스주의자인 발터 벤야민은 <일방통행로> <역사철학테제>를 쓴 철학가이며 다수의 평론작을 남긴 문학평론가다. 강 박사는 벤야민에 대한 본격적인 강의에 앞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설명과 함께 강의를 시작했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현대에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이유는 '비자발적 기억'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설을 보면 마들렌이라는 빵을 홍차에 풀어서 스푼으로 한입 떠먹자 순간적으로 유년의 기억이 펼쳐지는 장면이 있어요. 이게 왜 중요하냐면 왜곡되지 않은 무의식적인 기억이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의식적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들을 아름답게 채색해서 기억하는 경향이 있기 쉽습니다. 맞아서 생긴 흉터를 보면 순간적으로 폭행에 대한 기억이 확 떠오르죠? 비자발적 기억이란 그런 식으로 왜곡되지 않은 기억을 의미하는 겁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20세기 인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 작품을 독일어로 번역한 사람이 벤야민입니다."

벤야민은 자본주의의 '비자발적 기억'들을 통해 자본주의를 해부하려 했다. 마르크스주의를 접한 벤야민은 자본주의를 일거에 붕괴시킬 수 있는 작업을 하기위해 자본주의가 실질적으로 뿌리를 내렸던 19세기, 세계 자본주의의 중심이었던 파리로 향했다. 강 박사는 "벤야민은 왜곡되지 않은 '진짜 자본주의'를 알기 위해 파리에서 10여 년 동안<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마들렌' 같은 것들을 모으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 중 파리가 독일군에게 함락됩니다. 평소 히틀러를 비판했던 벤야민은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스페인으로 도망가던 중 여의치 않자 자살을 해요. 그리고 그가 남겼던 자료들을 1980년대 이후 조르주 아감벤이라는 이탈리아 철학자가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찾아내 책으로 묶어냅니다. 이 책이 19세기 자본주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는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책입니다. 그리고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역사와 변증법에 대한' 자료묶음들을 토대로 <역사철학테제>가 쓰여지거든요. <역사철학테제>는 말하자면 벤야민의 사활을 건,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것의 종결점이죠."

▲ 강신주 박사가 '정치철학 특강 시즌2' 강의를 하고 있다. ⓒ 권우성


"우리의 삶은 매 순간이 비상상태"

벤야민은 <역사철학테제>8에서 "억압받은 자들의 전통은 우리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비상사태'가 상례임을 가르쳐 준다"며 "우리는 이에 상응하는 역사 개념에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썼다. 강 박사는 "벤야민의 역사철학을 이해할 때 '비상사태(Ausnahmezustand; state of emergency)'라는 개념과, '비상사태는 억압이 존재했던 모든 시대에 항상 존재했다'는 생각이 매우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파시즘이나 독재나 권력이나 전체주의는 사실 다 '우리는 진보의 방향으로 갈 테니까 너희들은 우리를 따라와라'하는 식이에요. 그런데 억압받는 입장에서 보면 고대 이집트 때 작용했던 억압이 20세기에도 여전히 가능하거든요. 다만 억압하는 양식만 세련되어 진거죠. 그러니까 '역사는 진보하지 않는다'는 것이 벤야민의 생각이에요."

강 박사는 "진보란 우리들이 진보시키지 않으면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며 "역사가 (알아서) 진보한다는 생각은 인간을 역사의 방관자로 만들어버리기 쉽다"고 말했다. 노예가 있었던 시절보다 지금이 나아졌다는 생각, 혹은 봉건제가 지배하던 시절보다 지금 자본주의의 시대가 나아졌다는 생각이 지금 자신의 삶이 위기에 빠져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기 쉽게 만든다는 얘기다.

강 박사는 "벤야민이 '매 순간이 비상상태'라고 강조했던 것은 우리의 삶이 항상 비상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비상상태를 비상상태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비상사태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그에 대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비상사태라는 것은 달리는 폭주기관차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억압이라는 이름의 이 폭주기관차는 유사 이래 미친듯이 달려왔어요. 만약 내가 '폭주하는 기관차에 타고 있다'는 비상사태를 자각하게 되면 어떻게든 브레이크를 당기겠지요. 벤야민에 따르면 이럴 때 우리는 (진보라는) 메시지를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메시아(구원자)가 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강 박사는 "독재정권의 억압을 받으며 70년대를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들 사이에서 동학농민혁명이 재발견되었던 이유는 동학혁명의 모든 이미지들이 비자발적 기억의 형식으로 그들을 감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각각의 개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메시아가 되기 위해서는 '지금이 바로 비상사태'라는 인식이 필요하며 인식 후에는 그에 걸맞은 행동이 동반된다는 얘기다. 그는 "구체적인 행동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벤야민의 '비상사태'는 마르크스의 '대상적 활동'과도 같은 맥락"이라고 말하며 강의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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