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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들은 원래 저렇게 '구라'가 심하냐 안상수가 뭐 했다고, 부실수사가 귀감인가"

[인터뷰] 박종철 열사 부검 지휘한 최환 전 공안부장

등록|2011.03.08 14:33 수정|2011.03.09 10:14

▲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가 4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린 '박종철 열사와 6월 민주화 운동' 자신의 출판기념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유성호


지난 4일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는 국회에서 성대하게 열린 자신의 저서 <박종철 열사와 6월 민주화 운동> 출판기념회에서 '민주화의 영웅'이 됐다.

박희태 국회의장은 축사로 "5공화국 말 6월 민주화 항쟁은 우리 안상수 대표의 양심적인 정의감이 이뤄낸 일"이라며 "민주화 투쟁의 영웅이 바로 안상수 검사"라고 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는 "안상수 대표뿐 아니라 이재오 장관님은 감옥에 5번이나 갔고, 나는 2번밖에 안 갔다"며 "우리 한나라당에는 이렇게 민주주의를 위해 일한 기라성 같은 희생자와 일꾼들이 있다"고 했다.

안 대표가 낸 책은 지난 1994년 11월 동아일보에 연재된 바 있고, 1995년 3월 <이제야 마침표를 찍는다>는 제목으로 출간, 3년 뒤 <안 검사의 일기>로 재출간됐다가 이번에 다시 제목을 바꿔 재출간됐다. 서울지방검찰청 형사2부 검사였던 안 대표가 1987년 1월 14일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열사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과정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안 대표는 출판기념회에서 "6월 민주화운동에 이르는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된 책 중에서 이 책 내용이 가장 풍부할 것"이라고 했지만 이 책에서도 기술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 14일 박종철 열사가 숨진 시점에서부터 경찰이 검찰에 정식으로 사건접수를 하는 15일 오전 사이에 일어난 일들이 빠져있다.

안 대표의 책에 따르면, 안상수 검사는 87년 1월 15일 지검으로 출근한 뒤 최환 공안부장의 지휘를 받아 이 사건을 맡으라는 지시를 받았다. 최 부장은 당시 안 검사가 사건을 맡기 전부터 이 사건을 처리하는 문제로 경찰 측과 줄다리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 대표의 저서에는 당시 경찰의 사건 은폐·축소 시도가 있었던 매우 중요한 부분이 빠져 있다. 

안상수 지휘한 최환 "안상수가 한 일이 뭐 있다고"

▲ 최환 변호사 ⓒ 이정환

최환 부장은 지난 1999년 부산고등검찰청 검사장을 끝으로 검찰에서 나와 변호사로 개업했다. 그는 7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 인터뷰에서 안 대표의 저서 얘길 꺼내자마자 "자기가 한 일이 뭐 있다고… 너무 하는 것 아닌가"라고 역정을 냈다. 그러면서 최 변호사는 안 대표의 저서에서 빠진 '14일 밤'의 일을 소상히 말했다. 그날 밤의 일을 재구성하면 이렇다.

87년 1월 14일 밤 7시 40분 경 경찰 2명이 최환 공안부장에게 변사보고서를 갖고 왔다. 경찰이 변사사건을 형사부로 가져오지 않고 공안부로 가져온 온 것은 대공수사를 맡아온 공안부장이라면 경찰의 곤란한 상황을 이해하고 사건 은폐에 협조해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 최 부장은 박 열사의 가족에게서 합의서를 받아오면 시신을 곧바로 화장하겠다는 경찰의 계획을 들었다.

최 부장은 박 열사 시신을 변사로 처리하려는 경찰을 설득했다. 경찰은 '공안부장님이 도장 한번 눌러주시면 화장하고 묻어버리면 그냥 의문사 사건 하나 추가되는 것으로 끝나는데 왜 그러느냐'고 했고, 최 부장은 '당신들도 아들 낳아서 키울텐데, 아들이 타지에서 갑작스레 죽었다면 '바로 화장해서 뼛가루 보내주쇼'하는 소리가 나오겠느냐'며 경찰을 설득했다.

최 부장은 '내일 아침에 변사사건 발생 보고를 하라'고 하고 경찰들을 보냈다. 그러나 경찰은 집요했다. 퇴근 뒤에도 최 부장 집으로 각종 압력성 전화가 잠을 못 잘 정도로 걸려와 최 부장은 전화선을 뽑아버렸다.

다음 날 아침 8시 경찰은 변사사건 발생 보고를 했고, 최 부장은 이 보고서를 갖고 정구영 검사장에게 갔다. 최 부장은 경찰의 은폐 의도를 전하면서 '부검은 형사부에서 하는 게 관행인데, 공안부가 부검에 나서면 언론에서 눈치를 채 사건이 엄청나게 커질 수 있다'고 했고 정 검사장도 이에 동의해 형사부 검사 1명을 최 부장에게 배속시키기로 했다. 그 형사부 검사가 바로 안상수 검사다.

"안 검사에게 메모지 갖고 가 부검의 소견 사인 받으라 했다"

안 대표 저서의 시작점은 바로 이 다음부터다. 안 대표는 자신도 이 변사 사건이 심상치 않은 사건임을 직감했음을 밝히면서 자신을 지휘한 최환 부장에 대해서는 "그 역시 나와 비슷한 판단을 하고 있어서 반가웠다. 그것만으로도 큰 힘을 얻은 것 같았다. 최 부장과 나는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궁리하기 시작했다"고 썼다.

그러나 안 대표의 저술과 달리, 최 변호사의 증언에서 안 검사는 수동적으로 묘사됐다.

압수수색영장이 발부됐음에도 경찰은 박 열사의 시신을 내주지 않고 있었고, 최환 부장은 안 검사를 옆에 앉혀놓은 상태에서 강민창 치안본부장에게 전화해 '공무집행방해, 검시방해 현행범으로 검사를 대동하고 당신을 체포하러 가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한양대 부속병원에서 경찰병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양대 부속병원의 의사 3명이 부검을 하는 데까지 합의를 봤다.

최 변호사는 당시 안 검사와의 대화 내용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는 안 검사에게 '내가 (강민창 치안본부장과) 전화하는 것을 다 들었지 않느냐. 의사가 올 때까진 절대 부검하지 마라'고 했다. 안 검사는 '그런 (심각한) 사건이 아닌 줄 알았는데 그렇게 의미가 있는 사건이냐'고 했다. 나는 '나나 안 검사가 사표를 써야 할지도 모르고 국가에도 엄청난 영향을 미칠 사건'이라고 말했다. 나는 안 검사에게 '유족 대표, 기자 대표, 학생들 대표도 입회를 시켜라. 그냥 부검하고 결과를 발표하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안 검사는 그제서야 '아, 그래서 시체를 안 내놓는 거구나'라고 했다. 안 검사가 한양대 병원으로 출발할 때 내가 메모지를 준비하라고 했다. 부검을 하면서 특이 소견이 나오면 적고, 거기에 의사 3명의 사인을 받아두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잘 알려진대로 부검을 하게 됐고, 안상수 검사는 물고문의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하게 됐다. 안 대표는 저서에서 박 열사를 위한 묵념을 실시하고 부검현장을 둘러싼 경찰들을 밖으로 내보냈다고 썼다. 이에 대해 최 변호사는 "경찰이 병원에 가득한 상황에서 '묵념합시다'라고 재치있게 말을 한 것은 안 검사가 생각해서 한 것"이라고 인정했다.

17일 정구영 검사장은 기자들에게 박 열사의 사망원인이 물고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해버렸고, 관계기관대책회의에서 이 사건 수사를 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지만 최 부장은 더 이상 이 사건 수사에 참여할 수 없었다. 수사팀장이 신창언 형사2부장으로 교체되고 안 검사는 수사를 계속했다. 검찰 수뇌부는 '호헌이냐 개헌이냐로 공안사범이 늘어나고 있는데 공안부장은 시국사건에 전력을 다하라'는 명분을 내세웠다. 당시 상황에 대해 최 변호사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검사장님, 공안사범이 많은 건 틀림 없지만 특수부, 형사부 등 다른 팀 검사들과 팀을 만들면 제가 지휘를 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검사장 얼굴이 굳더라고. 그러더니 '저 위에서의 지시니까 그렇게 하라'고 했다. '저 위'는 청와대를 말하는 것이다."

▲ 87년 경찰 조사 도중 고문살해당한 박종철 열사 24주기를 맞아 당시 부검을 담당한 검사였던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가 지난 1월 14일 오전 서울 남영동 경찰청 인권센터(옛 대공분실) 4층 박종철 기념전시실을 방문해서 당시 사진을 둘러보고 있다. ⓒ 권우성


"공범 3명 알고도 수사 안한 건 직무유기, 귀감은 무슨"

최 변호사가 밝힌 당시 상황은 안 대표가 저서에 쓴 내용과 차이가 있다. 안 대표는 저서에서 부검 소견을 받는 등 증거 확보를 하는 데에 최 부장의 지시보다는 자신의 역할을 부각했다.

그러나 최 변호사는 안 대표가 계속 박종철 열사와 관련된 자신의 공을 내세우면 오히려 독이 될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안 대표가) 물고문 사건을 밝혀낸 것은 후배 검사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것"이라면서도 "거기까지만 잘했으면 됐는데, 그 이후로 축소수사, 부실수사하고 (고문에 가담한 경관이) 3명 더 있다는 것을 알고도 수사를 안했으니 직무유기 아니냐. 그 사람이 뭘 잘했다고 후배 검사들에게 귀감이 된다고 하느냐"고 말했다.

최 변호사의 지적은 당시 검찰이 물고문 사실은 밝혀냈지만, 이후 사건의 은폐·축소에서 안 대표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안상수 검사가 물고문의 증거들을 확보해낸 덕에 경찰관 2명이 기소되는 것으로 사건이 마무리됐지만, 고문에 가담한 경관이 3명 더 있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이 사건은 은폐·축소 사건으로 커졌다.

사건의 축소·은폐 사건이 알려지기 전 안상수 검사는 2월 27일 기소된 경관 2명으로부터 3명의 공범이 더 있다는 사실을 들었다. 이에 대해 안 대표는 저서에서 "하늘이 노래진다는 게 바로 이런 것인가. 내 평생 이렇게 충격적이고 당혹스러운 일은 처음이었다"고 썼다. 공범의 존재가 폭로된 건 그로부터 80일 뒤다.

안 대표는 저서에서 "추가로 밝혀진 범인 3명에 대한 수사는 과연 가능할 것인가, 충격과 고민으로 집에 누운 이틀간 나는 온 몸이 부서지는 듯 앓았다"고 당시의 깊은 고뇌를 술회했지만, 결국 행동은 검찰 상부에 보고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후 상황에 대한 안 대표 저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많은 고뇌가 있었고 진실을 알릴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그 전에 결국 폭로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안상수가 민주화 영웅? 정치인들 원래 말이 헤프나?"

최 변호사는 "안 검사가 그 책을 처음 낼 때는 내가 '인권검사라고 하면 어딜 출마해도 당선될 것이다, 잘하라'고 격려했는데,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데에 (박종철 열사 사건을) 지렛대로 썼다면 이제 된 것 아닌가"라며 "지금은 몇 선이나 하고 당 대표까지 하고 다 했는데 이번에 또 책은 왜 내느냐, '보온병'이니 '자연산'이니 이런 것이 있으니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 아니냐"고 말했다.

최 변호사는 "내가 했던 것을 (안 대표가) 뺏아간 것이 실망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축소수사하고 부실수사한 것을 어떻게 덮으려고 이러는지… 그 책은 이제 (안 대표에게) 도움이 안된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이어 "국회의장께서 '민주화 투쟁의 영웅이 바로 안상수'라고 했다는데, 정치인들은 원래 저렇게 말이 헤프고 구라(거짓말)가 심하냐"며 "자기들끼리 하는 일인데 어떡하겠느냐"고 일침을 가했다.

▲ '박종철 기념전시실' 입구에 세워진 박종철 열사의 얼굴 사진을 보는 안상수 대표.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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