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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서 제일 근사한 집은 창고 같은 집"

건축을 사랑하고, 이해하며, 실천했던 건축가 정기용을 기억하며

등록|2011.03.14 13:41 수정|2011.03.14 14:03
1.

아침 신문에서 정기용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 연초 신년하례식에서 그리 상태가 좋지 않으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덥수룩한 머리에 긴 코트를 입고 휘적휘적 걷던 그 모습이 떠오른다. 안경너머 '만년 청년' 같은 열정의 눈빛도… 그는 내 대학 선배이기도 하다.

솔직히 정기용의 건축에 대해 나는 별로 아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의 '건축 사랑'에 대해서는 할 말이 아주 많다. 그러한 사랑 때문에 예순여섯이라는 아직 한창인 나이에 그는 우리 곁을 떠났는지 모른다.

건축가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멋진 집을 지으면 훌륭한 건축가일까? 커다란 도시를 만들면 훌륭한 건축가일까? 그들도 물론 훌륭한 건축가이겠지만, '건축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 그래서 정기용은 훌륭한 건축가였다.

몇 년 전 한 프로젝트 때문에 거의 매달 정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처음 그의 설계를 접한 나는 적잖이 실망했다. 프랑크 게리나 쟝 누벨 같은 파격이 없다면 안도 다다오 같은 소재의 소신이라도 있어야 건축가 아닌가? 속으로 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의 회의가 지나고 나는 자신의 집을 설명하는 정기용의 기운에 어느샌가 설득당한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건 아주 편안한 열림 같은 것이었다.

많은 건축가들을 만나봤지만 정기용보다 자신의 프로젝트를 사랑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는 클라이언트에게 자신의 생각을 연애하듯이 이야기하고 그림을 그려 선물하기도 한다. 집을 지을 땅에 가면 지휘자처럼 넋을 놓고 감탄하고 있다. 그리고 대지와 자신이 지을 집과 사랑에 빠진다.

"자연이 정말 좋군. 아 저 나무랑 구름 좀 봐."

어느새 삼매경에 빠져있는 그에게 건축주는 시공예산이나 일정 얘기를 꺼내보지만 그는 안중에도 없다. '이미 사랑에 빠졌는데 뭘 못해주겠어' 언제나 그런 식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만사를 제쳐놓고 현장으로 간다.

그래서 정기용의 집은 행복함을 품고 있다. 그는 건축주에게 당신이 이 집을 갖게 된 것이 얼마나 행운인지, 내가 이 집을 얼마나 열심히 짓고 있는지, 그래서 이 집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능숙한 연극배우처럼 상대방을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그의 믿음에는 사실 한치의 위선도 없다. 언제나 그는 최선을 다하여 자신이 사랑한 집을 지었다. 그래서 건축주는 정기용으로부터 한 채의 딱딱한 구조물이 아닌 연애할 대상으로서의 집을 넘겨 받는다. 그 집이 좀 모자라도, 세련되지 않아도 충분히 사랑스럽고 그럴 가치가 있는 자신만의 집임을 그들은 아마 알았을 것이다.

2.

지난해 이맘 때 국립도서관에 틀어박혀 논문을 쓰며 넉 달을 지냈다. 아침부터 밤까지 쳐박혀서 자료를 찾고, 정리하고, 글을 쓰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을 반복하던 차에 지도교수의 추천으로 정기용의 책을 찾아서 읽었다. 그 책이 <감응의 건축>이다.

논문 디펜스(논문 통과에 앞서 심사위원 교수들에게 구술로 평가받는 구두심사 절차) 일주일을 앞두고 나는 정기용의 책에서 손을 떼지 못하고 하루를 투자하고 말았다. 그도 모자라서 일기에 그의 이야기를 적느라 또다시 적지 않은 시간을 보냈다. <감응의 건축>은 정기용이 집을 사랑한 방법, 건축가로서 세상을 이해한 방법을 적은 글이다. 솔직히 그의 글은 그의 집보다 훨씬 더 나를 감동시켰다. 변변한 실력도 없이 학위를 받아보겠다고 전전긍긍하고 있던 나에게 깊은 반성을 하게 했던 책이다.

여기 그 수첩에 책 내용을 요약해 적은 몇 구절을 옮겨 본다.

6월 4일

공공건축이란 우리(사람, 주민, 시민)가 원하는 동시에 땅이 원하는 건축이며 시대가 원하는 건축이고, 지구가 원하는 건축까지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건물은 무기질이지만 나름대로 생명을 지니고 있다.
준공한 날, 건물은 가출한 소년과 같다.
예측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또 다른 건축이 시작된다.

자연은 스스로 아름답다. 손을 대지 않을수록 자연은 풍성하고 아름다워진다.
자연은 스스로 그렇게 존재해야 하기 때문에 그 자체로 온전하다.

삶에서 제일 근사한 집은 창고 같은 집이다. 상상력과 감성을 인지하는 건축은 변경이 가능한 공간으로 우리의 삶을 해방시켜주려고 노력한다.

건축의 첫 번째 본질은 필요성이다. 공공건축의 필요성도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인지 아닌지 묻는 점, 어떻게 그 규모와 형식을 갖출 것인가 하는 점, 필요성에 대한 검증, 지역의 정체성에 대한 검증, 과정으로서의 한계를 인식하고 새로운 가치를 담아낼 준비를 하면서 의미있고 소박하게 건축은 그런 것이다. 건축가는 해결사가 아니고 사회적 조절자다.

3.

정기용은 건축을 사랑했지만 그것만 사랑한 사람은 아니다. 삶의 터전으로서 공간을 사랑했고 사람을 사랑했다. 건축을 통하여 인간과 자연의 관계 맺기를 꿈꾸었다. 자신을 원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자신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자신의 건물을 돋보이려고 작업하지 않았고 장소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사람이 행복하기를 꿈꾼 사람이다. 평생 그렇게 집짓는 일을 누구보다 사랑한 건축가이다. 건축을 통해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지않고 서로 소통하게 하려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건축은 따듯하게 인간을 감싼다.

나는 한강변에 인공섬을 짓는 사람들에게, 오래된 동네를 부수어 고층빌딩을 짓는 사람들에게, 돌판만 깔면 광장이 만들어 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책을 보내고 싶다. 그의 말대로 건축은 인간과 자연이 서로 소통하는 감응의 장소일 뿐이고 건축가는 창조자가 아니라 조절자여야 한다.

'의미있고 소박하게' 건축은 그래야 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발인 14일 오전 7시. 장지는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모란공원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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