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나물 값도 못 벌던 나, 연봉 1천만원 벌기까지...
내 생애의 첫 원고료 2만5천원... 돈 버는 기쁨을 알게 해준 <오마이뉴스>
오랜만에 <오마이뉴스> 기자회원방에 들어갔다. 원고료를 살펴보다 내 생애의 첫 원고료를 보게 되었다. 2002년 12월 15일 오름에 오른 첫 기사의 원고료는 2만5000원. 기사원고료 1만 원 특별기사원고료 1만 원 좋은 기사원고료 5000원으로 되어 있다.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내가 글을 써서 원고료라는 것을 받은 것이 내 생에의 처음 일어난 일이니 말이다.
그 당시 결혼한 지 27년이 되었지만 단돈 1000원의 콩나물 값도 벌어보지 못한 나였으니.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함께 글을 올리던 친구가 "언제 오만 원이 되어서 원고료라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한다. 그 말을 들은 나도 "그러게 과연 글을 써서 오만 원을 벌 수 있을까?" 했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어느새 까맣게 잊고 난 글쓰기에 재미를 붙여 원고료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원고료는 오만 원이 넘어 십만 원, 이십만 원이 되었고, 원고료도 수시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에게도 글쓰기 슬럼프가 찾아왔다. 주제와 멀어진 글쓰기를 하면서 생나무로 머무는 횟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여 내가 글 쓰는 것과는 먼 사람이 글을 쓴다고 들떠 있었나? 하는 회의가 온 것이다. 그야말로 그땐 '그래 이번에는 오만 원의 원고료가 되면 찾고 다시는 글을 쓰지 말아야지' 하며 맹세를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글쓰기를 멈추었을 때에는 생나무로 남아 있을 때보다 더 허전하고 나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책도 많이 읽어야 했고 많이 써봐야 한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누가 글을 쓰라고 등을 떠민 것도, 꼭해야만 한다는 사명감도 없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또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어 새로 올려진 글이 잉걸에만 머물러도 감사와 행복이 절로 느껴졌다. 그 후로 글쓰기는 계속되었다. 어쩜 글쓰기는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그 속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듯했다.
그러면서 사진찍기에 대한 도전은 새로운 흥미로 글쓰기에 더욱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물론 디지털카메라도 <오마이뉴스> 원고료를 찾아 산 것이다.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이 소재가 되어 KBS TV 동화 <행복한세상>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된 것도 8편이나 된다. <오마이뉴스>에 글쓰기를 통해 나 자신이 많이 성숙했고, 다른 곳에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없게 해주었다.
2006년에는 다른 매체에도 글을 쓰고, TV에 주부패널로도 지속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연봉 1천만 원이 되기도 했다. 그 이듬해에는 건강보험공단에서 의료보험과 연금에 가입하라는 통지서가 날라 오기도 했었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원고료를 받으면서 뗀 세금의 환급금은 꼭 받고 있기도 하다.
그해에 그렇게 벌었다고 하니깐 가족, 친지, 지인들 모두 놀라워했다. "그 나이에 글을 써서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벌 수가 있어"하면서. 공모에 당첨이 되었거나 우수기자상을 탔을 때에는 그들에게 조촐한 식사를 대접하는 즐거움을 함께하고 있다. 또 <오마이뉴스>의 원고료를 모아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보탠 것은 잊지 못할 큰 즐거움이 되기도 했다. 그땐 그것을 목표로 원고료를 한참이나 안 찾고 모아왔다.
또 손자들의 선물이나 용돈을 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이름으로 된 적금통장이 두 개나 있다는 것이다. 조금씩 들어오는 원고료로 적금을 붓고 있다. 물론 남편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는 여행적금도 내고 있다. 2006년 이후로도 평균 연봉이 오백만 원은 넘는 수준이다.
2010년도에도 지역의 시정 홍보지 명예기자와 블로거로 활동하면서 연봉 7백만 원을 벌기도 했다. 돈을 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기분 좋은 일이다. 또 생활의 큰 에너지가 되어 주는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도 내 용돈은 내가 벌어 쓰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현재 <오마이뉴스>의 원고료는 오만 원도 안 된다. 그 오만 원을 채우기 위해서 난 열심히 노력하고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그 당시 결혼한 지 27년이 되었지만 단돈 1000원의 콩나물 값도 벌어보지 못한 나였으니.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함께 글을 올리던 친구가 "언제 오만 원이 되어서 원고료라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한다. 그 말을 들은 나도 "그러게 과연 글을 써서 오만 원을 벌 수 있을까?" 했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어느새 까맣게 잊고 난 글쓰기에 재미를 붙여 원고료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원고료는 오만 원이 넘어 십만 원, 이십만 원이 되었고, 원고료도 수시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던 중 나에게도 글쓰기 슬럼프가 찾아왔다. 주제와 멀어진 글쓰기를 하면서 생나무로 머무는 횟수가 많아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여 내가 글 쓰는 것과는 먼 사람이 글을 쓴다고 들떠 있었나? 하는 회의가 온 것이다. 그야말로 그땐 '그래 이번에는 오만 원의 원고료가 되면 찾고 다시는 글을 쓰지 말아야지' 하며 맹세를 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글쓰기를 멈추었을 때에는 생나무로 남아 있을 때보다 더 허전하고 나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자괴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책도 많이 읽어야 했고 많이 써봐야 한다는 것을 터득하게 되었다. 누가 글을 쓰라고 등을 떠민 것도, 꼭해야만 한다는 사명감도 없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또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용기를 내어 새로 올려진 글이 잉걸에만 머물러도 감사와 행복이 절로 느껴졌다. 그 후로 글쓰기는 계속되었다. 어쩜 글쓰기는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그 속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듯했다.
그러면서 사진찍기에 대한 도전은 새로운 흥미로 글쓰기에 더욱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물론 디지털카메라도 <오마이뉴스> 원고료를 찾아 산 것이다.
<오마이뉴스>에 올린 글이 소재가 되어 KBS TV 동화 <행복한세상>에서 애니메이션으로 방영된 것도 8편이나 된다. <오마이뉴스>에 글쓰기를 통해 나 자신이 많이 성숙했고, 다른 곳에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을 없게 해주었다.
2006년에는 다른 매체에도 글을 쓰고, TV에 주부패널로도 지속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연봉 1천만 원이 되기도 했다. 그 이듬해에는 건강보험공단에서 의료보험과 연금에 가입하라는 통지서가 날라 오기도 했었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원고료를 받으면서 뗀 세금의 환급금은 꼭 받고 있기도 하다.
그해에 그렇게 벌었다고 하니깐 가족, 친지, 지인들 모두 놀라워했다. "그 나이에 글을 써서 어떻게 그렇게 큰돈을 벌 수가 있어"하면서. 공모에 당첨이 되었거나 우수기자상을 탔을 때에는 그들에게 조촐한 식사를 대접하는 즐거움을 함께하고 있다. 또 <오마이뉴스>의 원고료를 모아 아들의 대학 등록금을 보탠 것은 잊지 못할 큰 즐거움이 되기도 했다. 그땐 그것을 목표로 원고료를 한참이나 안 찾고 모아왔다.
또 손자들의 선물이나 용돈을 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내 이름으로 된 적금통장이 두 개나 있다는 것이다. 조금씩 들어오는 원고료로 적금을 붓고 있다. 물론 남편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친구들과 함께하고 있는 여행적금도 내고 있다. 2006년 이후로도 평균 연봉이 오백만 원은 넘는 수준이다.
2010년도에도 지역의 시정 홍보지 명예기자와 블로거로 활동하면서 연봉 7백만 원을 벌기도 했다. 돈을 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기분 좋은 일이다. 또 생활의 큰 에너지가 되어 주는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도 내 용돈은 내가 벌어 쓰고 싶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현재 <오마이뉴스>의 원고료는 오만 원도 안 된다. 그 오만 원을 채우기 위해서 난 열심히 노력하고 배움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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