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평온한 물가
"흥, 그 피디가 이런 사람이었단 말이지? 그런데 지금은 용케도 닭살 커플이 돼 있으니 참 모를 일이야. 쓴맛 나는 미움도 오래 삭히다 보면 달달하게 변하는 건가?"
조제는 주머니를 부시럭거리며 껌을 하나 더 꺼내더니 껍질을 까서는 입에 쏙 집어넣으며 말했다.
"미움이란 단어를 쓰기도 좀 애매하긴 해. 아직은 상황을 잘 알지도 못하니까."
나는 페이지를 넘기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인형웨이터는 어느 틈에 흰갈매기 옆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어서, 열망 사냥꾼의 뱃속은 이제 두 사람의 어른이 자고 있는 탁아소가 돼버렸다. 때마침 끝없이 꿈틀대는 열망사냥꾼의 배는 그네 요람처럼 큰 애기들이 잠을 잘 오게 해주는 것만은 틀림없는 듯 했다.
"우리야 뭐, 현실에서 자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부러워하지말고 계속 읽기나 하자구."
하며 조제와 나는 풍선껌을 씹으며 일기장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1999년 9월00일
지난 번에 만난 시인의 오두막에서 두 번째 탱고 파티가 있는 날이다. 주말이기에 카페는 손님으로 붐빌 터지만 주인은 아르바이트생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고 함께 가겠다 했다. 그래서 구입한 지 채 며칠 되지 않은 그의 푹신한 자가용을 얻어타고 나는 따라나섰다. 아직은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남아있는 초가을 공기는 곧 다가올 가을이 너무 간절해질 만큼 덥고 건조했다.
카페 주인은 가게에서 챙겨 온 와인과 바베큐용 먹거리가 잔뜩 든 휴대용 아이스 박스를 내가 앉은 뒷자석 옆에 놓았다. 서늘한 기운과 함께 물기가 한 방울씩 인조 가죽시트에 스며들더니 이내 짙은 음영으로 의자를 물들이는 모습은 이 따가운 햇살도 어느틈에 서늘한 기운으로 변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단 기대를 가지게 해주었다.
"와인 좋아해요?"
그는 썬 보닛을 내리다가 백미러를 향해 방긋 웃으며 물었다. 아침 저녁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살 때문인지 그의 흰 피부는 살짝 그을러 있어서 사람좋아 보이는 농부라 해도 괜찮을 외모로 변해 있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술이란 걸 단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노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포도의 품종과 당도와 일조량의 상관관계에 대해 열변을 토하다가, 내가 조금 시큰둥하니 창밖의 포플러 나무 행렬에만 눈길을 돌린 채 말이 없자 얼른 화제를 바꾸어서 남자 친구가 있냐고 물었다.
내 나이 여자에게 흔히 하는 분위기 전환용 질문 중 하나란 걸 알기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얼마전에 바닷가 암벽 위에서 당사자들만 참석한 결혼식을 올렸다고 말했다. 물론 해변 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가다가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던 푸른색 나무 수국의 거대한 꽃 송이 몇 가닥을 꺾어서 그걸로 부케를 삼았다는 말도 가감없이 포함해서였다. 다만 부모님이 이 사안을 모르고 있다는 말만은 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 보였지만 이내 가벼운 헛기침을 한번 했다. 그리곤 제법 길이 잘든 파마 머리를 가볍게 쓸어올리며 그 다음엔 무슨 이야기로 화제를 돌릴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그 시인의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야기가 옮아갔다. 시인은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작품을 쓴다고 했다. 최근에는 카페주인을 포함한 여러 친구들과 함께 스페인의 카탈루냐에 다녀왔다고 했다.
지중해를 끼고 스페인 무역의 중심지로 이름을 올린 카탈루냐의 해안가에는 100년도 넘은 호텔이 있는데 그곳의 자연적인 모토가 마음에 들어 여름이면 꼭 묵었다가 온다는 것이었다. 태양열로 전기를 끌어다 쓰고 손님들이 사용한 물은 순환을 거쳐 다시 재활용되기에 물을 함부로 쓰는 것은 에티켓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는 지식인들이 드나드는 곳. 그리고 지중해식 가지 볶음에 치즈와 토마토, 바질이 올려진 간소한 아침 식탁을 마주하고 바다 위로 떠가는 구름에 상념을 실어보내는 곳이라 했다.
그리고 여름의 아르헨티나도 멋진 여행지 중 하나라고 말을 이었다. 광활하게 이어진 포도밭, 길거리 어디서든 탱고를 추는 열정의 남자들, 그들은 탱고 복장을 입은 마네킹을 상대 삼아 관광객들을 위한 다양한 포즈를 취해준다고 했다. 흥에 겨워 추는 즉석 탱고 공연을 보며 단돈 얼마 짜리 와인을 마시며 그 다음 목적지를 스케줄러에 옮겨적던 보카 항구의 돌자갈 길이 문득 그립다며 그는 애수에 찬 눈빛을 보였다.
그러더니 경제적으로 풍요로와서 여행을 하는 건 아니라고 황급히 덧붙였다. 여행을 통해 자신의 마음의 찌꺼기가 떠밀려 나가고 새로운 기운을 받게 되는 그 과정을 사랑하기에 여행을 하는 것이라며 그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카페에서 나오는 수입의 대부분을 여행으로 사용하고 있고 시인은 각종 사립 문화단체의 강연과 대학에서의 강의, 창작 활동 등으로 연명하는 사람일 뿐이고, 딸린 식구가 없기에 오십 중반의 나이에도 히피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해안 도로가 커브 길에 들어서자 촘촘히 늘어선 해송들이 급하게 다가오고 멀어지고, 다가오고 멀어졌다. 그 나무들 아래론 계절보다 이르게 피어난 코스모스의 무리들이 초가을 햇살속에서 진분홍과 하양, 연핑크색 얼굴을 내밀며 바람에 가벼이 살랑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분좋은 풍경이 잠깐 사라지면 파도가 암벽에 부딪치다가 방파제 부근에서 찬연히 부서지는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 볼 수 있었다. 그건 반짝이는 보석보다 더 아름답고 풍부한 빛깔의 무지개빛을 선사했고 충분히 만족한 나는 맑은 주말 오후의 아늑함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감상 속을 조용히 파고 드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오늘은 탱고 동호회 친구들이 좀 더 많이 올거예요."
시인의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정원에 모여서 파티 준비 중이었다. 식탁을 나르고 탁자보를 씌우거나 부근에서 꺾어 온 들꽃으로 장식을 하는 등 모두들 제 할일을 알아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야외 수돗가에서 과일을 씻고 있던 시인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구렛나룻에 물방울을 잔뜩 매단 채 허허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그러더니 오늘의 주메뉴인 아르헨티나 바베큐 요리를 함께 준비하자며 손을 잡아끌었다.
시인의 집은 말이 오두막일 뿐 성실한 아빠가 투박하지만 정성껏 지은 것 같은 통나무 집이었다. 마당에 있는 개집 마저 자신의 집과 세트로 보기 좋게 지어놓은 정성이 돋보였다. 뒤쪽으로 돌아가 보니 야생에서 방목하는 흑염소와 거위도 있었고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름모를 꽃들이 찬란하게 피어있는 연못이었다. 비와 흙과 풀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그 곳에는 청초하고 담백한 들꽃들이 한껏 우거져서, 바깥 세계의 오염을 받지않고 남몰래 숨어사는 미인을 떠올리게 했다.
식탁을 차리던 시인은 카페 주인이 가져온 와인 몇 병이 맘에 드는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고기 요리에 최고로 잘 어울리는 걸로 가져오셨군요. 이건 멜레나가 특히 반기겠는 걸요?"
하며 즐거운 콧노래를 불렀다.
"멜....레...나?.....멜레나? 기집애야, 여기 이 구절 봐봐. 혹시 보카에서 만났던 그 여자 말하는 것 아냐? "
한참 일기를 읽다 말고 조제는 난리를 쳤다.
<계속>
▲ 그해 여름. ⓒ 일러스트 - 조을영
조제는 주머니를 부시럭거리며 껌을 하나 더 꺼내더니 껍질을 까서는 입에 쏙 집어넣으며 말했다.
"미움이란 단어를 쓰기도 좀 애매하긴 해. 아직은 상황을 잘 알지도 못하니까."
나는 페이지를 넘기며 낮은 소리로 말했다. 인형웨이터는 어느 틈에 흰갈매기 옆에서 새근새근 잠이 들어서, 열망 사냥꾼의 뱃속은 이제 두 사람의 어른이 자고 있는 탁아소가 돼버렸다. 때마침 끝없이 꿈틀대는 열망사냥꾼의 배는 그네 요람처럼 큰 애기들이 잠을 잘 오게 해주는 것만은 틀림없는 듯 했다.
"우리야 뭐, 현실에서 자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부러워하지말고 계속 읽기나 하자구."
하며 조제와 나는 풍선껌을 씹으며 일기장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1999년 9월00일
지난 번에 만난 시인의 오두막에서 두 번째 탱고 파티가 있는 날이다. 주말이기에 카페는 손님으로 붐빌 터지만 주인은 아르바이트생에게 모든 일을 일임하고 함께 가겠다 했다. 그래서 구입한 지 채 며칠 되지 않은 그의 푹신한 자가용을 얻어타고 나는 따라나섰다. 아직은 늦여름의 따가운 햇살이 남아있는 초가을 공기는 곧 다가올 가을이 너무 간절해질 만큼 덥고 건조했다.
카페 주인은 가게에서 챙겨 온 와인과 바베큐용 먹거리가 잔뜩 든 휴대용 아이스 박스를 내가 앉은 뒷자석 옆에 놓았다. 서늘한 기운과 함께 물기가 한 방울씩 인조 가죽시트에 스며들더니 이내 짙은 음영으로 의자를 물들이는 모습은 이 따가운 햇살도 어느틈에 서늘한 기운으로 변할 날이 얼마 안 남았단 기대를 가지게 해주었다.
"와인 좋아해요?"
그는 썬 보닛을 내리다가 백미러를 향해 방긋 웃으며 물었다. 아침 저녁 차창으로 들어오는 햇살 때문인지 그의 흰 피부는 살짝 그을러 있어서 사람좋아 보이는 농부라 해도 괜찮을 외모로 변해 있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저으며 술이란 걸 단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노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포도의 품종과 당도와 일조량의 상관관계에 대해 열변을 토하다가, 내가 조금 시큰둥하니 창밖의 포플러 나무 행렬에만 눈길을 돌린 채 말이 없자 얼른 화제를 바꾸어서 남자 친구가 있냐고 물었다.
내 나이 여자에게 흔히 하는 분위기 전환용 질문 중 하나란 걸 알기에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듯이, 얼마전에 바닷가 암벽 위에서 당사자들만 참석한 결혼식을 올렸다고 말했다. 물론 해변 도로를 따라 차를 몰고 가다가 인근 초등학교 운동장에 있던 푸른색 나무 수국의 거대한 꽃 송이 몇 가닥을 꺾어서 그걸로 부케를 삼았다는 말도 가감없이 포함해서였다. 다만 부모님이 이 사안을 모르고 있다는 말만은 하지 않았다.
그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 보였지만 이내 가벼운 헛기침을 한번 했다. 그리곤 제법 길이 잘든 파마 머리를 가볍게 쓸어올리며 그 다음엔 무슨 이야기로 화제를 돌릴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러다 그 시인의 이야기로 자연스레 이야기가 옮아갔다. 시인은 여러나라를 돌아다니며 작품을 쓴다고 했다. 최근에는 카페주인을 포함한 여러 친구들과 함께 스페인의 카탈루냐에 다녀왔다고 했다.
지중해를 끼고 스페인 무역의 중심지로 이름을 올린 카탈루냐의 해안가에는 100년도 넘은 호텔이 있는데 그곳의 자연적인 모토가 마음에 들어 여름이면 꼭 묵었다가 온다는 것이었다. 태양열로 전기를 끌어다 쓰고 손님들이 사용한 물은 순환을 거쳐 다시 재활용되기에 물을 함부로 쓰는 것은 에티켓이 아님을 인지하고 있는 지식인들이 드나드는 곳. 그리고 지중해식 가지 볶음에 치즈와 토마토, 바질이 올려진 간소한 아침 식탁을 마주하고 바다 위로 떠가는 구름에 상념을 실어보내는 곳이라 했다.
그리고 여름의 아르헨티나도 멋진 여행지 중 하나라고 말을 이었다. 광활하게 이어진 포도밭, 길거리 어디서든 탱고를 추는 열정의 남자들, 그들은 탱고 복장을 입은 마네킹을 상대 삼아 관광객들을 위한 다양한 포즈를 취해준다고 했다. 흥에 겨워 추는 즉석 탱고 공연을 보며 단돈 얼마 짜리 와인을 마시며 그 다음 목적지를 스케줄러에 옮겨적던 보카 항구의 돌자갈 길이 문득 그립다며 그는 애수에 찬 눈빛을 보였다.
그러더니 경제적으로 풍요로와서 여행을 하는 건 아니라고 황급히 덧붙였다. 여행을 통해 자신의 마음의 찌꺼기가 떠밀려 나가고 새로운 기운을 받게 되는 그 과정을 사랑하기에 여행을 하는 것이라며 그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자신은 카페에서 나오는 수입의 대부분을 여행으로 사용하고 있고 시인은 각종 사립 문화단체의 강연과 대학에서의 강의, 창작 활동 등으로 연명하는 사람일 뿐이고, 딸린 식구가 없기에 오십 중반의 나이에도 히피같은 생활을 할 수 있다고 했다.
해안 도로가 커브 길에 들어서자 촘촘히 늘어선 해송들이 급하게 다가오고 멀어지고, 다가오고 멀어졌다. 그 나무들 아래론 계절보다 이르게 피어난 코스모스의 무리들이 초가을 햇살속에서 진분홍과 하양, 연핑크색 얼굴을 내밀며 바람에 가벼이 살랑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분좋은 풍경이 잠깐 사라지면 파도가 암벽에 부딪치다가 방파제 부근에서 찬연히 부서지는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 볼 수 있었다. 그건 반짝이는 보석보다 더 아름답고 풍부한 빛깔의 무지개빛을 선사했고 충분히 만족한 나는 맑은 주말 오후의 아늑함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그 감상 속을 조용히 파고 드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오늘은 탱고 동호회 친구들이 좀 더 많이 올거예요."
시인의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정원에 모여서 파티 준비 중이었다. 식탁을 나르고 탁자보를 씌우거나 부근에서 꺾어 온 들꽃으로 장식을 하는 등 모두들 제 할일을 알아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야외 수돗가에서 과일을 씻고 있던 시인이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구렛나룻에 물방울을 잔뜩 매단 채 허허 웃으며 우리를 맞았다. 그러더니 오늘의 주메뉴인 아르헨티나 바베큐 요리를 함께 준비하자며 손을 잡아끌었다.
시인의 집은 말이 오두막일 뿐 성실한 아빠가 투박하지만 정성껏 지은 것 같은 통나무 집이었다. 마당에 있는 개집 마저 자신의 집과 세트로 보기 좋게 지어놓은 정성이 돋보였다. 뒤쪽으로 돌아가 보니 야생에서 방목하는 흑염소와 거위도 있었고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름모를 꽃들이 찬란하게 피어있는 연못이었다. 비와 흙과 풀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그 곳에는 청초하고 담백한 들꽃들이 한껏 우거져서, 바깥 세계의 오염을 받지않고 남몰래 숨어사는 미인을 떠올리게 했다.
식탁을 차리던 시인은 카페 주인이 가져온 와인 몇 병이 맘에 드는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고기 요리에 최고로 잘 어울리는 걸로 가져오셨군요. 이건 멜레나가 특히 반기겠는 걸요?"
하며 즐거운 콧노래를 불렀다.
"멜....레...나?.....멜레나? 기집애야, 여기 이 구절 봐봐. 혹시 보카에서 만났던 그 여자 말하는 것 아냐? "
한참 일기를 읽다 말고 조제는 난리를 쳤다.
<계속>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