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우소(解憂所)는 사찰에서 화장실 대신 쓰는 용어이지만 따지고 보면 의미가 결코 얕지 않다. '근심을 풀어주는 곳'이란 뜻인데, 이것은 당해본 사람만이 그 의미를 안다. 일반에서는 '변소(便所)'라는 단어를 쓰기도 한다. '便(편)'자는 원래 '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대소변을 보고 나면 마음이 편안해지기 때문에 이 글자를 전화(傳化)하여 오줌 '변'자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고 보면 갑자기 만나게 되는 대소변은 사람의 적지 않은 근심거리가 되는 셈이다. '해우소'라는 한자어 조합은 격을 갖추었으면서도 뜻까지 잘 나타내고 있다.
내가 사는 인근에 직지사라는 천 년 고찰이 있다. 직지사는 같은 산줄기에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있듯 몇 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내가 가 본 암자는 직자사에서 반경 거리 3 Km 이내에 있는 것들인데, 은선암, 명적암, 중암, 백련암, 운수암 등이 그것들이다. 이 암자들에는 약수터와 해우소를 하나 이상씩 가지고 있다. 암자들도 각양 차이가 나서 내가 가 본 것 중 명적암이 규모를 갖춘 암자에 속하고 은선암은 조금 초라하게 보이는 암자이다. 아마 이것은 찾는 사람 숫자에 비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작은 곳을 찾아주는 것이 세상에서 갖추어야 할 예의라고 생각하고 가파른 경사 길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은선암을 자주 찾는 편이다.
명적암이 좀 부티나는 암자라고 했는데, 건물 자체가 오래 되지 않아 싱싱한 느낌이 든다. 입구에 사무실이 들어 있는 행랑채가 있고, 안으로 들어가면 대웅전 격인 명적암 본당이 있다. 그 좌우에 부관이 상관을 모시듯 향경다실(香經茶室)과 육화료(六和寮)가 위치해 있다. 또 그 앞마당에 석탑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석등이 균형 있게 놓여 있다. 본찰 직지사에 눌려 거느림을 당하는 암자 중 하나이지 이 정도 규모면 여느 사찰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그 건물들 중 내가 주의해서 본 것은 좌측에 있는 '향경다실'이다. 아마 암자를 찾는 사람들이 차를 나누면서 담소하는 장소가 아닌가 싶다.
'향경(香經)'의 뜻하는 바가 불경에서 향기가 피어난다는 의미이겠으나 '다실(茶室)'과 결합하여 그 의미를 좀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혹 '향경(香境)'과도 통하는 단어가 아닌지 모르겠다. '香境'은 '육경(六境)'의 하나로 '코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대상'을 이르는 말로 되어 있다. 다실이니 만큼 온갖 차가 갖추어져 있을 것이고 방문객들은 코로 차의 맛을 음미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곳으로 추측하니 마음부터 넉넉해진다. 그런데 정녕 내가 좀 의아해 한 것은 다른 데 있다. '향경다실'은 네 칸으로 된 한옥 기와집이다. 각 간마다 방을 표현하는 표찰이 붙어 있어 사람의 이목을 끈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문수(文殊), 지장(地藏), 보현(普賢) 보살이 한 칸씩을 차지하고 있는 중간, 즉 지장과 보현 사이에 해우소(解憂所)가 떳떳이 명함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부처를 도와 일하는 보살들 틈에 해우소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문수보살은 지혜를 맡아 부처를 돕는 역할을 한다고 하고, 지장보살은 석가 입멸(入滅) 후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중생들을 책임지는 중요한 보살이라고 한다. 또 보현보살은 석가의 포교를 돕는 보살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해우소라니... .
불교는 관념 철학의 범주에 속한다. 즉 현실과 동떨어져 인간이 그리는 이상 세계를 참선으로 도달하려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치열한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해우소를 추량(推量)해 본다. 이상을 현실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공간이 혹 해우소가 아닐런지? 무슨 말인고 하면, 현실을 맞닥뜨려 살아가면서 급한 변으로 인해 난처한 입장에 처해 본 사람들은 그 문제가 근심의 가장 앞자리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드러내기는 뭣하지만 일을 당했을 때 이것보다 더 급한 근심거리는 아마 없을 것이다. 지금은 거리 곳곳에 화장실이 그런대로 갖추어져서 위급한 근심을 풀어주고 있지만 20년 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가끔 있는 공중화장실도 돈을 받고 입장시켜 줄 정도였으니까.
나는 명적암을 내려오면서 잠깐 생각에 잠겨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겠지만 향경다실 방 배치한 사람의 기지(機智)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작자의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려는 파격에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망령된 짓이라고 질책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감히 지저분한 해우소를 보살들과 동등하게 대접하다니! 근심을 풀어준다는 해우소, 급한 변을 해결하는 절박한 근심뿐만 아니라, 그곳에 앉아 얻을 수 있는 유익 또한 적지 않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다. 반성할 것은 없는지, 사랑을 베푸는데 인색하지는 않았는지, 이기적 탐욕에 치우친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지... . 우리의 사고(思考)를 한 단계 성숙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해우소를 생각한다면 보살들 틈에 끼어 있는 것도 별로 어색하지 않은 것 같다.
더욱이 이 세상은 따지고 보면 인간 중심으로 질서가 짜여져 있지 않던가? 문수와 지장 그리고 보현보살 아니 부처도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볼 때, 급한 볼일을 해결해 주는 해우소를 가볍게 여길 일은 아니다. 사람을 위해서 해우소가 얼마나 큰 기여를 하고 있는가? 해우소를 찾는 군상(群像)들의 모습, 이것이 우리의 심연에 깔려 있는 가장 솔직한 모습이 아니던가? 우리 인생사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현실을 살아가면서 무시할 수 없는 공간 해우소, 그것의 중요성을 좀 강조한다 해도 결례는 안 될 것 같다.
내가 사는 인근에 직지사라는 천 년 고찰이 있다. 직지사는 같은 산줄기에 부모가 아이들을 데리고 있듯 몇 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있다. 내가 가 본 암자는 직자사에서 반경 거리 3 Km 이내에 있는 것들인데, 은선암, 명적암, 중암, 백련암, 운수암 등이 그것들이다. 이 암자들에는 약수터와 해우소를 하나 이상씩 가지고 있다. 암자들도 각양 차이가 나서 내가 가 본 것 중 명적암이 규모를 갖춘 암자에 속하고 은선암은 조금 초라하게 보이는 암자이다. 아마 이것은 찾는 사람 숫자에 비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작은 곳을 찾아주는 것이 세상에서 갖추어야 할 예의라고 생각하고 가파른 경사 길을 타고 올라가야 하는 은선암을 자주 찾는 편이다.
'향경(香經)'의 뜻하는 바가 불경에서 향기가 피어난다는 의미이겠으나 '다실(茶室)'과 결합하여 그 의미를 좀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혹 '향경(香境)'과도 통하는 단어가 아닌지 모르겠다. '香境'은 '육경(六境)'의 하나로 '코로 냄새를 맡을 수 있는 대상'을 이르는 말로 되어 있다. 다실이니 만큼 온갖 차가 갖추어져 있을 것이고 방문객들은 코로 차의 맛을 음미하면서 대화를 나누는 곳으로 추측하니 마음부터 넉넉해진다. 그런데 정녕 내가 좀 의아해 한 것은 다른 데 있다. '향경다실'은 네 칸으로 된 한옥 기와집이다. 각 간마다 방을 표현하는 표찰이 붙어 있어 사람의 이목을 끈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문수(文殊), 지장(地藏), 보현(普賢) 보살이 한 칸씩을 차지하고 있는 중간, 즉 지장과 보현 사이에 해우소(解憂所)가 떳떳이 명함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부처를 도와 일하는 보살들 틈에 해우소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문수보살은 지혜를 맡아 부처를 돕는 역할을 한다고 하고, 지장보살은 석가 입멸(入滅) 후 미륵불이 나타날 때까지 중생들을 책임지는 중요한 보살이라고 한다. 또 보현보살은 석가의 포교를 돕는 보살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가운데 해우소라니... .
불교는 관념 철학의 범주에 속한다. 즉 현실과 동떨어져 인간이 그리는 이상 세계를 참선으로 도달하려는 상구보리(上求菩提)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체계를 가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치열한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해우소를 추량(推量)해 본다. 이상을 현실로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공간이 혹 해우소가 아닐런지? 무슨 말인고 하면, 현실을 맞닥뜨려 살아가면서 급한 변으로 인해 난처한 입장에 처해 본 사람들은 그 문제가 근심의 가장 앞자리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드러내기는 뭣하지만 일을 당했을 때 이것보다 더 급한 근심거리는 아마 없을 것이다. 지금은 거리 곳곳에 화장실이 그런대로 갖추어져서 위급한 근심을 풀어주고 있지만 20년 전만 해도 그렇지 못했다. 가끔 있는 공중화장실도 돈을 받고 입장시켜 줄 정도였으니까.
나는 명적암을 내려오면서 잠깐 생각에 잠겨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누구의 작품인지 모르겠지만 향경다실 방 배치한 사람의 기지(機智)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작자의 이상과 현실을 조화시키려는 파격에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망령된 짓이라고 질책을 당하지는 않았을까? 감히 지저분한 해우소를 보살들과 동등하게 대접하다니! 근심을 풀어준다는 해우소, 급한 변을 해결하는 절박한 근심뿐만 아니라, 그곳에 앉아 얻을 수 있는 유익 또한 적지 않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도 가질 수 있다. 반성할 것은 없는지, 사랑을 베푸는데 인색하지는 않았는지, 이기적 탐욕에 치우친 삶을 살아오지 않았는지... . 우리의 사고(思考)를 한 단계 성숙시킬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해우소를 생각한다면 보살들 틈에 끼어 있는 것도 별로 어색하지 않은 것 같다.
더욱이 이 세상은 따지고 보면 인간 중심으로 질서가 짜여져 있지 않던가? 문수와 지장 그리고 보현보살 아니 부처도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볼 때, 급한 볼일을 해결해 주는 해우소를 가볍게 여길 일은 아니다. 사람을 위해서 해우소가 얼마나 큰 기여를 하고 있는가? 해우소를 찾는 군상(群像)들의 모습, 이것이 우리의 심연에 깔려 있는 가장 솔직한 모습이 아니던가? 우리 인생사가 공수래 공수거(空手來 空手去)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현실을 살아가면서 무시할 수 없는 공간 해우소, 그것의 중요성을 좀 강조한다 해도 결례는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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