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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발한 생각, 박물관 '분점'

[지중해와 대서양을 끼고 있는 세 나라 기행 (29)] 돌아오는 길

등록|2011.03.21 09:50 수정|2011.03.21 09:50
바르셀로나를 떠나며

▲ 바르셀로나 공항 ⓒ 이상기


여행을 하다 보면 일정이 조금씩 바뀔 수 있다. 원래 계획은 낮 12시40분에 떠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오전 10시10분으로 2시간 30분이나 앞당겨진 것이다. 그 바람에 아침시간이 촉박하게 되었다. 공항에 3시간 전에는 가야한다는 명목으로 새벽부터 서둘렀기 때문이다. 아침식사를 하고 버스를 타고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하니 7시40분쯤 되었다. 수속하는데 30분 정도면 되니, 공항에서 두 시간 정도를 보내야 한다.

가면서 나는 동행한 카탈루냐어 가이드 미겔에게 에스파냐어 발음과 카탈루냐어 표현도 한두 가지 배웠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Z발음이었다. 우리는 보통 ㅅ으로 발음하는데 영어의 [Ɵ]에 해당하는 발음이라고 가르쳐 준다. 그러므로 우리 표기로는 ㅆ이나 ㄷ으로 발음하는 게 더 맞다. 그리고 헤어지면서 '아스타 마니아나' 하고 작별인사를 하니 카탈루냐어로는 '우고 무초스'라고 고쳐준다. 카탈루냐인들의 자존심이 느껴진다.

공항 밖에는 별로 볼 것이 없어 보안수속을 마치고 바로 안으로 들어가 서점과 면세점을 살펴본다. 서점에서는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라는 책을 하나 산다. 이 책에서는 바르셀로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2000년의 역사를 지닌 도시, 항상 새로운 정신을 추구하는 도시, 로마, 고딕, 모더니즘 문화유산이 있는 도시. 올림픽을 통해 새로운 천년을 준비하는 도시, 온 세상이 벤치마킹하는 도시, 끊임없이 변화하는 도시.

▲ 바로셀로나 공항의 비행기 ⓒ 이상기


그리고는 람블라 거리에서 들르지 못한 자라 망고 판매점엘 들른다. 중저가 제품들이라 가격이 그렇게 비싸질 않다. 옷도 보고 가방도 보고 신발도 본다. 아내의 눈에는 그렇게 맘에 드는 게 없는가 보다. 그런데 내 눈에는 신발이 하나 눈에 띈다. 자라 맨(zara man)이다. 디자인이 맘에 들고, 색깔도 흰색 바탕에 베이지색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흰색 수트와 잘 어울릴 것 같다.

값도 싸다. 아쉬운 점은 생산지가 베트남이라는 점이다. 요즘 물건들을 보면 생산지가 중국과 동남아시아인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품질관리가 잘 되어 제품의 질은 괜찮은 편이다. 바르셀로나에 와서 신발도 하나 얻어 신고 기분이 좋다. 그래도 시간이 남지만 여유 있게 탑승구 쪽으로 간다. 출발 30분 전인 9시 40분부터 탑승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비행장에는 우리가 타고 갈 네덜란드 항공이 기다리고 있다.

중간기착지 암스테르담의 지루함 속에서 찾은 즐거움

▲ 암스테르담 ⓒ 이상기


바르셀로나에서 암스테르담까지는 2시간 30분이 걸린다. 항로는 프랑스를 지나 암스테르담으로 이어진다. 암스테르담에 접근하니 주변에 바다와 운하가 보인다. 그리고 스키폴 공항에 가까워지니 농경지와 도시, 주택들과 풍차가 보인다. 뭐니 뭐니해도 암스테르담의 상징은 풍차다. 지난해 잔세스칸스의 풍차마을에 갔던 기억이 난다. 그곳의 풍차가 곡물을 빻는 용도의 것이라면, 지금 보는 것은 바람을 이용해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용 풍차다.

우리가 비행기에서 내려 들어간 곳이 라운지 1이다. 그리고 우리가 서울행 비행기를 탈 곳은 라운지 3이다. 그러므로 중간에 잠깐 여권 검사만 받으면 모든 수속이 끝난다. 문제는 서울로 떠나는 비행기가 6시나 되어야 출발을 한다는 점이다. 앞으로 다섯 시간을 공항에서 지내야 한다. 다섯 시간 가지고는 암스테르담 시내에 갔다 올 수도 없다. 아침 일찍 서두르기만 했지 실속은 하나도 없다. 나는 아내와 둘이서 공항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시간을 보낸다.

▲ 꽃과 구근을 파는 가게 ⓒ 이상기


첫 눈에 들어오는 것이 꽃과 구근을 파는 가게다. 이곳에서 판매되는 것은 크게 4가지로 나누어진다. 꽃 상태의 튤립이다. 그리고 구근 상태의 튤립과 수선화가 있다. 다음으로는 씨앗이다. 꽃을 피우는 화훼류가 있고, 식용 채소류가 있다. 그중에 관심이 가는 것은 구근이다. 옛날에 튤립과 수선화 구근을 사다가 꽃을 피워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게 실력이 부족해서인지, 그 다음해에는 꽃을 보지 못하곤 했다. 그래서 구근을 살 자신이 없다.

그래도 꽃가게에서 꽃들을 보니 기분이 상쾌해지고 마음이 밝아진다. 더욱이 이곳 스키폴 공항은 튤립이 심겨진 대형화분들이 곳곳에 있어 자연의 멋을 느낄 수 있다. 이제 공항의 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시간을 보낸다. 마침 앞에 앉은 네덜란드 사람과 잠깐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자연스럽게 박물관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가 된다. 왕립박물관에 있는 렘브란트의 '야경', 빈센트 반 고흐 박물관의 '자화상' 등으로 대화가 이어진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이들에 대한 대화가 지속적으로 이어지질 못하다. 짧은 영어실력 때문이다. 느낌과 감정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게 영 쉽지 않다. 그럭저럭 의사소통은 되는 것 같은데 진심을 전달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대화가 지속되려면 야경에 대해, 자화상에 대해 계속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그게 안 된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 이십분 정도는 할 수 있지만, 그 후는 대화가 중단되어 서로 어색함을 느낀다.    

공항 안에 있는 왕립박물관(Rijksmuseum) 분점

▲ 왕립박물관 모형 ⓒ 이상기


지루한 가운데서도 찾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 있다. 그것은 예기치 않게 찾아 왔다. 시간을 보내기 위해 면세점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만난 왕립박물관 분점이다. 왕립박물관은 암스테르담 시내에 있는 네덜란드 최고 최대의 박물관이다. 이곳에는 네덜란드 회화의 황금시대인 17세기 미술품들이 가장 많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 그림을 그린 대표적인 화가로는 렘브란트, 베르메르, 얀 스텐 등이 있다.

왕립박물관은 1798년 왕궁이 있던 헤이그(Den Haag)의 후이스 텐 보쉬(Huis ten Bosch)에 생겨나 1800년 문을 열었다. 현재 베아트릭스 여왕이 거주하는 궁전이 그곳이다. 그러나 8년 후 네덜란드의 왕이 된 루이 보나파르트가 박물관을 암스테르담으로 옮겼고, 암스테르담에 있던 유물을 이곳에 합치며 더 커졌다. 그리고 왕립박물관이 현재의 위치로 오게 된 것은 1885년이다.

▲ 반 고흐 미술관 ⓒ 이상기


바깥의 장식이 화려하고 넓은 정원을 가진 왕립박물관은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이었다. 그 후 주변에 시립박물관, 반 고흐 미술관, 암스테르담 콘서트헤보 교향악단이 생기면서 박물관 주변이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현재 왕립박물관에는 그림뿐 아니라 건축과 조각 등 유럽의 예술 전반에 걸친 걸작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1952년부터는 중국, 일본 등 아시아 예술작품도 전시되고 있다. 현재 이곳에 있는 유물은 7,000점이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 왕립박물관의 분점이 스키폴 공항에 있는 것이다. 이층으로 이루어진 분점은 일층이 판매점이고 이층이 전시관이다. 일층에는 왕립박물관 도록과 책자 등 도서류와 그림이나 전시물의 복제품이 판매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복제품이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우유를 따르는 하녀(Milk maid)'다. 또 이곳에서는 네덜란드 관련 기념품도 팔리고 있다. 문구류, 팬시제품, 도자기 등 다양하다. 튤립 모양의 가방이 눈에 띄는데 너무 튀어 사기가 좀 그렇다. 이들을 보고 나서 우리는 2층 전시관으로 올라간다.

▲ 루티후이스의 '젊은 여인의 초상' ⓒ 이상기


2층에 가니 약 스무 점쯤 되는 소품이 걸려 있다. 대부분 회화고 한두 점이 도자기로 만든 벽화다. 회화는 풍경화, 정물화, 초상화 등 다양하다. 화가들의 면면을 보니 이름이 모두 낯설다. 아드리안 반 데 베네로부터 얀 스텐까지 대부분 17세기 화가들이다. 그중 가장 눈길이 가는 그림은 이삭 루티후이스(Isaack Luttichuys: 1616-1673)의 '젊은 여인의 초상'과 얀 스텐의 '여관 내부'다.

'젊은 여인의 초상'은 1656년 작으로 부유한 젊은 여성을 그리고 있다. 일부 해석자들은 종교적인 여성으로 보기도 한다. 푸른색 바탕에 금색 실로 모양을 낸 공단에 흰색의 짧은 소매가 신성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여기에 귀걸이, 목걸이, 팔찌 그리고 반지가 귀족적인 느낌을 더해 준다. 가슴 오른쪽에 걸린 검은색 브로치는 시선을 그리로 집중시키며, 왼손에 들린 타조 깃털은 이국적인 느낌을 더해 준다. 사실적이면서도 이상적인 분위기를 지닌 초상화다.

▲ 얀 스텐의 '여관' ⓒ 이상기


얀 스텐이 그린 여관의 모습은 풍속화다. 여관에서 남성들이 놀이를 즐기기도 하고 술을 먹기도 한다. 다른 한쪽에서는 나이 지긋한 노인이 주모에게 수작을 부리고 있다. 설명을 보니 1661년 작으로 되어 있다. 이들 전시품은 소품에 불과하지만 왕립박물관을 알린다는 점에서 그 홍보효과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해 빈센트 반 고흐 미술관에 가 보았지만 왕립박물관을 보지 못한 나로서는 왕립박물관의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어 참 좋았다. 우리 박물관도 벤치마킹해야할 사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곳에서 왕립박물관의 하이라이트 250점을 담은 도록도 하나 샀다.
      
생각보다 시간이 빨리 흘러갔다. 시간이 많아 아주 지루할 줄 알았는데 꽃구경하고 박물관 구경하고 물건 사다보니 비행기 탑승시간이 한 시간 밖에 안 남았다. 스키폴 공항은 규모가 꽤 크고 면세점에 전시된 물건이 다양해서 살 물건이 좀 있는 편이다. 치즈도 사고 가방도 사고 간단한 선물도 한두 가지 샀다. 이것은 모두 국내에서 구할 수 없거나 가격이 월등히 싼 물건들이다. 나와 아내는 피곤하지만 만족해하면서 5시에 탑승장에 도착한다. 우리 일행들이 보인다.

차갑고 쨍한 인천공항의 공기가 좋아

▲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 풍경 ⓒ 이상기


암스테르담에서 인천으로 가는 비행기는 6시 정각에 출발한다. 갈 때만큼 사람이 없어 우리 옆자리가 비었다. 우선 운신할 공간이 있어서 좋고 다리를 마음대로 뻗을 수 있어서 좋다. 여행 마지막에 감기가 조금 와서 몸 상태가 안 좋아 더욱 다행이다. 유럽의 호텔들은 모두 온풍기를 돌리는 시스템이라 호텔방의 공기가 건조하고 탁한 편이다. 그래서 막판에 감기가 온 것 같다.

서울까지는 9시간 15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비행기는 서쪽으로 갈 때보다 동쪽으로 갈 때 시간이 조금 덜 걸리는 경향이 있다. 지구의 자전방향과 공기의 흐름 때문이다. 나는 모든 걸 포기하고 눈을 감는다. 요즘은 비행기 내에 시청각 시설이 잘 되어 있어 드라마,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음악 등을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다. 생각보다 잠이 잘 안 온다. 또 출발하고 나서 두 시간 후, 도착하기 한 시간 전에 식사가 나오고 중간 중간 음료가 제공되니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다.

그래도 시간이 잘 가 계획보다 15분쯤 늦은 한국시각 11시30분에 인천공항에 도착한다. 밖의 기온이 영하 7도라고 한다. 우리는 그 동안 영상 5도에서 17도 사이 땅을 여행하고 다녔는데, 이제 영하의 땅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신문을 보니 그동안 구제역이 더 많이 퍼지고, 그 동안 추위가 대단했다고 적혀 있다. 헤드라인이 '워낭소리가 사라진다'와 '한강이 얼었다'이다.

▲ 세비야에 있는 마리아 루이자 공원의 겨울 ⓒ 이상기


인천공항을 나오니 정말 공기가 차갑고 쨍쨍하다. 차가운 공기가 코를 거쳐 가슴 속으로 들어가니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남유럽 공기에서 느끼던 텁텁함이 사라져 좋다. 감기가 저절로 나을 것 같다. 그렇지만 겨울 풍경은 남유럽에 비해 황량하다.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우리에 비해 기온이 높아 겨울에도 푸른 초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열흘 동안 지중해와 대서양을 끼고 있는 세 나라를 여행하면서 보니, 그들이 우리보다 자연의 혜택을 조금 더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땅이 비옥하고 평야지대가 넓게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또 강수량이 우리처럼 여름에 집중되어 있질 않아 홍수의 피해를 덜 보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 선조들이 우리보다 좀 더 일찍 경제와 문화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사실 10세기 경 에스파냐를 통치했던 알 안달루스 왕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와 문화를 이룩했고, 15/16세기 에스파냐와 포르투갈 왕국도 전 세계를 양분해 지배할 정도였다.

▲ 바르셀로나 성가족 성당 ⓒ 이상기


그러한 번영의 결과를 후손들이 누리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본 문화유산 대부분도 13세기에서 18세기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오히려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에서 본 유산만 비교적 최근인 19-20세기의 것들이다. 원래 문화는 경제 번영의 결과 나타나는 것이고, 문화가 번성하면 사람들이 나태해져 경제에 문제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은 현재 경제 문제에 부닥쳐 있다.

이제 이들 나라를 떠나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정말 좋은 경험을 했다. 책으로 읽고 비디오로 수없이 본 것을 눈으로 발로 그리고 입으로 체험할 수 있었으니까. 바스쿠 다 가마도 만나고, 세르반테스 소설의 배경도 지나가고, 무어왕조의 퇴각로를 따라가 보기도 하고, 안토니우 가우디의 흔적도 찾아가면서 정말 호사를 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하는데 다행히 다마는 없었다. 함께 한 모든 이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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