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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크로비오틱... 어디 음식인지 묻지 마시라

자연요리 연구가 재일교포3세의 한국 사랑

등록|2011.03.23 09:07 수정|2011.03.23 17:21

▲ 마크로비오틱 요리강좌가 열린 서울의 한 카페 ⓒ 오창균


"껍질과 뿌리를 떼어낸 현대의 부분식단은 죽은 음식이며 껍질과 뿌리까지 식재료로 사용하는 전체식단은 음과 양 어느 한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간에 사람의 몸을 맞추는 식단입니다. 제철에 나오는 채소, 과일과 자연조미료를 균형있게 사용하여 식재료가 가진 원래의 맛을 살려주고, 주식인 현미와 잡곡은 천천히 잘 씹어서 섭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난 21일 저녁, 서울의 한 카페에 10여명이 테이블에 둘러 앉아 일본어로 설명을 하는
한 여성에게 눈과 귀가 쏠려 있었다. 방송등에서 소개된 마크로비오틱(macrobiotic) 음식강좌는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두 시간 정도 진행이 되었고, 음식을 시식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몇가지 음식을 맛보는 참가자들의 표정은 무척 진지하다 못해 경직되어 보이기도 했다. 하루 전날, 기자와 만난 인터뷰에서 한국의 사찰음식과 매우 닮았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사찰음식을 여러번 맛 본 내 입맛에도 그랬고, 몸에 부담이 없으면서 몸 속에 쌓인 독소를 정화 해줄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위대한 생명의 요리로 알려진 마크로비오틱은 일본의 장수건강식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유럽과 남미등 여러나라에서도 신토불이(身土不二)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에 뿌리를 둔 식생활법으로서, 뿌리와 껍질까지 모두 섭취하는 일물전체(一物全體)를 원칙으로 하며 자연상태로 자라난 제철의 유기농채소와 과일에다 가공하지 않는 현미와 곡류등을 기본적인 주식으로 하며 동물성재료는 사용하지 않지만, 일부 응용된 요리에는 육류를 사용하는등 느슨하게 실천하기도 한다.

▲ 자연요리연구가 강가자(좌측)씨의 한국어가 약간 서툴러서 카페 수카라 대표 김수향(우측)씨가 통역을 해줬다. 두사람 모두 재일교포 3세. ⓒ 오창균


제일교포 3세 강가자(29), 그녀는 13살이 되던 해에 여섯살 위의 큰 언니로부터 자신의 조국은 일본이 아닌 한국이란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큰 언니도 이날 처음으로 학교선생님으로부터 자신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자식들 앞에서 부모님은 담담하게 1남3녀에게 그제서야 사실을 말해주었다고 한다.

어릴때 알았다면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에 대한 차별대우를 겪은 부모님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민단이나 총련과는 관련이 없는 일본학교에 보낸 것도 그런 연유였는지 모른다.

해방 후,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사람이 많던 시절에 건축일을 했다는 할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어머니쪽의 외할아버지도 일본으로 건너가 양복 옷감을 취급하는 일을 하였고, 강씨는 그렇게 해서 제일교포 3세가 되었다.

"처음에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무척 싫었다. 학교 교육이나 방송에서는 미국, 유럽이 최강의 부자나라이고, 아시아에서는 일본을 제외한 다른 나라는 가난하고 무지하다는 인식을 그 당시에는 갖게 했었다."

여전히 자신을 한국인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학교에서도 자신을 숨겨야 한다는 고민을 떨칠 수가 없었던 고등학교 1학년때 큰 언니와 해외 배낭여행을 떠났다. 여러나라에서 온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에 많은 변화가 생겼고, 한국인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한국에 대해서 알고 싶다는 생각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어릴 때부터 제과제빵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전문적으로 배우기 위해 농업고등학교(식품가공과)를 진학했다. 그러나 정신적 지주로서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줬던 큰 언니를 통해서 마크로비오틱을 알게 되어 생명과 환경을 생각한 음식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고교 졸업 후, 한국을 처음 찾아온 것은 한국말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6개월 과정의 한글어학원을 다니게 되었고, 한국의 전통음식과 사찰음식에 매료되어 배화여대(전통조리과)에 입학까지 하게되었다. 학교에서 배우는 중에도 전통음식점과 떡집의 주방에서 음식을 배우기도 했지만 한국과의 인연은 거기까지라고 생각을 했었다.

▲ 뿌리부터 껍질까지 요리에 사용하는 것이 마크로비오틱의 특징이다. ⓒ 강가자


대학 졸업 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으며 오사카에서 큰 언니가 운영하는 유기농카페에서
일을 좀 하다가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음식공부를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본에 한류문화를 소개하는 잡지 '수카라'를 발행하는 아톤출판사에서 한국에 식당을 내려고 하는데 책임자로 같이 일하고 싶다는 제의를 받게 되었다.

"음식점에서 스태프로 일은 해봤지만 책임자로서 일을 한다는 것이 크게 부담이 되었어요. 고민을 하다가 음식재료를 모두 유기농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조건을 받아줘야 한다고 요구했어요. 그쪽에서도 고민을 하는 것 같더니 조건을 받아주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3개월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이야기가 있는 음식을 만들고 연구하는 일을 1년여간 하다가 멕시코로 날아가 1년6개월간 원주민 마을 등을 찾아다니며 그 나라의 전통음식을 배웠다. 5년여 동안 한국을 들락거리면서 인도, 태국, 몽골의 전통음식을 배웠으며 앞으로는 유럽과 남미의 전통음식을 배우고 싶다고 한다.

- 한국에 가는 것을 부모가 반대는 안 했나?
"반대가 무척 심했다. 일본사람처럼 살았으면 좋겠는데 왜 한국에 가느냐며 말렸지만 나중에는 잘 다녀오라고 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도 할아버지 제사를 지냈다. 지금은 오빠가 제사를 물려받아서 지내고 있고, 어머니는 (한국식)김치와 반찬을 만들기도 했다. 나는 이런 것들이 모두 다 일본의 전통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서야 한국의 전통과 음식인 것을 알게 되었다."

- 여러나라에 음식여행을 다닐려면 경비도 많이 필요할텐데 부모에게 도움을 받나?
"스스로 마련해서 떠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 부모의 도움을 받는 것은 이상하다. (한국에서는 부모의 도움을 받은 경우가 많다는 질문을 다시 했다) 사람마다 (형편이) 다르겠지만, (한국에서는) 부모가 돈이 많으면 다 해주는 것 같은데 그것은 문제라고 본다. 부모가 다해주니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모르는 것 같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스스로 벌어서 열심히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나는 부모님이 안 도와준 것이 내게는 더 도움이 되었다.'

- 한국에 정착할 계획이나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정착할 생각을 해야될 것 같은데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 그러나 어느 나라에 있더라도 아주 편하다. 다만 일본에 가족이 있기 때문에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 좋을 것 같기는 하다. 기회가 오면 아이들을 대상으로 건강한 음식에 대한 교육을 하고 싶다. 또는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면 함께 일을 하고 싶은 생각도 있다."

▲ 가장 곤란한 질문이 음식의 국적과 이름을 물어보는 것이라고 한다. ⓒ 강가자


한국이 외국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되도록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려고 한다는 그녀는 일본이 한국보다 앞서서 먼저 해 본 일들이 많은데 일본에서 했던 것을 그대로 따라하는 어떤 일들을 보면 슬픈 것도 많단다. 그래서 음식을 하는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생각해 봤을 때, 음식교육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고. 돈을 벌어야 하는 식당을 운영하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일본의 대지진 이후, 매일 뉴스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는 그녀는 충격과 슬픔이 컸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은 안정이 되었고, 생각도 하게 되었다며 (원전) 사고가 나서 위험한 것이 아니라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위험하다며 이번 사고를 계기로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도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환경단체 등에서 (원전)반대운동을 하는 것에 동의를 한다면서도, 반대라는 말을 무조건 쓰는 것 보다는 원자력이 이런 장점도 있는 반면에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시골의 오일장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음식재료를 찾고, 조리법을 물어가면서 배운다는 그녀는 마트가 아닌 재래시장에서 상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장을 보는 것이 재미있다고 한다. 자주 가는 모래내시장이 재개발로 철거되어 사라지고 일부만 남게 되던 날, 할머니들과 눈물을 흘리며 시장이 없어진 것이 무척 슬펐다고 한다.

▲ 이야기가 있는 음식을 만들기 위해 농촌의 오일장을 찾아간다고 한다. ⓒ 강가자


한국에 음식점은 많지만 자연상태(제철 채소)의 재료와 조리법을 갖추고 음식을 내놓는 곳이 드문 것이 무척 안타깝다는 그녀는 여러나라에서 배운 전통 음식 조리법을 나라마다 다른 식재료에 응용한다.

새로운 맛으로 만들어진 그녀의 음식에는 국적도 없고 이름도 없다(가장 어려운 질문이 어느나라 음식이며 이름을 묻는 것이라고 한다). 농촌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자신의 요리법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어느 곳에서 펼치게 될 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그녀에게 한국은 더 이상 낯설어 보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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