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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당 전화요금이 300만 원, 누구 짓이야?

[연극 속의 노년 26] <경로당 폰팅 사건>

등록|2011.03.24 09:07 수정|2011.03.24 09:07
누구는 늙어 꼬부라진 노인네들이나 가는 곳이라고 입을 비쭉거리기도 하고, 누구는 집 가깝고 시설 좋고 동네 친구들 모여 시간 보내기 최고라도 자랑하기도 한다. 전문가들 중에서도 이제는 경로당을 재가복지시설의 거점으로 삼아 적극적으로 개선해 나가야 한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르신들의 동네 사랑방 정도로 그냥 그렇게 놔두는 것이 좋겠다는 사람도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스스로 물어본다. 앞으로 노인이 되면 경로당에 갈 생각이 있는지. 대답은 잠시 뒤로 미루고, 요즘 경로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구경하러 갔다. 연극 <경로당 폰팅 사건>이다.

요즘 경로당에선 무슨 일이?

연극 <경로당 폰팅 사건> 연극 <경로당 폰팅 사건> 포스터 ⓒ 극단 드림

장수아파트 경로당. 두 할아버지와 세 할머니가 매일같이 얼굴 맞대고 놀고, 이야기 나누고, 다투고, 하소연하고, 춤도 배우고, 정보를 주고 받고, 효도관광 다니고, 다른 사람 흉도 보고, 마을 일 걱정도 하고 그러면서 하루를 보내는 곳이다.

새로온 할아버지가 마음에 들어 슬쩍 얼굴 붉히기도 하고, 택배 총각만 보면 괜히 기분이 좋다. 장기를 두며 티격태격 하다가도 금세 화해하고, 자식 자랑에 핏대를 세우기도 한다. 살갑게 굴다가도 맘에 들지 않으면 금방 목소리가 높아지고 드잡이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장수경로당에 사건이 생겼다. 경로당 전화요금을 아파트 부녀회에서 대신 내고 있는데, 어느 날 300만 원에 가까운 요금 청구서가 날아온 것. 전화국에 알아보니 누군가 폰팅을 해서 그렇게 거액의 전화요금이 나왔다는 게 아닌가. 범인을 찾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그런데 모두 조금씩 수상하다. 아무래도 의심이 간다.

소극장에 들어서니 건양대 디지털콘텐츠학과 1학년 학생들 50여 명이 단체로 와서 객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재기발랄함은 연극 관람에도 예외가 아니어서 어찌나 반응이 빠르고 적극적인지 연극도 연극이었지만 스무 살 젊은 사람들의 하는 양을 보는 것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무대 위 할머니 할아버지의 몸짓과 대화에 한마디로 빵빵 터졌다. 덩달아 내 웃음소리까지 저절로 커졌다. 중간 중간 할머니 할아버지의 개인사가 밝혀질 때를 빼놓고는 연신 웃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연극은 재미있다. 젊은 배우들의 노인 연기가 그리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

자식들이 짐스럽게 여기는 것 같아 돈벌이에 나선 할머니, 미국으로 이민을 가면서 한 달 후에 모시고 가겠다던 아들과 연락이 끊겨 가슴이 타들어가는 할머니, 오래 자리 보전하고 있는 아내 간병에 지친 할아버지, 일찍 세상 떠난 자식을 가슴에 묻고 사는 할머니, 빚 때문에 거리를 떠도는 자식 생각에 애가 끓는 할아버지.

이 연극이 대학 신입생들 웃고 울린 까닭

할머니 할아버지의 인생사에 나란히 앉은 젊은이들이 어떤 반응일지 궁금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이 나보다 먼저 눈가를 훔치고 코를 훌쩍이는 것이었다. 한창 신이 나 있을, 그래서 붕붕 떠다닐 것만 같은 대학 신입생들의 어디를 어떻게 건드린 것일까.

공연이 끝난 후 배우들과 사진 찍느라 바쁜 학생들을 붙잡고 물었다. 대답이 간단명료하다. "재미있어요...가슴이 뭉클했어요...엄마 아빠 생각이 났어요...할머니 할아버지가 엄청 귀여워요...마지막이 대박이에요. 폰팅 사건이 그렇게 마무리 될 줄 생각도 못했는데, 진짜 감동이에요."

연극 <경로당 폰팅 사건> 배우들 공연을 마친 후 배우들과 함께(가운데가 작가 이충무 교수) ⓒ 유경



연극 <경로당 폰팅 사건>의 작가인 건양대 디지털콘텐츠학과 이충무 교수를 만났다. 작품을 쓰게 된 동기를 물으니, "어른은 어른대로,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 대로 서로 소통이 안돼 '외롭다'는 공통점이 이 작품을 쓰게 했다. 사람은 나이를 떠나 모두가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이해하면서 공감대를 넓혀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자신이 가르치는 스무 살 대학생들의 열렬한 반응에 대해서는 자신도 놀랐다고 했다. "솔직히 학생들이 이렇게 울고 웃을 줄 몰랐다. 앞으로 우리 모두가 '세대'라는 구분보다는 '인간'을 먼저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면서 "연극을 보고 나서 부모님께 전화 한 통 걸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덧붙였다.

나이 들면 나도 경로당에 가게 될까

원숙한 배우들의 깊이 있고 묵직한 노년 이야기와 연기도 물론 좋지만, 이렇게 울고 웃고 장단 맞출 수 있는 젊은 배우들의 노년 연기도 나름 맛이 있다는 것을 모처럼 느꼈다. 웃으며 울게 만들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면서도 하염없이 무거워지지 않게 균형을 잡아주는 것은 작가의 인생 경험과 연륜이 만만치 않을 것이란 추측을 가능케 한다.

작가 이충무 교수에게 물으니 올해 나이 쉰 둘이란다. 그럼, 그렇지. 노년과 청년 사이의 낀 세대, 나이 듦을 몸소 겪고 있으면서도 아직은 한 발짝 떨어져 있을 수 있는 중년이다. 덕분에 할머니 할아버지의 현실을 이해하면서도 적당한 거리 두기가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어떤 노년을 꿈꾸느냐는 질문에 부드러운 웃음을 섞어 대답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꽃샘바람이 찬 봄날 저녁, 장수경로당 어르신들과의 만남은 즐거웠고 가슴 뭉클했고 그래서 행복했다. 그나저나 이 다음에 내가 나이 먹으면 경로당에 나가게 될까? 여전히 그 대답은 뒤로 미루기로 한다. 다만 내가 가고 싶은 곳, 친구들과 지내고 싶은 곳이 되도록 만들어가는 데 나같은 사회복지사도 조금은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서 나는 친구들과 어떤 사건을 벌이고 같이 울고 웃게 될까...
덧붙이는 글 연극 <경로당 폰팅 사건> (이충무 작, 주진홍 연출 / 출연 : 정종훈, 정래석, 김 현, 하유미, 김소희, 최상민, 정혜림) ~ 5월 29일까지 / 소극장 '모시는 사람들'(02-747-0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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