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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딸 반장됐대"는 말에, "어쩌다가?"

직책이 사람을 만듭니다, 내 이런 시절 선생님에 대한 추억

등록|2011.03.25 08:31 수정|2011.03.25 11:26
"영은이가 실장됐대."
"어쩌다가?"

집사람과 나눈 대화입니다. 그런데 제 대답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딸아이가 실장(반장)이 되었다면 아빠라는 사람은 적어도 '축하해 줘야겠네'하는 호들갑은 아니어도 기쁜 척은 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대답이 '어쩌다가?".

딸아이는 소위 잘 나간다 그룹(?)의 아이였습니다

▲ 기사의 주인공인 제 딸아이 모습입니다. ⓒ 신광태

지금 고3인 딸아이는 공부하고는 참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의 친한 친구라는 녀석들도 비슷한 수준의 아이들만 만나게 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녀석이 중3이 되던 해 3월 어느 날, 집사람이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답니다.

"넌 어쩌면 딸애가 반장이 되었는데, 입 싹 닦니?"
"왓(What), 우리 딸이 반장이라고?"

담임에게 전화를 걸어서 확인을 했더니, "어머님께서 전화 참 잘하셨습니다. 지금 잠깐만 학교에 다녀가시죠?"

왜 담임이 오라고 했는지 집사람은 충분히 짐작을 했습니다.

딸아이는 소위 잘 나간다 그룹(?)의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반장을 하게 되었는지 나중에 안 일이지만, 딸 아이 또래의 친구들(껌 좀 씹는다는 아이들)이 친구 중에 소위 끝발 있는(반장) 애를 하나 만들어 놓으면 자신들의 1년이 편해 질 것이라고 생각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딸아이 모르게 전체 반 아이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넣어 90% 이상의 득표을 얻게 해 반장을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담임이 한숨을 쉬며, "어머님 이번에 영은이가 반장이 된 것 들으셨죠? 전체 반 아이들을 불량하게 만들까 걱정입니다. 집에서 교육 좀 잘 시켜주세요."

술 한잔 하자는 동료직원의 제안도 단호히 거절하고 조기 퇴근해 저녁식사 자리에 딸아이와 마주하고는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혹시, 아빠한테 깜박하고 하지 못한 말 있니?"
"아니. 왜?"
"너 반장됐니?"
"어떻게 알았어? 근데 나 반장 안 한다고 선생님한테 낼 말할 거야."
"그러지마! 잘했어. 아빠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

녀석은 제가 생각해도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아빠! 절대로 누구한테도 나 반장되었다는 말 하지 마!"

부탁이 아니라 협박에 가까운 말입니다.

내 아이가 달라졌어요

[딸아이]이 아이를 통해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 신광태

몇 달을 쭉 지켜보니까 눈에 보일 정도로 아이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집에서는 평소 책을 보는 것을 본 적이 없던 아이가 책상에 앉아서 공부하는 모습도 눈에 뜨이고, 집에서 500여m 떨어진 학교도 매일 지각만 하던 녀석이 학교 가는 시간도 빨라지고, 말 그대로 모범생이 되어 간다고 생각을 하던 어느 날, 담임선생님이 집사람에게 전화를 했답니다.

"영은이가 달라졌어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아이들(껌 좀 씹던)과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고 매사에 적극성을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마 이 아이가 반장이라는 직책을 맡고는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을 스스로 알아 가는 것 같았습니다. 큰 폭은 아니지만, 성적도 올라가는 게 보였구요. 그 아이에게 중3 기간은 상당히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시험을 봐야 하는데, 그전(반장이 되기 전) 까지만 하더라도 이 아이의 실력은 관내에 위치한 실업고등학교에 갈 수준이었습니다. 그런데 반장이기 때문에 공부도 어느 정도 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인지 스스로 알아서 공부한 결과는 그 중학교에 딸린 고등학교(인문계)로 진학하는 영광도 안았습니다.

직책이 사람을 만듭니다

당연히 반장이 되기 전의 친구들(껌을 씹던 아이들)과 헤어지게 되었으니,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다시 반장이 되는 일은 없어졌습니다.

중3 때 반장을 역임한 영향 때문인지, 공부를 꾸준히 해 오던 녀석이 금년도 고3에 올라가면서 또 반장(실장)이 된 겁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옛날 중3 때는 껄렁한 아이들이 자기들이 편하자고 우리 아이를 반장으로 만든 경우였고, 이번은 아이들 통솔력과 어느 정도의 학업에 대한 실력을 인정받아 당당히 반장으로 당선 된 것입니다.

"어이 실장! 학교생활 힘들지 않냐?"라는 내 농담에 옛날에는 화를 내며 반장이란 소리 하지 말라던 녀석이 이젠 당연한 듯 '남학생들 몇 녀석이 말을 듣지 않는데, 날 잡아서 혼내줄 생각이야'는 말을 합니다. 직책이 사람을 만드는 구나!

선생님! 오 나의 스승님!

▲ 어렸을때 선생님의 한마디는 나를 당당하게 만들었습니다(우측) ⓒ 신광태


문득 어렸을 때 기억이 떠오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나는 거의 아이들의 눈에 뜨이지 않는 아이였습니다. 때문에 자신감 결여로 선생님의 질문에 아는 것도 대답을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 했고요. 그도 그럴 것이 가난 때문에 늘 검정 고무신에 그 흔한 책가방 대신 책보(책을 싸는 보자기)를 들고 다니기에 아이들은 저를 좀체로 가까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담임선생님께서 전체 반 아이들 앞에 나를 불러 세웠습니다. '도대체 내가 무슨 혼날 짓을 했나'라는 생각을 할 즈음, 느닷없이 선생님께서 큰 소리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들도 신광태처럼 씩씩하고 용감한 학생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난 씩씩한 적도 없고 용감한 일을 한 적도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선생님은 아이들을 개별적으로 꾸짖을 때마다 "신광태에게 배워라"라는 말씀을 수시로 하셨습니다.

그 이후로 아이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 명 두 명 내 편이 되는 학생들이 늘어나, 어느 날 뒤돌아 본 나는 정말 씩씩하고 용감해져 있었습니다. 정진남 선생님! 4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또렷이 기억되는 존함입니다.

정치인들도 감투를 썼으면 딸아이처럼 스스로 모범이 되는 세상이면 좋겠습니다. 아니면 선생님이 내게 하셨던 것처럼 그들에게 참 잘한다(씩씩하고 용감하다)라는 말을 해 주어야 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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